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록달록함과 잔잔한 익숙함을 지닌 한국술
5월 달력을 넘기며 새삼 놀랐습니다. 6월을 맞이하긴 하지만, 언제 한 해의 절반이 훌쩍 지났는지 놀람과 아쉬움을 감출 수 없었어요. 딱 절반만 담긴 물컵을 보고 “물이 반이나 차있다”라고 하는 사람과 “물이 반밖에 없어?”라는 사람으로 나뉘는 것처럼, 사람들은 같은 사실을 보고도 전혀 다른 평가를 내리곤 하죠. 하지만 올해는 왠지 모두가 한마음이지 않을까 싶어요. “벌써 2020년이 절반이나 지났다고?”
상반기를 휩쓸고 간 코로나19 여파로 가장 포근한 계절을 맘 놓고 누리지도 못했고, 대부분의 행사와 약속들이 취소되었으며 학교도 이제서야 조심스럽게 교문을 열었습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작은 바이러스 하나가 우리 삶 전체를 할퀴어 아직 상처가 여물 지도 않았는데, 아직도 불안한 상처는 계속 덧나고 있습니다. 우리 다같이 그냥 2020년 5월까지 없던 것으로 치고, 새해를 시작하면 안 될까요?
2020년이 이미 절반 지났다는 우울한 현실 이야기를 먼저 꺼냈지만, 모두 조심스럽게 현실에 적응하며 일상을 살아가고 있을거에요. 주방장도 지난 회차에서 잠깐 언급했던 ‘느슨한 연결감’을 동력 삼아 하루하루를 이겨내고 있어요. 한국술을 통해 연결되고자 했던 모임, 주주총회의 시즌1 모임도 벌써 절반이 지났습니다. 그동안 전국의 한국술, 취미, 음식이라는 안건으로 조심스럽게 주방장양조장에서 모였고, 8명의 전혀 다른 사람들이 모여 술과 함께 나누는 이야기는 정말 무궁무진했습니다. 생각지도 못했던 술 조합(무려 고량주와 맥주), 낯설었던 스포츠 세계(복싱과 미식축구)와 대전에 숨겨져 있었던 히든 맛집들(신성동에 맛집이 이렇게나 많았다니...!) 등 대전 사람들이 사는 이야기가 피어올랐습니다. 주주총회는 한 멤버분이 말했던 것처럼 ‘처음 30분은 어색하지만, 이후에는 집 갈 타이밍을 놓치게 되는’ 모임이 되고 있어요.
‘적당한 낯섬과 어색함, 거기에서 피어오르는 기분 좋은 긴장들...익숙함을 포기한 대신, 새로운 눈으로 여기를 바라볼 확률이 조금 더 높아졌다.’ -오은, <다독임>, 2020-
오은 작가의 산문집 <다독임>중 “편하다의 반대말은 ‘새롭다’”라는 말이 여실히 체감되고 있습니다. 취향을 매개체로 모인 불특정 소수이기에 아직 완전히 편한 관계는 아니지만,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사람들과의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넓은 대화들을 나눌 수 있게 되었어요. 새로우니 가볍게 던질 말도 한 번쯤은 더 삼키고 묵직하게 내어지게 된달까요. 물론 한국술을 마시며 나누는 대화니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긴장은 자연스럽게 흩어지게 되고요. 익숙한 관계에서 벗어나니 한국술에 대해서도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할 수 있게 되었고요.
<월간주방장 2020> 5월 호에서는 낯선 새로움과 잔잔한 익숙함을 주제로 한 술들을 함께 나누어 보았습니다. 2회차에서는 한국술에 붉은 색채를 더한 빨간 술들을 들이켰고, 3회차에서는 음식과 페어링 하기 좋은 본연에 충실한 잔잔한 한국술들을 곁들였습니다. 그럼 이전 편에서 소개된 몇몇 한국술들의 소개는 줄이고, 새로운 술을 위주로 이야기를 잔을 채워봅니다.
