[인도와 한국의 위인들]
인도의 혹독한 겨울을 네 번째 맞이하고 있습니다. 두세 번 경험하면 익숙해질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것은 큰 착각이었습니다. 매년 더 민감해지는 체감온도와 더욱 짙어진 스모그는 여전히 인도의 겨울을 힘들게 만듭니다. 추운 날씨는 옷을 더 입고 난방기구를 틀면 되지만, 마스크를 써도 코를 찌르는 매캐한 냄새와 뿌연 하늘은 쉽게 익숙해지지 않습니다. 매년 겨울이 찾아오듯, 한 해의 끝도 손님처럼 어김없이 다가옵니다. 춥고 뿌연 하늘 아래에서 올해가 쉽지 않았음을 실감하지만,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올해 제게 가장 인상 깊고 기뻤던 사건은 바로 한강 작가님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이었습니다. 『채식주의자』를 읽으며 느꼈던 인간의 연약함과 권력의 무서움, 그리고 그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현실의 무게는 여전히 제게 강렬한 울림을 줍니다. 평범한 일상의 전개 속에서 어떻게 그런 섬세함이 숨어있는지 참 놀랍습니다. 한강 작가님이 보여준 통찰과 감각은 대한민국 문학의 힘을 세계에 각인시켰습니다. 인도에도 이와 비슷한 순간이 있었습니다. 1913년, 라빈드라나트 타고르가 『기탄잘리』로 아시아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며, 동양 문학과 철학을 서구에 알렸습니다. 타고르는 인간과 자연, 신과 인간의 조화를 노래하며 서구 중심의 문학계에 새로운 가치를 전했습니다.
[동방의 등불과 문화강국의 비전]
타고르는 다음과 같은 시로 우리나라를 ‘동방의 등불’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적이 있었습니다.
시의 번역본은 다음과 같습니다.
일찍이 아시아의 황금 시기에
그 찬란한 등불의 하나였던 코리아,
그 등불이 다시 한번 밝혀지기를,
오직 너의 힘으로.
100년 전에 노벨문학상을 받은 타고르가 과거의 영광을 바탕으로 한국의 미래가 다시 빛날 것을 예견하고 "오직 너의 힘으로"라는 표현으로 타국의 도움 없이 한국의 자주적인 독립과 부흥을 바라는 메시지를 보면서 꿈은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되었습니다. 타고르는 한국을 '동방의 등불'로 비유하며, 한국이 과거의 영광을 넘어 새로운 아시아의 중심으로 부상하기를 염원했습니다. 이는 단순히 독립을 넘어, 한국이 세계에 희망과 빛을 주는 나라가 되기를 바란 그의 메시지였습니다. 한강 작가님의 노벨문학상을 받은 쾌거를 보면서 생각나는 사람이 또 있습니다. 바로 백범 김구 선생님입니다. 한평생 독립운동을 하시고 비운의 총탄에 돌아가시면서 다음과 같이 문화강국의 비전을 표현했습니다.
"내가 원하는 우리나라, 남의 것을 부러워하지 않는 나라,
가진 것으로 배부르고 만족할 줄 아는 나라,
군대와 무기로 세계를 제패하는 나라가 아닌,
문화의 힘으로 세계를 행복하게 하는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다." (백범일지 중에서)
오늘날 한강 작가님의 문학적 성취와 한류가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모습은 김구 선생님이 꿈꾸셨던 ‘문화강국’의 비전이 현실로 구현된 사례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BTS와 같은 글로벌 아이콘은 단순히 한국 문화를 알리는 것을 넘어, 세계에 감동과 희망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와 더불어, 인도에도 백범 김구 선생님과 동시대를 살며 독립운동에 헌신하신 분이 있습니다. 바로 위대한 영혼, 마하트마 간디입니다. 김구 선생님과 간디의 철학은 독립과 민족 화합이라는 공통된 가치를 바탕으로 하며, 두 나라가 이들의 희생과 비전 위에 오늘날의 자긍심을 세울 수 있었습니다. 두 분의 숭고한 철학은 시대와 국경을 초월하여 두 나라를 지탱하는 든든한 기둥으로 남아 있습니다. 다만, 두 분 모두 정치와 종교적 갈등으로 인해 생을 일찍 마감했다는 점은 여전히 아쉬움을 남깁니다. (백범 김구 선생님과 마하트마 간디는 인도살이 열네 달 차(22.10월)호를 참고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윤봉길 의사와 바가트 싱: 젊은 저항의 상징]
두 나라 독립운동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윤봉길 의사와 바가트 싱(Bhagat Singh)의 투쟁은 서로를 떠올리게 합니다. 윤봉길 의사(1908~1932)는 충남 예산에서 태어나 1931년 상하이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뛰어들었습니다. 그는 일본 천황의 생일과 상하이 점령 전승을 기념하는 행사에서 도시락 폭탄을 투척해 시라카와 요시노리 대장을 즉사시키고, 일본 고위 관료와 장교들에게 큰 타격을 입혔습니다. 윤봉길 의사는 이 의거로 국제적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존재를 각인시켰으며, 결국 1932년 12월 19일 일본 가나자와 형무소에서 총살당하며 24세의 젊은 나이로 순국했습니다.
