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내기 싫은 '이 겨울'이 있었어

박선희+1

by 박선희

새벽 여섯 시에 일어나 일기를 열심히 쓰던 나는 어느 날 내가 이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것을 깨달았다. 그 깨달음은 너무 생생하고 짜릿해서 잠도 앗아갈 정도였다. 이것은 그날 새벽에 일어나 한 번도 쉬지 않고 써 내려간 일기다.


*어찌된 영문인지 할머니처럼 새벽 세 시에 잠이 깨버렸다. 한 시간을 뒤척이다가 포기하고 일어났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말을 굉장히 잘 듣는 아이였다. 지금까지 엄마, 아빠한테 대든 적 한 번 없었고 심지어 학교 다닐 땐 선생님들 마음이 그렇게 이해갈 수 없었다. 물론 내가 모범생이었다는 소리는 아니다. 야자는 수없이 땡땡이쳤고 선생님한테 거짓말하고 놀러도 많이 다녔다. 비 오는 날 오토바이 뒤에 타고 신난다고 깔깔거리기도 했다. 그런데 이런 것이다. 나에겐 질문이 없었다.


예를 들면 ‘비인간적이고 비효율적인 야자를 내가, 이 시간에, 그것도 강압적으로 왜 하고 있어야 하지?’와 같은 질문이 나에겐 결여되어 있었다. 심지어 나는 야자가 강압적이라는 생각도 안 했다. 내가 가졌던 질문은 이런 것이다. 날씨가 이렇게 좋은데 야자를 하면 안 되는 것 아닐까, 떡볶이가 이렇게 먹고 싶은데 먹어야 하는 것 아닐까, 기분이 이렇게 우울한데 학교를 뛰쳐나가야 하는 것 아닐까. 딱 이 정도 수준의 질문들을 그러니까 나는 지금까지 꾸준히 아주 성실하게 해왔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당연히 대학엘 갔고, 심지어 재수까지 해서 대학엘 갔다. 대학을 졸업하고는 취직을 했고 다시 대학원엘 갔고 다시 취직을 했고 오랜 연인과 자연스레 결혼을 했다. 모든 것들은 자연스러웠고 나는 그저 남들처럼 당연히, 마치 코스를 밟듯 살아왔다. 중요한 질문들은 남들이 이미 대신해 준 것 같았다.


내가 왜 대학엘 가야 하는지 내가 왜 결혼을 해야 하는지 내가 왜 직장엘 다녀야 하는지 정작 나는 고민해본 적이 없었다. 그래도 잘 살아왔다. 그런데 이 겨울, 수없이 많은 질문들이 나에게 쏟아졌다. 어쩌면 살면서 내가 해왔어야 하는 그런 질문들이 한꺼번에 마치 빚쟁이들처럼 들이닥친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해야 하는 것과 하고 싶은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에서 시작된 나의 질문과 생각은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리고 그것들은 내 안의 모든 것들을 한 걸음씩 움직이게 했고 지금쯤 되자 나는 박선희에서 박선희+1이 되어버렸다. 그러니까 나라는 사람의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지금껏 무엇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별로 하지 않고 살아왔다. 어떤 무엇이 되어야 행복해지는 게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이제 나는 무엇이 되고 싶어졌다. 이 마음이 나를 지금까지보다 행복하게 해 줄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행복이 단 하나의 얼굴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행복에도 여러 가지 얼굴이 있다, 그런 것을 알게 되었다. 여전히 수없이 많은 결정적인 순간들이 내 인생에 남겨져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 순간이 결정적인 순간이 되느냐 아니냐는 내가 결정하는 것이다. 이 겨울에 나는 이렇게 많은 생각을 했다. 앞으로 A4 세 장 분량은 더 쓸 수 있다. 그러니까 보일러를 틀지 않고 베란다 문을 활짝 열어놓아도 춥지 않은 바야흐로 봄이 시작되었지만 나는 여전히 '이 겨울'이라고 말한다.*

서른넷의 2월에 나는 이런 일기를 썼다. 서른넷이나 되고서야 나는 내게 질문이 없었다는 걸 깨달았고 내가 아무것도 몰랐다는 것도 알았다. 그래서 그걸 깨달아서 뭔가 달라졌냐고? 그렇다. 달라졌다. 나는 적어도 남이 그렇다고 하는 걸 당연하게 받아들이지는 말자고 결심했다. 아주 작은 것이라도 내 머리로 마음으로 생각하려고 했다. 내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되었고 내 기준을 조금씩 만들어갔다. 그건 아주 근사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때 내가 되고 싶었던 무언가에 이제야 겨우 한 발 다가선 것 같다. 이것도 근사하네.

저 일기를 쓰던 그해 나는 그 겨울이 가는 게 싫었다. 그래서 '지난 겨울'이 아닌 '이 겨울'이라고, 보내기 싫은 마음을 담아 말했었다. 그만큼 그 겨울은 내게 특별했다.


지금의 나는 '이 겨울'이 가는 게 싫지 않다. 아쉽지 않다. 기대가 된다. 나는 어느 한 시절에 머물지 않는다. 계속해서, 계속해서 나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맙소사, '이 겨울'도 보통이 아니네ㅋ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