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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안키친 Nov 22. 2021

김장의 헤게모니는 계속될 것인가?

11월 또 다시 김장시즌이 됐다. 예전에는 친정집에 온 가족이 모이면 딸 넷에 사위가 넷, 아이들까지 가세해

열 댓명은 족히 넘는 대가족의 풍경이 연출되곤 했다.


첫째가 몇 년전 외가집에 다녀와서 한 말에 배꼽을 잡은 적이 있다.

엄마, 외가집에 가면 아빠랑
이모부들 이름이 다 똑같애.
할머니가 전부
ㅇ서방~ 이래.
ㅋㅋ

명절이나 부모님 생신, 김장 같은 가족행사가 있을 때 친정엄마가 네 명의 사위를 부르는 호칭이 같다보니 아이 눈에는 신기했던 모양이다. 이제는 코로나19로 한가족만 모이는 분위기가 됐지만.


일손이 많이 필요한 김장시즌에는 딸넷 사위넷 사이에도 묘한 눈치작전이 벌어진다.


절인배추를 사다가 나르는 일이나 김치속을 버무리는 일은 힘이 많이 들어 사위들이 담당하는 경우가 많다.


올해 배추를 사오는 일은 처음에는 넷째 사위가 지목됐다. 우리집 남편이다. 하지만 남편은 새벽에 일이 끝난다는 이유로 아침일찍 김치를 사러 가는 건 불가능 하다며 양해를 구했다.

 가장 가까이 살고 가장 나이가 젊다는 이유만으로 나도 남편이 해주길 바랐지만, 나 또한 시댁 김장을 돕지 않았기에 더 이상 강요할 수는 없었다.(시어머니는 동네 김장 어벤져스 팀 멤버들이 계셔서 감사하게도 며느리는 안부르신다)


김장을 둘러싸고 친정과 시댁에 배우자가 제공하는 수고가 비슷해야 한다는 무언의 룰이 작용하는 것 같다.

‘좀 피곤해도 일년에 딱 한번인데 점수도 따고 좋을거를 기회를 놓치는군..’ 나는 혼자 투덜거리고 말았다.


수많은 맘카페에도 김장에 대한 며느리들의 호소가 자주 올라온다. 김장 시즌에 시어머니에게 오는 전화가 두렵다던지, 우리는 김치도 거의 안먹는데 왜 가서 중노동을 해야하냐 던지.


김치 없이 못사는 한국에서는
김장을 둘러싼 다양한 사연이 샘솟는다.


김장 날 당일, 오전에 배추를 사러 근처 대형마트에 갔다.

여느 때처럼 절임배추를 10박스 사 오려고 배추 매장에 다가가는데 분위기가 어째 심상치가 않다.


가만 보니 배추를 사려고 기다리는 카트 행렬이 보였다. 우리 일행은 웬일로 줄까지 섰을까 이상해서 줄의 끝을 따라가다가 깜짝 놀랐다. 적당히 틈이 난 부분이 줄의 끝이려니 하고 서니 줄서 있던 한 사람이 “저-뒤-로 가세요!”하며 날선 목소리로 말한다.

 

그렇게 끝으로 가다보니 넓은 대형매장의 정반대 구역까지 가게 됐고 끝나지 않는 절임배추 대기줄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안내방송.


오늘 준비된 절임배추 물량이
부족해 곧 품절됩니다.
배추를 못사시는 경우 내일 아침에
와 주시기 바랍니다
생배추는 많이 준비돼 있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알고보니 절임배추 값이 작년보다 폭등했는데 우리가 간 대형마트에서 시중가보다 저렴하게 한정판매를 하는 행사가 있어서 사람들이 일제히 몰린 것.


며칠 전 사전조사 차 왔을 때  배추 작황이 좋지 않다는 안내문을 봤는데 그래서인지 절임배추 가격이 폭등한 거 같다. 알고보니 이 날 배추를 사기 위해 사람들이 새벽 1시부터 줄을 섰다고 한다.