다른 나라의 술과 차별되는 한국술의 매력은 알록달록한 색상 팔레트가 술에서 펼쳐진다는 점입니다. 붉은 부재료가 술과 만나면 오묘한 핑크빛이 되기도 하고, 맑고 쨍한 빨간색을 자아내기도, 주황빛을 그려내기도 합니다. 눈으로 먼저 맛을 상상하고 마시면 색채의 다채로움이 목 넘김으로도 전해지는 것 같죠. 2회차 모임 주제는 ‘내 일상을 버티게 하는 것’이었고, 각자의 다채로운 삶을 들여다 보기 위해 주방장은 알록달록한 한국술을 선택했어요.
달달한 딸기우유같은 보드라운 분홍맛을 기대했다가, 도리어 강렬한 첫 모금에 감탄하게 되는 오!미자씨 막걸리는 희양산 막걸리로 드라이한 탁주의 진가를 보여준 경북 문경 <두술도가>의 신상 막걸리입니다. 희양산 막걸리가 강렬한 일러스트와 라벨로 눈길을 사로 잡았다면, 오!미자씨 막걸리는 술 빛깔과 대비되는 파란 라벨이 관심을 끌어당깁니다. 오미자의 쨍하고 투명한 분홍색 술이 호리한 물방울 모양 병에 담겨 있어 이 막걸리는 앙증맞아 보이기까지 합니다. 색도 고운데 귀엽기까지 하고 술 이름까지 재치있는 오!미자씨의 투명/불투명의 분홍 경계를 허물고 섞어서 한 잔 들이켰습니다.
오미자라는 열매에서는 보통 다섯가지 맛이 느껴진다고 하는데, 강한 매운맛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네 가지 맛(단맛, 신맛, 쓴맛, 짠맛)이 점층적으로 느껴져서 입안에 오미자 카펫을 펼치는 듯 합니다. 처음엔 오미자 열매 특유의 연하지만 약간은 떫은 향이 느껴지고, 산미가 톡 치고 올라오며 혀 끝에서는 쌉싸름함이 감돕니다. 마지막으로는 입안에 단맛과 짭짜름한 여운이 남는 이 술은 한마디로 재밌어요! 가벼운 질감의 탁주이다보니 맛과 향을 부담스럽지 않은 목넘김으로 느낄 수 있는 편입니다. 처음엔 약간의 탄산감은 있었지만 가벼워서 그런지 7.8도의 도수가 부담스럽지 않았고, 오히려 시간이 지나니 술 질감이 보드랍게 느껴졌습니다. 눈으로 마셨을 때보다 실제로 진짜 맛보니 오! 매력을 느낄 수 있었던 두술도가의 오!미자씨 막걸리였습니다.
또 다른 오미자 술입니다. 이 한국술의 특징은 양조장 이름과 도수가 주명이라는 점! 경기도 용인 술샘 양조장에서 만든 16도의 오미자 ‘리큐르’ 술샘16을 소개합니다. 약주나 증류주와는 다른 리큐르인 이유는 오미자를 침출시키는 방식으로 투명하고 붉은 술이기 때문인데요. 크게 한국술을 탁주/약주/증류주/과실주 로 나눌 때 하나 더 추가되는 유형이 “리큐르(liquor)” 입니다. 한국에서 출시되는 리큐르는 보통 도수가 약 20도 언저리이며 오미자, 생강, 계피, 꿀, 대나무, 약초 등 향이나 색이 진한 부재료를 사용해 술에 향취를 더합니다. 술샘16은 로제와인보다 진한 붉고 투명한 빛을 띄며, 맛은 오미자청 칵테일을 마시는 것처럼 오미자 풍미가 입안에 짙게 펼쳐집니다. 알콜 부즈는 16도임에도 불구하고 달달함과 오미자 특유의 향으로 감추어지며, 한 잔 두 잔 홀짝홀짝 마시다가 취기가 훅 오를 수도 있기에 얕보면 안되는 술이기도 합니다. 술샘16의 다른 버전, 술샘19는 생강과 강황을 사용해 오미자와는 또 다른 날카로움을 술 안에 담아냈습니다. 달달한 술을 좋아하시지 않는 분들에게는 술샘19를 추천드립니다.
