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선희 Jan 28. 2024

경이의 마음으로

메리 올리버 <겨울의 순간들>

나는 충심으로 내가 사는 대로 산다. 나는 사실적이고 유용한 것보다는, 기발하고 구체적이고 함축적인 걸 좋아한다. 나는 걷는다. 그리고 주의 깊게 살핀다. 나는 정신적이기 위해 감각적이다. 나는 아무것도 방해하지 않고 모든 걸 들여다본다. 그리고 집에 돌아오면 M이 묻는다. 어땠어? M은 늘 그렇게 묻는다. 내 대답은 항상 똑같고 자연스럽다. 놀라웠어.     

메리 올리버, <겨울의 순간들>


생각에도 길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말하자면 패턴 같은 것. 사고라든가 어떤 것에 반응하는 과정에도 사람마다 패턴이 있다. 가느다란 초승달이 뜰 때마다 내 마음은 들뜨지, 여름 저녁에 바아아람, 하고 불어오는 바람과 마시는 맥주는 최고다. 겨울 퇴근길 건물 밖으로 첫발을 내디딘 순간 들이마시는 차가운 첫 숨은 무뎌졌던 감각을 단번에 깨운다. 나를 자극하는 것들이 꼭 너를 자극하는 것은 아닌데, 메리 올리버를 자극하는 많은 것들이 나를 자극한다. 말하자면 비슷한 자극에 반응하는 것, 비슷한 패턴. 걷고, 살핀다. 구체적이고 함축적인 걸 좋아한다. 충심으로 내가 사는 대로 살지. 그리고 어땠어? 하고 물으면 놀라웠어, 라는 대답이 튀어나오게 하는 세계의 놀라움들.  

아름답고 놀라운 것은 곳곳에 있다. 며칠 전엔 하천의 돌다리를 건너는데 돌다리 옆에 고드름이 열려 있어 깜짝 놀랐다. 이게 뭐야. 나는 돌다리 가운데에 쪼그리고 앉아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돌다리 사이사이 지나는 물살이 돌다리에 부딪히고 흐르고 부딪히고 흐르다 얼어붙어 고드름이 되지 않았겠어? 놀라워라. 놀라웠다.

그보다 더 전엔 하천가에 화환에 쓰는 꽃 한 송이가 널브러져 있었다. 저 꽃 한 송이가 어디서 왔을까, 누가 데려다 여기에 버려둔 걸까? 나는 생각만 하고 지나갔는데 며칠 뒤 같은 곳을 지나는데 그 꽃이 버드나무 가지 사이에 끼워져 있었다. 올려두었다는 표현이 더 맞을지도. 바닥에 뒹굴고 있을 때보다 훨씬 좋아 보였다. 내가 해 줄 걸 하는 생각 하나, 저렇게 올려둔 건 누굴까 궁금한 마음 하나. 바닥에 떨어진 꽃을 보다가 다가가 꽃을 집어서 나무 위에 올려 둔 그 마음이 좋았다.     

아름답고 놀라운 일은 곳곳에 있다.
몇 해 전 이른 아침에 산책을 마치고 숲에서 벗어나 환하게 쏟아지는 포근한 햇살 속으로 들어선 아주 평범한 순간, 나는 돌연 발작적인 행복감에 사로잡혔다. 그건 행복의 바다에 익사하는 것이라기보단 그 위를 둥둥 떠다니는 것에 가까웠다. 나는 행복을 잡으려고 애쓰지 않았는데 행복이 거저 주어졌다. 시간이 사라진 듯했다. 긴급함도 사라졌다. 나 자신과 다른 모든 것들 간의 중요한 차이도 다 사라졌다.    

메리 올리버, <완벽한 날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평범한 순간, 불현듯 찾아오는 경이로움에 대해서는 나도 할 말이 있다. 그건 아주 사소한 것에서 비롯된다. 바람의 방향, 어스름의 정도, 나뭇잎의 채도, 우연히 발견한 꽃나무, 매일의 달 같은 것에서. 특히 정면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경이로움 그 자체. 앞에서 바람이 불어오면 반가워서 걸음을 멈추고 숨을 크게 들이마신다. 온몸으로 바람이 번져가면 속속들이 깨어난다. 몸도 마음도 기분도 기억도 다 깨어난다. 무엇보다 살아있다는 감각이 생생해져서 혼자서도 길 위에서도 누가 보든 말든 감탄하고 웃는다. 그 순간의 만족, 바람의 파동이 일으키는 전율.

매일 새로운 그날의 달

생각해 보면 내 인생엔 대단한 순간이랄 게 없었다. 엄청난 성공이나 대단한 과업, 뭐 그런 게 있나. 고입, 대입 시험 합격이 그나마 떠오르는 성공의 순간이랄까. 남보다 특별히 뛰어난 적도, 크게 주목받은 적도 없다. 그러나 한 가지, 나는 나만의 기준은 갖고 있다. 남들의 기준에 흔들리지 않는 나만의 기준.     

내게 실은 대단한 건 봄이 오는 것이다. 겨울 내내 나무가 얼지 않는 것, 싹을 틔우는 것, 바람이 구름을 밀고, 그토록 먼 태양이 내게 도달하는 것, 울어도 다시 웃는 것, 다시 울 것을 알면서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 지쳤던 마음을 일으키는 것, 무거운 몸을 일으켜 창문을 활짝 여는 것, 소중한 사람의 마음을 부지런히 들여다보는 것, 서로 미소를 주고받는 것, 마음이 마르지 않게 지켜 주는 것, 오늘 하루를 살아내는 것.

나는 나만의 기준으로 살아간다. 이 모든 일들이 대단해서 햇빛이 내 오른뺨에 내릴 때 감탄한다. 누군가의 미소를 곱씹으며 웃는다. 구름이 흘러가는 모습을 오래 지켜본다. 괜찮아? 누군가 내게 물으면 그 물음 덕분에 괜찮아진다. 당연한 건 아무것도 없다. 놀랍고 고맙고 반가워. 당연한 건 아무것도 없어서 경이의 마음으로 걷는다. 경이의 마음으로 살아간다. 어땠어? 하고 물으면 놀라웠어,라고 대답하는 경이의 마음으로.      

일찍 물든 나뭇잎, 놀라웠어.
이전 03화 그날의 첫 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