김구선생님과 윤봉길 열사 (출처 : 공훈전자 자료관)
바가트 싱(1907~1931)은 인도 펀자브 출생으로 1920~30년대에 활동한 급진적 독립운동가입니다. 그는 1929년 델리 의회에 경고용 폭탄을 투척하여 영국 식민 통치를 상징적으로 항의했습니다. 이 폭탄은 살상 목적이 아닌 경고용으로 설계되었으며, 바가트 싱은 체포된 뒤 법정에서 독립운동의 정당성을 강하게 주장하며 전 세계에 영국 식민지의 부당함을 알렸습니다. 1931년 영국에 의해 교수형을 당하며 23세의 나이에 생을 마감했습니다. 윤봉길 의사와 바가트 싱은 폭탄 투척의 목적과 방식에는 차이가 있었지만, 젊은 나이에 민족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열정과 용기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들의 희생은 두 나라가 외세의 침략에서 벗어나 독립을 쟁취하는 데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바가트 싱 (출처 : the times of india.com)
[유관순 열사와 라니 락슈미바이: 여성 지도자의 용기]
여성 독립운동가로서 유관순 열사와 라니 락슈미바이(Rani Lakshmibai)는 각각 한국과 인도의 독립운동에서 상징적인 존재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유관순 열사(1902~1920)는 3·1 운동 당시 일본의 식민 통치에 비폭력적으로 항거하며 독립운동의 정당성을 세계에 알렸습니다. 그녀는 체포된 뒤에도 독립운동에 대한 신념을 굽히지 않았으며, 결국 1920년 옥중에서 고문 끝에 18세의 나이로 순국했습니다.
라니 락슈미바이 (Rani Lakshmibai) 전투장면 (출처 : hindustan.org)
라니 락슈미바이(1828~1858)는 잔시 왕국의 여왕으로, 영국 동인도회사의 침략에 저항하며 군대를 이끌고 싸운 지도자입니다. 남편이 사망한 뒤, 영국이 잔시 왕국을 강제 합병하려 하자 독립을 위해 군대를 조직하여 전투를 벌였습니다. 1858년, 그녀는 영국군과의 최후 전투에서 전사하며 인도의 민족 영웅으로 남았습니다. 유관순 열사와 라니 락슈미바이는 비폭력과 무장 투쟁이라는 차이가 있지만, 각각의 방식으로 민족의 독립과 자존을 위해 헌신한 여성 지도자로 평가받습니다. 두 사람의 희생은 오늘날까지도 한국과 인도에서 강렬한 영감과 자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과학 기술의 발달을 이끈 위대한 위인들: 장영실과 아리아바타]
과학 기술의 발전은 역사 속 위대한 위인들의 노력 덕분에 가능했습니다. 조선 세종대왕 시대의 천재 과학자 장영실은 그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허진호 감독의 영화 ‘천문: 하늘에 묻다’는 장영실과 세종대왕의 관계를 생동감 있게 그려냈습니다. 특히 장영실 역의 최민식과 세종대왕 역의 한석규 배우가 주고받는 대사가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장영실): "왜 그런 어려운 일을 혼자 가시려고 하시옵니까, 전하?"
(세종): "혼자라니, 이 사람아... 나에겐 자네라는 벗이 있지 않은가."
