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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선희 Jan 21. 2024

그날의 첫 술

그날의 첫 술은 무조건 맛있다. 그날의 첫 술이 담긴 잔에 입술을 대고 한 모금 꿀꺽 들이켜는 상상만 해도 하루를 버틸 수 있다. 와, 지금 떠올려도 설레.  

첫 잔은 웬만하면 맥주다. 와인을 마시든, 소주를 마시든 첫 잔은 맥주가 좋다. 그 첫 모금의 맥주가 주는 짜릿한 만족은 웬만한 것들과 겨뤄도 다 이긴다. 빈속에 알코올이 퍼지는 그 느낌, 손가락 끝 혈관까지, 알코올이 기세 좋게 온몸에 퍼지는 그 느낌이 너무 좋다. 퇴근 후에 종종 혼자 한잔하는데 잔의 반 정도를 꿀꺽꿀꺽 첫 모금에 마셔버린다. 첫 모금의 충만을 만끽하고 나면 나머지는 느긋하게 홀짝거린다. 첫 모금의 알코올이 퍼지는 동안 턱을 괴고 음악을 들으면 남부러울 게 하나 없다.   

그날의 첫 술의 한 모금을 마시고 나면 느슨해진다, 남부러울 게 없다.

그러나 가장 좋아하는 건 단둘이 마시는 술이다. 술을 마시며 맞은편에 앉은 사람의 세계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는 기분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알고 싶은 누군가, 마음에 둔 누군가와 술잔을 기울이며 이해하고 이해받는 그 순간이 어떤 놀이를 할 때보다 즐겁다. 두 개의 세계는 좋아하는 계절이나 책, 버릇처럼 사소한 어딘가에서는 분명 만나는데 전혀 다른 둘이 이어져 우리가 되어 가는 기분이 말할 수 없이 좋다.   

누군가와 깊이 대화를 나누는 것은 책을 읽는 일과 비슷하다. 내가 살아보지 못한 삶 속에 빠져버리는 놀라운 경험이니까.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으며 내가 보지 못했던 그 사람의 지나간 시간을 상상하다 보면 꼭 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어떤 장면은 귀여워 웃음이 나고 어떤 장면은 안타까워 심장이 조인다. 우리는 함께 술잔을 기울이며 웃고 웃는다. 울다가도 웃는다. 지나간 일이라 웃고, 채 지나가지 않은 일이라도 함께 이야기할 수 있어서 웃는다. 가끔 침묵을 나누다 잔을 부딪치면 술은 우리 둘을 감싸 안아 준다. 놀랍도록 아름다운 순간이 지나간다.

단둘과 다르게 여럿이 왁자하게 술을 마시는 것도 좋다. 같이 힘껏 잔을 부딪치고 웃고, 서로 빈 잔을 확인하고 웃고, 여기 맥주 세 잔 더 주세요, 같은 말을 목청 높여 외치는 순간이 좋다. “사실 얼마 전에 말이야.”라며 혼자 감당해야 했던 어려운 일을 털어놓으면 아무리 시끄러운 곳에서도 몸을 앞으로 숙여 서로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응, 그랬구나. 힘들었구나.” 다만 그 말을 나눌 뿐인데 “야, 지나갔어! 마셔, 마셔!” 할 뿐인데 그런 순간들이 있어서 매번 고개를 넘는다.

나와 술잔을 기울여 준 친구들이 있어서 지금의 내가 있다. 그중에는 이제 더 이상 만날 수 없는 사람도 있고, 만날 수 있어도 만나지 않는 사람도 있다.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의 길은 갈라지고 엇갈리며 변해왔으니까.

그런 흐름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해도 어떤 술자리는 여전히 몹시 그립다. 술집 창으로 내다보던 달, 쓸쓸한 옆모습, 눈을 마주치면 슬며시 웃던 일, 비틀대며 집으로 돌아가던 길까지 전부. 울렁대는 속을 달래려 버스 창문을 활짝 열고 바람에 얼굴을 맡기던 순간 바람에 섞여 오던 봄의 여름의 가을의 겨울의 냄새, 술잔을 기울이던 시간을 곱씹으며 혼자 웃던 밤.

잊지 말아야지 해도 어느 순간엔 잊히겠지만, 그래도 잊지 말아야지. 그리고 잊지 말아야지 하고 되뇔 순간을 다시 만들어 나가야지. 그러니 오늘도 한 잔. 그날의 첫 술은 무조건 맛있으니까 오늘도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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