니모메는 제주 방언으로 ‘너의 마음에’라는 다정한 뜻을 지닌 제주 감귤 껍질이 들어간 상큼한 약주입니다. 귤색 병뚜껑에 ‘너의 마음에’라는 문구를 볼 때마다 이 술병을 열어서 마시면 내 마음에도 잘 닿겠다는 귀여운 생각을 하게 돼요. 병을 따면 상큼한 시트러스향이 코끝을 두드리고, 귤 빛깔의 술을 한 모금 마시면 묘하게 귤-쌀-귤-쌀로 변화하는 맛의 재미 역시 발견하게 됩니다. 쌀술같기도 하고, 귤술같기도 해서 오묘한 매력을 지닌 약주, 니모메는 한 번에 접하기 어려웠던 고소함과 시트러스의 상큼함이 조화를 이루고 있어요. 오메기술, 고소리술로도 유명한 제주 애월의 <제주샘주>양조장에서 생산되는 니모메는 특히 지금같이 날씨 좋은 날, 피크닉 술로도 제격입니다. 11도의 부담스럽지 않은 도수와 깔끔함, 그리고 앙증맞은 보틀 디자인까지. 겨울철엔 손끝이 노래지도록 자주 까먹었던 귤이지만 이 귤을 술을 만들 생각을 했다니 제주샘주에 감사한 마음을 보내봅니다.
+오놀로그 레드, 7004s
한국 와인도 빠지면 섭섭하기에 레드 와인과 참다래 와인도 함께 했습니다. 오놀로그 레드와 참다래와인 7004s에 대한 설명은 지난 <월간주방장 3월호> 를 참고해주세요.
3회차 주주총회의 안건은 '음식'이었습니다. 술과 함께 곁들이기 좋은 안주와 여러 식문화에 대해 이야기 나누는 시간이었는데, 소소한 재미를 위해 주주 멤버들께 한국술 포트럭 파티를 부탁했어요. 각자가 생각하는 최애 안주를 하나씩 가져오기로 한거죠. 서로 어떤 음식을 가져오는지는 비밀에 부친 채! 주방장은 개인적으로 슴슴하면서 짭쪼롬한 나쵸칩과 살사를 좋아해서 비밀리에 준비를 했는데, 놀랍게도 멤버들이 가져온 안주들이 단 하나도 겹치지 않았어요. 한국술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뜨끈뜨끈한 파전과 매콤한 야채곱창, 엽기적으로 매운 떡볶이, 빠질 수 없는 필수 메뉴 치킨, 과일 안주와 모두가 반한 김부각까지. 공통점은 없었지만 그래서 더 다양하게 즐겼던 정말 포트럭 파티 다운 한국술 파티였어요. 주방장은 이날은 다른 부재료가 들어가지 않고 쌀 본연에 충실한 담백하고 잔잔한 술 라인업을 준비했습니다. 그럼 음식과 함께 했을 때 튀지 않고 자연스럽게 어울어졌던 한국술을 소개합니다.
술샘 양조장의 대표 쌀 증류주인 미르40을 이용해 식전 칵테일로 준비했습니다. 진이 베이스로 쓰이는 미르 Salty Dog과 미르-Fizz 두 버전을 만들었는데 진(Gin)이 아닌 미르를 베이스로 사용하니 쌀의 구수함이 칵테일 기반에 깔려있어 또 다른 재미가 있더라고요. 자몽쥬스와 쌀소주의 만남이 처음엔 낯설게 느껴져도 고소함과 짭쪼롬함의 조합이 입맛을 돋우기 딱 좋았습니다. 미르40은 국산 밀누룩과 쌀을 이용해 먼저 발효하고, 상압식 방식으로 증류해서 깊고 진한 쌀 향내가 돋보이는 전통 소주입니다. 이번처럼 칵테일 베이스로 사용해도 미르는 증류주의 존재감을 확실히 드러내서 좋지만, 개인적으로 실온 상태에서 스트레이트로 탁- 털어 마신 후 용처럼 목안에서 피어오르는 후취를 느껴보는 것을 최고로 꼽습니다.