이제부터는 상황이 긴박해졌다. 김장 날을 휴일로 잡고 도와줄 식구들이 오기로 했는데, 김치속은 3일 전에 만들어 놨는데 절임배추를 못사면 큰 낭패다. 우리에게 플랜B는 없다.


이 날 준비된 배추는 모두 1,000박스였다. 인당 5박스씩만 한정판매니 배추를 살 수 있는 건 모두 200명뿐.

한 집당 두명씩만 와도 100팀이 사가면 끝이다.


실시간으로 남아있는 배추박스 수량을 어림짐작 해보니 150박스 정도였다. 마지막으로 배추를 살 수 있는 건 30명뿐..

우리 앞에 늘어선 카트수량을 세어보니 간당간당 할 것 같았다. 가슴이 떨린다. 만약 생배추를 사다가 한다 해도 오늘 밤에나 속을 넣기 시작해야 하고, 일손의 대부분은 다음날 출근 때문에 가야한다. 나머지는 남은 몇명이 독박을 써야한다.


천만다행으로 절임배추가 품절되기 직전에 사올 수 있었다. 못 살까봐 마음을 조리다가 사고 나니 환호성이 새어나왔다. 우리 뒤에 서 있던 사람들과 희비가 엇갈렸다.


명품 한정판매도 아니고 절임배추 오픈런이라니, 생각지도 않은 짜릿한 이벤트로 김장 토크가 풍성해졌다.



배추를 사러갔던 언니는 코로나 장기화로 추석이나 설 명절에도 귀성행렬이 사라졌는데 오랜만에 진풍경이었다며 감탄했다. 그러면서 앞으로 김장문화는 계속 될 것이라고.

김장인구는 줄겠지만, 먹거리의 대표아이템이기에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집에서 김장을 담글 수 있는 세대는 우리 엄마와 같은 70대~60대 어르신들이다. 이분들이 10년 뒤면 사실상 김장 세대는 끊길 것 같다.


그러다보면 주변에 김장하는 집은 현저히 줄어들 것이고지방의 종가집에서나 볼 수 있는 진풍경이 되지 않을까.


대신 소셜 미디어를 주름잡는 유튜버나 인플루언서 등 소위 말하는 장인의 가이드에 따라 집집마다 셀프로 소규모 김장을 하는 것으로 변화할 것 같다. 그게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대안일 것이다.

 

더불어 파는 김치의 퀄리티는 한층 진화할 것이고, 김장시즌이 되면 부모님이나 자식들에게 명품김치를 선물하는 문화로 변화할 것 같다.


대가족에서 핵가족으로 2인가구, 1인가구로 변화하는 시대이다 보니 옛날 스타일의 김장문화는 보편적으로 유지되기 힘들 것이다.


이미 주변에서도 소량의 절임배추와 김치속을 따로 사서 속만 넣는 식으로  간편하게 김장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김장을 담갔는데 배추가 안좋아서, 절임 소금이 안좋아서 무르고 못먹게 되는 흑역사를 경험하고 손절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오죽하면 김장이 주식투자보다 어렵다는 말도 나온다. 그러다보니 차라리 리스크 없이 질 좋은 완제품을 사먹는 걸 선택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게다가 김치를 많이 먹지 않는 집이라면 더더욱.


김장은 오랜 전통이고 문화이고 가족간의 정을 나누는 일이다.


하지만 친정에서 많은 양의 김장을 직접 해보고 나서 느낀점은 개인이 집에서 하기에는 너무 노동의 강도가 세다는 것이다. 그리고 김장을 주도하는 한 사람, 주로 어머니들에게는 너무 가혹하리만큼 힘들다.


김장날 고된 노동 후에 온가족이 둘러앉아 두런두런 이야기하며 나눠먹는 보쌈 맛은 일품이지만, 옛날 방식의 가내수공업 김장 문화를 고수하기엔 허리와 무릎과 어깨가 부서져 나갈 위험이 도사린다.


 훗날 김장담그기는 어쩌면 교과서나 동화책에서나 소개되는 ‘옛날이야기’가  수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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