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순으로 가득한 세상
모순1: 육식동물 고양이와 함께 사는 채식주의자
페스코는 가금류와 육류는 먹지 않지만 해산물은 먹는 채식 단계다. 나는 페스코-베지테리언이다. 페스코 채식을 유지한 지 6개월 무렵, 동네 삼거리에 아픈 동네고양이가 보였다. 그 고양이에 마음이 쓰이기 시작했고 동네고양이를 돌보기 시작했다. 결국 캣대디가 되었다. 캣대디가 되고서 다시 동물성 식품을 소비하기 시작했다. 내 입으로 들어가지 않았던 닭고기는 동네고양이들의 입에 넣어줬다. 참치, 고등어, 연어 통조림도 늘 구비해두었다. 난 다시 매일 동물을 죽이는 삶에 진입하게 되었다. 제동을 걸어야만 했다.
고양이 사료들은 왜 다 동물성일까? 식물성은 없을까? 이런 고민을 시작으로 공부하기 시작했다. 공부하면서 알게 되었다. 고양이는 육식동물이고 육식을 피할 수 없었다. 상황이 아이러니했다. 나는 더욱 적극적으로 육식을 피했지만 동시에 매일 참치 캔을 뜯어 고양이에게 바쳤다. 단백질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육식동물 고양이에게 채식을 요구할 순 없었다.
모순2: 채식주의자, 펫 박람회에 가다.
길고양이를 입양하면서 관련 상품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펫 박람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참석하기로 했다. 펫 박람회 소식이 반가웠다. 하지만 참석 후에는 찝찝했다. 박람회 소식이 반가웠던 이유는 반려동물 시장이 넓어졌음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박람회장 안에는 반려동물과 관련한 각종 상품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사료, 간식, 방석, 탈취제, 영양제과 같은 것들이었다.
심지어 반려동물을 위한 보험 상품을 홍보하는 부스도 있었다. 영업사원이 “우리 아이 보험 가입하셨나요?”라고 말하며 팜플렛을 들고서 우리에게 매섭게 다가왔다. 하지만 상담을 받지 않았다. 보통 펫보험은 만 7세 이하 동물등록이 된 개나 고양이가 가입대상인데 우리 헬씨는 길고양이인데다가 10세 전후였기 때문이다. 지병이 있는 사람이나 노인인 경우 보험 가입이 힘든 것과 같은 이치다. 반려인과 반려동물이 늘어남에 따라 상품도 늘어났다. 그리고 이에 따라 반려인들의 선택 폭도 넓어졌다. 반가운 일이다. 반면 반려문화에도 자본주의가 깊이 침투해 있다는 사실이 씁쓸했다.
반려동물에 대한 사회적 인식 수준이 높아진 건 사실이다. 반면 비인간 동물에 대한 사회적 시선은 여전히 야박하다. 박람회장 안 부스의 열에 아홉은 식품업체였다. 수많은 간식과 사료들이 쌓여져 있었다. 비닐과 상자로 포장되었지만 사실 그 내용물은 ‘또다른 동물들’이었다. 반려동물을 위해 가축의 도살이 필요하다. 우리 강아지와 고양이를 위해 어디선가 닭, 소, 오리, 참치, 연어, 게, 돼지들이 도살된다. 우리 동물은 먹고 그 외 동물은 먹힌다. 먹는 동물은 그나마 나은 세상을 살고 있지만 먹히는 동물은 여전히 고통의 세계에 살고 있다. 인간과 먼 동물은 파우치 안에 담기는 존재가 된고 인간과 가까운 동물은 파우치를 비우는 존재가 된다. 우리는 이것을 ‘종차별’이라 부른다.
** 사실 애초에 조금만 깊이 생각했더라면 박람회를 가지 않았어도 된다. ‘펫페어’, 이름에서부터 잘못됐다. 펫(pet)은 애완동물을 뜻한다. 반려동물(Companion animal)과는 의미가 다르다. **
모순으로 가득한 세상
주호민은 말했다. '무단횡단을 하던 길에 쓰레기를 줍고 가는 아저씨를 보았다. 사람이 이렇게 복잡하다.' 인간은 모순적이다. 전부터 느껴왔던 바다. 하지만 채식을 시작하고서 인간의 모순성을 발견하는게 일상다반사가 되었다. 페미니즘 독서모임이 끝나고 삼겹살 파티를 한다. 캣맘과 캣대디들은 활동 후 치킨을 먹는다. 펫 박람회에서 마주한 반려동물 시장도 마찬가지다.
모순적인 삶의 모습이 타인에게만 존재할까? 아니다. 바로 내 안에도 존재한다. 비건을 지향하지만 고양이와 함께 살며 참치 캔을 매일 따야 하는 내 삶에도 존재한다. 어쩌면 나를 포함한 모순적인 60억의 인간들이 모여 사는 사회가 모순적인 건 필연적인 일이다.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모순투성이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할까? 우리는 삶의 모순들을 해결하는 동시에 해결되지 않는 모순들은 그대로 껴안는 수밖에 없다. 타인의 모순을 지적하는 예민함으로 자기모순을 해결하는 데 힘쓰고 자기모순을 살며시 눈감는 너그러움으로 타인의 모순을 껴안으며 살아야겠다. 때론 날카롭게, 때론 무디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