이 대화는 두 사람의 관계뿐만 아니라, 과학과 기술을 향한 그들의 열정을 잘 보여줍니다. 장영실은 간의, 혼천의, 물시계 등 혁신적인 발명품을 통해 조선의 과학기술을 르네상스 수준으로 끌어올렸습니다. 그의 업적은 세종대왕의 전폭적인 지원과 신뢰 속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영화 '천문 : 하늘에 묻다' 포스터 (출처 : 나무위키)
인도에도 장영실과 같은 위인이 있습니다. 바로 아리아바타(Aryabhata)입니다. 그는 장영실보다 약 1,000년 앞선 476년경, 고대 인도의 마가다 왕국에서 태어나 인류 과학사에 길이 남을 업적을 남겼습니다. 아리아바타는 현대 수학과 천문학의 기틀을 마련한 선구자였습니다. 그는 지구가 자전한다는 개념을 최초로 제시하고, 지구의 크기를 정확히 계산했습니다. 또한 태양과 달의 운동을 연구하여 월식과 일식을 과학적으로 설명했습니다. 이러한 발견은 1543년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의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보다 무려 1,000년 이상 앞선 것으로, 그의 선구적인 업적을 보여줍니다. 아리아바타의 또 다른 위대한 업적은 수학에서 "0"의 개념을 정립한 것입니다. 그는 숫자의 자리값(place value)을 강조하며 "0"이 숫자의 위치를 보존하고 값의 차이를 만들어낸다는 사실을 이해했습니다. 예를 들어, 10, 100, 1000과 같은 숫자에서 "0"의 위치가 숫자의 값을 결정한다는 점을 수학적으로 도입한 것입니다. 그는 이 개념을 바탕으로 지구 둘레와 행성 궤도의 정밀한 계산을 수행했습니다. 천문학 연구에서는 삼각법과 각도 계산에서 "0"의 개념을 활용해 계산의 정확성을 높였으며, 그의 연구는 후대 인도와 이슬람 천문학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다만, 숫자 "0"을 직접적으로 사용한 것은 그로부터 약 200년 후인 7세기 브라마굽타(Brahmagupta)에 의해 완성되었습니다. 브라마굽 타는 "0"을 연산에 도입하며 덧셈, 뺄셈, 곱셈 등 수학적 연산의 기초를 마련했습니다. 장영실과 아리아바타는 각자의 시대와 환경 속에서 과학과 기술의 발전을 이끈 위인들입니다. 장영실은 실용적 발명을 통해 조선 사회를 혁신했으며, 아리아바타는 수학과 천문학을 바탕으로 인류의 우주 이해를 확장했습니다. 두 사람의 업적은 오늘날까지도 과학과 기술 발전의 밑거름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아리아바타 초상화(sanskristicultureofindia.com)
[문화강국: 세종대왕과 악바르 대제의 업적 비교]
한글을 창제하고 여러 제도를 정비하며 조선 왕조 500년의 근간을 마련한 세종대왕은 한국 역사에서 문화 강국의 기반을 다진 상징적 인물입니다. 그의 업적에 필적하는 인도로는 무굴 제국의 제3대 황제인 악바르 대제(Akbar the Great, 1542~1605)를 꼽을 수 있습니다. 악바르 대제는 무굴 제국의 전성기를 이끌며 인도의 문화적 르네상스를 개척한 인물로 평가받습니다.
세종대왕은 한글 창제를 통해 조선의 민중이 문자를 읽고 쓸 수 있도록 하여 지식과 정보를 보편화했습니다. 또한, 집현전을 설치하여 학문 연구와 실용 서적의 편찬을 지원하며 농업, 의학, 과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민중의 삶을 향상했습니다. 특히, 아악(雅樂)을 체계화하여 전통 음악을 발전시키고 조선의 정체성을 공고히 했습니다.
악바르 대제 또한 문화와 학문의 발전을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는 인도의 다문화적 특성을 존중하며 힌두교, 이슬람, 자이나교, 불교 등 여러 전통과 철학을 융합했습니다. 이를 통해 종교적 화합과 문화적 융합을 이끌어냈으며, 다양한 종교 문헌과 철학서를 페르시아어로 번역하여 학문적 교류를 촉진했습니다. 그의 궁정에서는 『라마야나』와 『마하바라타』 같은 힌두교 서사시가 보급되어 인도 전통문화가 더욱 풍요로워졌습니다. 건축에서도 그는 중요한 유산을 남겼습니다. 악바르 대제는 타지마할로 대표되는 무굴 건축 양식의 기초를 마련하며, 독창적인 예술적 전통을 정립했습니다. 이는 오늘날까지도 인도의 문화적 정체성을 상징하는 유산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악바르 대제 초상화(출처: newindiaexpress.com)
위대한 두 위인은 각각 각각 조선과 인도에서 새로운 왕조의 세 번째 왕으로, 문화와 학문을 통해 국가의 기반을 다진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종대왕은 한글 창제를 통해 민중의 삶을 직접적으로 변화시켰고, 아크바르는 종교와 문화의 융합을 통해 다양한 민족과 전통을 하나로 묶으며 무굴 제국의 기반을 강화했습니다.
세종대왕과 악바르 대제의 업적은 단순히 문화의 보급과 발전에 그치지 않고, 각자의 나라가 자주적 정체성과 문화적 자산을 확립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습니다. 이들의 노력은 오늘날에도 한국과 인도의 문화적 유산으로 남아 있으며, 문화강국으로서 두 나라의 위치를 공고히 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와 인도의 위인들의 삶을 되돌아보며, 그분들이 얼마나 험난한 길을 걸었는지 깨닫게 됩니다. 때로는 기득권 세력에 맞서며 고난을 감내했고, 때로는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키는 용기를 보여주었습니다. 이들의 희생과 헌신 덕분에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터전이 마련되었으며, 더 나은 세상을 꿈꿀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의 새로운 진리와 발명품이 탄생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을까요? 그 과정에서 겪었을 실패와 고통을 상상할 때, 위인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분들의 노력과 헌신은 단순히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에게 교훈과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혼란과 어려움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위인들의 삶 속에서 희망과 용기를 배우고, 그들이 보여준 슬기로운 지혜를 통해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고 봅니다. 모두가 행복한 삶을 꿈꾸고,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 나가길 기원합니다. 위인들의 가르침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영감과 위로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2024년 12월 마지막 날에 소전(素田)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