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벅차올라

나는 나를 산다

by 박선희

벅차오르는 기분을 좋아한다. 그런 기분은 이상하게 혼자 있을 때 더 많이 느끼게 된다. 바쁜 출근길에 문득 눈이 부셔서 태양을 올려보다가 멀리서 멀리서 출발한 햇볕이 용케 나에게까지 닿았구나 싶을 때, 퇴근길에 노을이 하늘 끝에 남아 있거나 가느다란 초승달이 분명하게 빛나고 있을 때 벅차오른다. 긴 겨울 끝에 봄 기척을 느낄 때, 봄 끝에 무턱대고 들이대는 여름을 예감할 때, 여름 끝에 초가을 바람이 이마를 두드릴 때, 가을 끝에 주머니에 손을 넣고 ‘겨울인가.’ 할 때 어쩔 수 없이 벅차오른다. 책을 읽다가 어떤 문장에 반할 때는 그 문장이 살아서 날아올라 마음속으로 쑥 들어온다. 그러고는 마음을 꽉 쥐고 놓아주질 않는다. 오랫동안 사로잡힌다. 그 기분을 무척 좋아한다.

신기하게도 가장 자주 벅차오름을 느끼는 장소는 사무실이다. 조용한 사무실에서 귀에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들을 때 이건 너무한 거 아닌가 싶게 벅차오를 때가 많다. 같은 음악인데도 다른 곳에서 들으면 그만큼의 전율이 느껴지지 않는 걸 보면 ‘조용한’ 공간이라는 점이 음악에 더 깊이 빠져들게 하는 것 같다. 예열 없이도 몇 마디 멜로디만으로도 강렬하게 몰입할 수 있는 음악이 정말 좋다.

요즘은 일본 음악에 홀려 있다. 오사카에서 살았던 4년의 시간이 나에게는 무척이나 소중하고 빛나서인지 일본어를 듣고 있는 게 좋다. 처음엔 일본 드라마를 보았고 요즘은 음악을 내내 듣는다. 소리 나는 그대로 받아 적고 이리저리 의미를 궁리하며 가사를 번역하기도 한다. 화장실을 오가는 복도에서는 혼자 조그맣게 부르기도 한다. 어떤 노래는 몇 번을 들어도 반복해서 반복해서 전주에서부터 벅차오른다.

明けてゆく空も 暮れてゆく空も 僕らは超えてゆく  밝아오는 하늘도 저물어 가는 하늘도 우리는 모두 이겨내.

그런 날들을 보내느라 연재를 시작하고도 제대로 약속한 날짜에 글을 올리지 못했다. 글을 올리지 못하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마음이 무거웠다.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데도 이건 약속이니까 내내 약속을 어기고 있다는 기분이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늘 그때그때 하고 싶은 말을 썼다. 내 안에 있는 진짜의 것이 아니면 글로 완성하기가 어렵다. 소설은 영영 쓰지 못할지도 모른다. 소설이 진짜가 아니라는 말이 아니라 다만 내게는 하나의 진짜 같은 세계를 만들어낼 재간이 없다는 소리다. 늘 소설이 좋았고 소설을 쓰고 싶다고 바라왔는데 요즘은 달라졌다. 나 자신을 쓰는 사람이라고 여겨 왔는데 지금은 그 생각도 조금 가벼워졌다. 그래도 괜찮다고, 괜찮게 여기는 마음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쓰지 않으면 의미가 없고, 내가 희미해진다고 생각했는데 쓰든 쓰지 않든 의미는 그대로이고 희미해지지 않아, 쓰고 싶을 때 쓰고 멈추고 싶으면 얼마든

멈춘다. 뭐가 뭐래도 나는 있는 그대로 나이고 그 자체로 나답다. 이게 현재의 내가 삶에 대해 갖고 있는 가장 분명한 태도다.

얼마 전에 그런 글을 썼다. 나는 나를 산다는 생각을 자주 하고 그 생각을 할 때마다 용기가 솟아오른다고. 나를 사는 일은 나밖에 할 수 없다. 아무도 나 대신 살아줄 수 없어. 내가 선택하는 대로 내 인생이 흘러간다고 생각하면, 누구와도 같을 필요 없고 내 뜻대로 살아내면 된다고 생각하면 용감해진다. 자유로워진다.

지금의 나는 이 생각에 강렬하게 사로잡혀 있다. 그래서 자주 벅차오른다. 나는 용감하고 자유로워, 누구와도 같을 필요 없어, 이 주문이 너무 좋아서 자꾸 웃음이 난다. 언제까지 유효할 주문일지 몰라서 더 소중하다. 내일은 울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오늘은 오늘의 좋은 걸 만끽해야지.

‘누구와도 같을 필요 없어.’ 이 문장은 아무리 되뇌어도 질리지 않는다. 떠올릴 때마다 마음에 새로운 바람이 분다. 벅차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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