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시모토 바나나 <암리타>
음악은 순식간에 우리를 압도한다. 몇 마디, 아주 짧은 시작만으로도 사로잡히곤 한다. 사무실 내 자리는 바깥쪽 창을 향해 있는데 주로 블라인드가 내려져 있지만 블라인드 틈으로 빛이 들어와서 안에 갇혀 있다는 느낌을 덜어준다. 음악을 들으며 일을 하다가 가끔 자판을 치던 손을 멈추고 블라인드 쪽을 멍하니 바라본다. 듣고 있는 음악에 머물고 싶을 때, 사로잡히는 느낌이 말할 수 없이 벅차서 일을 멈출 수밖에 없다. 음악이 끝나도 멜로디는 어딘가로 이어져서 멈췄던 일기를 다시 쓰게 하고, 서랍에 넣어둔 시집을 펼쳐 들게 한다.
사무실 창이 서쪽으로 나 있어서 오후 4시쯤 되면 빛이 더 깊게 들어온다. 같은 빛이라도 저물어가는 빛에는 우수가 묻어 있다. 클래식 FM 93.1은 4시부터 5시까지 아리아를 주로 들려주는데 그 시간의 빛과 어우러져서 종종 놀랄 만큼 아름답다. 빛과 음악이 맞아떨어지는 4시가 되면 기댈 곳이 생기는 것 같아 좋다. 4시가 가까워지면 창 쪽도 더 자주 흘끔거리게 된다. 내가 무척 좋아하는 루틴. 라디오를 듣다가 좋은 음악이 나오면 잽싸게 라디오 어플을 열고 선곡 리스트를 확인한다. 선곡 리스트는 타임라인별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디제이의 소개를 놓치면 위에서부터 몇 분짜리 음악인지 따져서 대강 지금의 시간에 맞는 음악을 짐작해야 한다. 그렇게 찾으면 유튜브에서 그 제목을 검색해 지금의 음악이 맞는지 확인한다. 나중에 다시 들으려고 저장해 두는데 저장된 음악 리스트를 보면 부자가 된 것 같아 혼자 웃는다.
책상 양옆으로는 회사의 커다란 화분에서 꺾어 온 몇 가지들을 물에 담가놓았다. 물속에 담가 놓았을 뿐인데 뿌리가 자라고 새잎이 돋아 몇 년째 함께 있는 아이들도 있다. 초록은 안정감을 준다. 일하다가 연두와 초록 잎을 물끄러미 보면 마음이 햇빛에 씻기는 기분이 든다.
이 둘은 변함없이 일상의 나를 지켜 준다. 저물지 않게, 바싹 말라버리지 않게 나를 돌봐 준다. 언제부터 마음을 돌보기 시작했을까? 처음 내가 내 마음을 위해 해 준 일은 무엇이었을까? 동네 언덕에 핀 꽃들을 보며 천천히 걸은 일일까? 주말 아침만 되면 자전거를 타고 동네를 누볐던 걸까? 비 오는 날 이불속에서 스탄 게츠의 음악을 들으며 게으름을 피우던 그날이었나? 처음 무슨 일을 했었는지 찾아내는 건 어렵지만 마음을 돌보는 법을 누구에게 처음 배웠는지는 알 것 같다. 아마도 아빠였던 것 같다. 아빠는 늘 지금이 중요하다는 걸 보여 줬으니까.
어렸을 때 여름휴가 가는 길이 정말 지루했다. 어느 해부터는 늘 서해의 꽃지 해수욕장으로 휴가를 갔는데 차가 말할 수 없이 밀렸다. 언니, 동생과 뒷자리에 셋이 나란히 앉으면 여유 공간이 거의 없었다.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길에 얼마나 좀이 쑤시던지. 그런데 아빠는 짜증을 내지 않았다. 예전의 수동 자동차로는 기어를 넣었다 뺐다, 브레이크를 밟았다 뗐다 운전하는 게 무척 피곤했을 텐데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바닷가에 도착하면 지친 우리를 위해 텐트를 쳐 주었다. 슥슥 텐트를 치고 나면 아빠는 바다에 뛰어들어 수영을 했다. 그러고는 웃음이 가득 퍼진 얼굴로 바다에서 잡은 골뱅이를 몇 마리씩 들고 텐트로 돌아왔다. 밤에는 파라솔 탁자에 앉아 우리에게 카드 게임을 알려 주었다. 엄마는 텐트 안에서 자고 우리 넷은 밤새 훌라 게임을 하기도 했다. 아빠는 차근차근 룰을 알려 주고 우리가 잘하면 ‘그렇지, 그렇게 하는 거야.’하고 칭찬해 주었다. 그렇지만 일부러 져 주지는 않았다. 그 밤, 새벽의 바닷가, 멈추지 않고 들려오던 파도 소리.
