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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선희 Feb 04. 2024

마지막까지 내가 꼭 쥐고 갈 말

엘리베이터에 자리가 없어서 타지 못하는 꿈을 꾸었다. 그 엘리베이터는 천장이 없는 그야말로 꿈에나 나올법한 엘리베이터였는데 들어가는 문도 너무 좁아서 자리가 있어도 결국 타지 못했을 것 같다. 집으로 가는 방법은 그 엘리베이터뿐이라 나는 집에 가지 못하고 엘리베이터 앞에서 서성이다 밖으로 나왔다. 어쩌지 어쩌지 초조해하다가 내가 어디로 갔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눈뜨고 보니 등이 서늘했다.     

사흘 전 꿈엔 남편이 나왔다. 남편이 나오는 꿈은 항상 지나치게 생생하다. 어김없이 남편은 나의 어깨나 손을 잡는데 그 느낌이 너무 진짜 같아서 꿈속에서도 흠칫 놀란다. 남편은 무엇 때문인지 화가 나 있었고 꿈 내내 나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눈 뜨고도 그랬다.     

요즘 꿈들이 이 모양이라 마음을 돌아봤다. 글은 메모만 몇 개 끄적였을 뿐 제대로 시작도 못했다. 나는 잊히지 않고 깊이 남은 말들에 대해 쓰고 싶었다. 내 옆에 있어 준 사람들에게 들은 잊을 수 없는 말, 잊을 수 없어서 깊이깊이 새겨진 말, 도저히 내게 한 말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웠던 말에 대해서. 며칠 동안 첫 문장만 썼다 지웠다 반복했다. 오늘 새로 시작하는 첫 문장은 이렇다.               

떨어져도 아름다운 꽃처럼 세월이 지나도 두고두고 아름다운 말

연애를 시작하고 일 년쯤 되었을 때인가 남편이 버스를 타고 나를 집에 데려다주었다. 우리는 버스 맨 뒷자리에 앉았다. 늦은 밤이었는데 버스 창문으로 기분 좋은 바람이 불어 왔다. 분명 겨울은 아니었어. 우리는 늘 할 말이 많았고 그날은 취기에 더욱 거리낌 없이 떠들었다. 마주 보고 웃으며 떠들다가 어깨에 기댄 채 이야기를 나누는데 갑자기 남편이 오래도록 잊히지 않을 말을 건넸다. 내가 가진 것 중에 가장 자랑스러운 것이 너야. 남편은 뭉클한 목소리로 내가 가장 자랑스러운 것이라고 했다. 말이라는 게 죽을 때까지도 기억될 수 있는 것이라면 아마 이 말은 그중 하나가 될 것이다. 나는 그 말이 무척 기뻤다. 갑자기 내 속에서 환한 꽃들이 앞다투어 활짝 피어났다. 그 말로 인해 나도 내가 자랑스러워졌다. 사랑스러워졌고 어깨가 펴졌다. 오래도록 그 말은 나의 자랑이었다. 나중에 그 말의 의미가 남편에게는 퇴색되었을지 몰라도 내게는 지금까지 힘을 갖고 있다. 말은 귀한 것. 내내 기억에 남는다.

너는 끝까지 보여 줘도 절대 실망스러운 사람이 아니야. 어느 날 친구는 내게 그런 말을 해 주었다. 스스로가 싫어서, 실망스러워서, 창피하고 쪽팔려서 자책하고 있을 때 친구가 그 말을 해 주었다. 나는 무척 놀랐다. 대꾸할 겨를도 없이 눈물이 떨어졌다. 내 것이라고 냉큼 기뻐하기에는 너무 아름다운 말이었다. 동시에 안간힘을 써온 그간의 시간들이 일 분 일 초도 헛되지 않은 기분이었다. 친구는 우는 나를 보고 ‘진짜야.’라고 말하며 웃었다. 웃다가 같이 울었다. 그래서 그 다음번엔 내가 웃었다.     

긴 시간 동안 사라지지 않고 남은 이 말들을 때때로 꺼내 들고 상처에 발랐다. 나는 누군가의 가장 자랑스러운 것이었어, 나는 끝까지 보여 줘도 절대 실망스러운 사람이 아니야. 그러면서 상처가 깊어지는 걸 막은 게 여러 번, 그렇게 버티면 어느 틈에 상처가 아물었다.       

어떤 말들은 초록의 창 같아.

이제 나는 누가 나를 가장 자랑스러운 것이라고 꼽지 않아도 상관없고 내 밑바닥을 보고 실망한대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냥 나이고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할 뿐이다. 누군가의 가장 자랑스러운 것이 되거나 끝까지 보여 줘도 실망스럽지 않은 사람이 되는 건 그 후에 운이 좋으면 따라오는 보너스 같은 것이다. 그렇지만 남편과 친구에게 내가 그런 사람이었다는 사실과 그들이 마음을 담아 내게 건네준 그 말들은 마지막까지 잊지 못할 것 같다.

살면서 우리는 참 많은 말을 한다. 그리고 자신이 한 말을 곧잘 잊는다. 어쩌면 남편도 친구도 내게 한 그 말을 진작 잊었을지 모른다. 그렇지만 내가 그랬듯이 누군가는 우리가 잊은 말을 오래 기억한다. 그리고 그 말들이 내내 기댈 수 있는 안식처가 되기도 한다. 당신이 건넨 말 한마디로 누군가는 눈물을 닦는다. 분명히 그래. 그러니 찌르는 말 말고 감싸 안아 주면 좋겠다. 말로도 마음으로도 따뜻하게 감싸 안아 줘. 어쩌면 당신이 건넨 말이 누군가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꼭 쥐고 갈 말이 될 수도 있으니까. 마지막까지 내가, 꼭 쥐고 갈 말일 수도 있으니까.  

남편과 친구가 내게 건넨 말은 밤하늘의 빛나는 달 같은 것이 되었다. 영영 사라지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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