막걸리에 안좋은 기억을 가진 분들도 이 술을 추천해드리면 대부분이 좋아하십니다. 그래서 탁주의 기본중에 기본인 우렁이쌀 DRY를 이번 라인업에서 빠트릴 수 없었어요. 논산 양촌양조의 트레이드마크 우렁이 농법으로 지은 햅쌀로 빚은 이 탁주는 일반 버전보다 단 맛이 덜한 드라이 버전입니다. 심플한 검은 라벨로 깔끔함을 나타내는 이 막걸리는 쌀맛의 고소함과 살짝 스쳐가는 단맛, 그리고 꿀떡꿀떡 편하게 물처럼 마실 수 있는 가벼운 질감이 일품입니다. 만약 대학시절 농활을 갔을 때 뙤약밭에서 농사일을 하고 시~원하게 들이킬 막걸리를 하나 꼽을 수 있다면, 저는 바로 우렁이쌀 드라이를 선택할겁니다. 너무 달지도, 그렇다고 너무 가벼워서 쌀과 물이 따로 노는 것이 아니기에 시원한 드라이탁주 기본이라 할 수 있는 우렁이쌀 DRY입니다.
귀한 것일수록 오래 묵혀두고 중한날 스리슬쩍 꺼내는 맛이 있죠? 주방장에겐 막걸리가 특히 그렇습니다. 저온 숙성시킨 탁주는 시간이 술맛에 마법을 부리기라도 한듯이 변화를 느끼는 재미가 있습니다. 주방장은 도깨비술9도를 두 달정도 숙성시켰다가 오늘같은 날을 위해 꺼냈습니다. 처음 마셨을 때는 탄산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는데 두 달만에 병뚜껑을 여니 치익-하고 약간의 탄산이 존재감을 드러냅니다. 맛에서도 산미가 살아났고 중간이 탄탄해진 바디감이 확연히 느껴졌습니다. 가벼운 우렁이 다음에 마셔서 그런지 입촉감과 단맛, 알코올 느낌이 깊은 탁주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고요. 단양에 위치한 도깨비양조장에서 만드는 도깨비술 6도, 9도, 11도 세 버전으로 나오며 정말 어디 하나 모난데 없이 둥글둥글하고 편한 막걸리입니다.
까마귀(鴉)가 노랗게(黃) 보일 정도로 노란 약주인 아황주는 고려시대 왕실에서 사시사철마다 빚고 마셔서 고려 왕실의 명주로 알려져 있습니다. 무려 18도의 도수를 자랑하는 진한 황색의 이 술은 '찐한 소곡주'같다는 멤버분의 시음평처럼 달고 쌉싸름하지만, 약간의 산미가 끝에 이어집니다. 마시면 마실수록 입안에 아황주의 향이 쌓이게 되는데 마치 아카시아 꽃향처럼 은은하게 맴돌아 향긋한 여운이 있는 약주입니다. 파주 최행숙도가에서 빚어지는 아황주는 찹쌀, 멥쌀, 누룩이 합쳐져 황금빛 맛과 향을 만들어냈기에 약주의 진가를 알고 싶다면 아황주, 추천드립니다.
다섯번은 병뚜껑을 열었다 닿았다 반복해야만 맛볼 수 있는 탁주가 있습니다. 탄산감이 팡팡 터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이화백주는 굳이 위아래로 흔들거나 섞지 않아도 병 안의 탄산으로 자연스럽게 블렌딩 됩니다. 경남 양산에서 빚어지는 6도의 용량까지 넉넉한 이 막걸리는 마치 맥주처럼 꿀꺽꿀꺽 시원하게 들이키기 좋습니다. 처음 뚜껑을 돌리면 치----익! 하며 청량감 가득한 탄산으로 시작을 알리는 이화백주는 열자마자 탄산을 그대로 느낄 수 있께 시원하게 마시는게 제일 맛있고, 당도가 있는 편이라 샴페인처럼 식전주로 마시거나 단독으로 즐기기 좋습니다. 최근 샴페인 막걸리라고 불리는 '막페인'류의 탁주들이 종종 출시되고 있는데 점점 부재료 뿐만 아니라 입촉감에도 다양함이 생기고 있는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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