아빠는 ‘현재를 즐기는 게 중요한 거야.’라고 말했다. 나는 자라며 몇 번이나 아빠에게 같은 말을 들었다. 아빠의 인생은 녹록지 않았지만 한탄하며 시간을 보내지는 않았다. 내가 모르는 시간 속에서의 아빠가 그랬을지는 몰라도 적어도 우리 앞에서는 그런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지금을 즐기는 사람으로 자랄 수 있었다. 사소한 것이라도 즐거움을 찾아냈다. 그 일이 마음을 돌보는 일과 같다는 건 나중에 알았다. 이것이 우리 집의 비전(祕傳)이다.
요시모토 바나나의 <암리타>에는 머리를 다쳐 옛날 자신에 대한 기억을 잃은 주인공이 등장한다. 주인공에게는 이상한 예지력을 갖게 된 남동생이 있고, 자살로 생을 마감한 여동생도 있다. 엄마는 결혼에 두 번 실패하고 세 번째 애인을 만나고 있고 그 셋과 한 집에 사는 엄마의 친구는 이혼 후 딸과 헤어져 살고 있다. 넷이 한자리에 모인 어느 저녁, 엄마가 질문을 하나씩 던지기 시작한다.
요시오, 음식이 맛있니? 음식의 맛을 제대로 느끼고 있니? 아침에 일어나면 어때, 좋아? 오늘 하루가 기대돼? 밤에 잘 때도 기분이 좋니? 친구가 앞에서 걸어오고 있습니다. 신나나요? 아니면 귀찮은가요? 눈에 보이는 경치가 마음으로 들어옵니까? 음악은? 외국을 생각해 봐. 가고 싶어? 가슴이 두근두근하니? 아니면 귀찮아? 내일이 기다려집니까? 사흘 후는? 미래는? 설레니? 아니면 우울하니? 지금은? 지금은 모든 게 잘돼 가고 있니? 자기 자신이 마음에 드니?
가족들은 어느 틈엔가 엄마가 거침없이 뱉는 질문에 빨려 들어 스스로에게 묻는다. 밤에 잘 때 기분이 좋은가? 친구가 걸어오는데 신나나? 내일이 기대되나? 우울한가? 엄마는 이 질문이 할아버지한테 배운 인생의 비전, 체크 포인트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힘든 일이 생겼을 때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자기 자신에게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고, 매일 자기 전에 눈을 감고 진심으로 묻고 생각대로 잘 안 되는 날이 계속되어도 며칠이고 계속해야 한다고 했다.
암리타는 몇 번이고 나를 위기의 순간에서 구해 준 책인데 책을 덮고도 저 장면이 가장 오래 기억에 남았다. 스스로에게 던지는 저 질문들도 결국엔 나를 돌보는 방식이다. 잘 지내고 있나? 우울하지는 않나? 이대로 괜찮은 건가?
우리는 타인뿐 아니라 내 마음도 외면하고 지낼 때가 많다. 외면하고 다그친다. 넌 왜 그래? 왜 이것밖에 안 돼, 해내야지 하면서 다그치고 실망한다.
해내야지, 맞다. 해내야지. 내 몫이 있다면 해내야지. 그런데 해낼 수 있게, 해낼 수 있는 마음을 만들어 줘야지. 할 수 있게 도와줘야지. 누구도 해 주지 않는 이 일을 내가 나에게 해 줘야지. 질문도 던지고 괜찮나 확인하고 좋아하는 일을 해 주면서 천천히라도 나아질 수 있게.
블라인드 틈으로 들어오는 빛을 자주 바라보고, 좋아하는 음악을 듣고 듣다가 일하는 손을 멈추고, 식물을 키우며 바라보는 게 내게는 아주 중요하다. 내가 나에게 해 줄 수 있는 건 그런 작은 것들뿐이지만 작은 것들이 모여 굳건히 나를 지켜 준다. 틈틈이 걷고 바람을 쐬고 구름을 보고 웃으며 인사를 나눈다. 내일은 또 무슨 일이 일어나서 나를 때려눕힐지 모르지만 지금은 지금 좋은 일을 하며 시간을 보낸다. 그러니 너무 다그치지 말고 네 마음을 도와줘. 일어날 수 있게, 천천히 나아질 수 있게. 그러면 꼭 마음이 기지개를 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