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기억하고 있어요 시월에 마셨던 술을
잊혀진 계절을 들으며 시월의 마지막 날 월간 주방장을 쓰는 지금. 이 노래가 제일 유효한 오늘을 넘기지 않으려고 시월 동안 마셨던 술들을 열심히 곱씹어봅니다. 10월의 마지막 날을 할로윈으로 기념하는지, 이용의 잊혀진 계절로 마무리하는지에 따라서 세대가 나뉜다고 하는데 여러분은 어떤 위치에서 쌀쌀한 이 가을의 마지막을 마무리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마스크 때문에 차가운 공기를 한껏 들이마시고 내쉬면서 가장 좋아하는 계절을 완연히 느끼진 못하고 있지만 이런 가을 역시도 언젠가 기억하게 되는 시간이 오겠죠? 이용의 노래 때문인지 약간은 감성적으로 시작하는 월간 주방장 10월호, 이번 달에도 역시 주방장이 마셔본 새로운 술들을 소개합니다. 유자, 주니퍼베리, 건포도, 매실 등 재밌는 조합을 만들어낸 한국술들과 오롯이 기본에 충실한 한국술들을 마셔보고 소감을 전합니다.
지리 시간에 한 번쯤은 들어봤었던 '다랭이'는 위 사진처럼 바다를 마주하고 물결무늬를 그리며 만들어진 논을 칭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바다를 눈 앞에 두고 자연을 마주한 곳에서도 술이 빚어집니다. 경남 남해군 다랭이팜 양조장에서 만든 유자막걸리를 전통주 오프라인 마켓에서 발견하고 바로 데려왔는데요. 지난번 다랭이팜 막걸리가 쌉싸름함이 매력이었다면 유자는 어떤 맛일지 기대감을 가지고 마셔봤습니다. 6도여서 도수가 전혀 느껴지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은근한 알콜취가 느껴졌고 유자와 쌀의 오묘한 조합이 입안에 맴돌아서 흥미로웠어요. 유자는 보통 단맛과 함께 했을 때 상큼함과 특유의 향이 더 잘 살아나는 편인데, 이 막걸리에서는 쓴맛이 강해서 상대적으로 유자의 매력이 덜 돋보였던 게 아쉬웠습니다. 유자 원액이 들어갔다고 하는데 유자 풍미가 쌀막걸리의 드라이함 속에서 춤췄으면 좋았겠다 생각이 듭니다. 주방장은 보통 드라이한 막걸리를 좋아하는 편이라서 분명 쓴맛과 드라이함은 다르다고 생각하는데 이번 술도 지난번 다랭이팜 쌀막걸리처럼 깔끔하게 드라이하진 않았습니다. 지난번엔 온라인 마켓에서, 이번에는 오프라인 마켓에서 구매했는데 다음에는 꼭 남해 다랭이팜 양조장을 찾아서 현장에서 갓 나온 술을 다시 마셔보고 싶어요. 예상하건대 중간 유통 과정에서 쓴맛이 강해지면서 본래의 맛에서 멀어졌을 것 같거든요.
지난달부터 SNS에서 자주 눈에 띄던 C막걸리! 정말 궁금했었는데 오프라인 매장에서 발견하고는 유자막걸리와 함께 바로 구입했습니다. 씨막걸리의 특징이라고 하면 브라운, 옐로우, 그린 등 색상별로 다양한 부재료를 사용해 종류가 다양한 점인데 아쉽게도 이번에는 '시그니처 큐베'만 있어서 먼저 마셔봤습니다. 그래도 다른 술들과 달리 '시그니처'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어서 양조장의 가장 대표작일 것 같아 기대가 높았습니다. 따를 때부터 보이던 적당히 꾸덕한 질감을 보며 이 술은 술꾼의 술이라는 예감이 들었고, 예상대로 맛있는 술이었습니다. 여느 12도 탁주보다 날카로운 알코올이 느껴졌지만 산미와 부드러운 술 질감으로 잘 어우러져 높은 도수의 와인 같았던 탁주입니다. 주니퍼베리와 건포도가 함유되어 있어서 베리류와 쌀의 재밌는 궁합을 엿볼 수 있었고,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산미가 톡톡히 느껴져서 더 좋았습니다. 익숙한 부재료뿐만 아니라 생소한 재료와의 조우가 씨막걸리의 특징인데 시그니처 큐베 역시 그런 재미를 가졌고, 밸런스가 잘 갖춰진 탁주라고 생각합니다. 중간부터는 높은 도수가 부담스러워서 살짝 가수 해서 마셨더니 훨씬 부드럽게 쭉쭉 들어갔습니다. 자기 전에 나이트캡으로 한 잔씩 마시기 좋을 것 같은 씨막걸리 시그니처 큐베였습니다.
유자와 주니퍼베리+건포도에 이어 매실이 함유된 술을 소개합니다. 이름에서부터 바로 알 수 있듯이 매실 원액이 들어간 리큐르입니다. 리큐르는 약주와는 또 다르게 증류주에 부재료를 침출 시키거나 원액을 넣어서 향과 색상으로 가볍게 마실 수 있는 술인데 매실원주가 그렇습니다. 이 술을 한 마디로 정리한다면 더 매실매실한 매화수라고 할 수 있겠어요. 새콤한 청매실보다 달콤한 국내산 황매실의 함유량이 높아서 매실의 풍미가 단맛과 함께 완벽한 하모니를 이룹니다. 또 꿀도 첨가되어서 다른 술보다 약간 더 쫀쫀한 질감으로 부드럽게 목을 타고 내려갑니다. 서울의 밤으로 유명한 서울 더한주류 양조장에서 빚어지는 13도인 매실원주는 병 모양도 앙증맞고 라벨 디자인도 귀여워서 선물하기에도 좋습니다. 익숙한데 새로운 술을 찾고 있다면 더 진한 매실 리큐르, 매실원주를 추천드릴게요.
우렁이쌀 드라이를 지난 5월호에서 마셔봤다면 이번 호에서는 드라이가 아닌, 일반 버전을 소개합니다. 특이한 점이라면 우렁이쌀을 일부러 두 달 정도 숙성해서 마셨다는 점입니다. 갓 빚어서 나온 우렁이쌀을 처음 마셨을 때는 약간의 쌀 풋내 같은 묘한 향이 있어서 일부러 보관을 좀 더 해보고 마셔보기로 했습니다. 맛이 어떻게 깊어졌을지 정말 궁금했었는데 한 모금 마셔보니, 역시 현명한 선택이었다 싶었어요! 거슬리던 풋내는 사라지고 고소하고 감칠맛 나는 치즈 요거트 음료 같아졌습니다. 살짝 톡톡 치고 올라오는 탄산감 역시 더해져서 아예 새로운 탁주가 된 것 같았고요. 충남 논산의 양촌양조장에서 만들어지는 7.5도의 우렁이쌀은 일반과 드라이 두 버전으로 나오는데 검정 라벨의 드라이는 군더더기 없어 깔끔해서 빨리 마시는 게 좋다면, 일반 하얀 라벨의 우렁이쌀은 개인 기호에 따라서 숙성해서 마셔본다면 또 다른 재미를 맛볼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기본 쌀 약주 중에 제일 아끼는 술, 미인약주를 소개합니다. 파주 최행숙 전통주가에서 빚어지는 15도인 쌀 약주인 이 술은 다른 약주들보다 감칠맛 나는 드라이한 매력을 갖췄습니다. 찹쌀로 술을 빚었음에도 고소하면서 쌉싸름하게 느껴지는 술맛이 일품이고 약간의 산미 역시 있어서 질리지 않아요. 같은 양조장에서 나오는 약주인 아황주보다는 부드럽고, 미인탁주와 결은 비슷하지만 약주에서만 느낄 수 있는 맛의 조화로움이 제가 이 술을 아낄 수밖에 없게 만드는 것 같아요. 디자인도 고급스럽고 가격대도 있어서 좋은 날 선물하거나 중요한 자리에서도 한 잔씩 나누기 좋은 미인약주, 약주를 좋아하시는 분들께 자신 있게 추천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