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밖의 터키 한달살이

터키 시골마을 요양기

퇴원하는 날 아침이 밝았다. 마지막 회진과 마지막 드레싱을 받고 사람들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짐을 싸는데 왠지 모르게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그립지 않을 그리울 것들에게 안녕을 고하며 병원을 나섰다.


일주일 내내 병원 간이침대와 소파에서 쪽잠을 자던 젤리하의 부모님은 얼굴이 반쪽이 되셨다. 자기 딸 수발로도 모자라 졸지에 다 큰 아들딸까지 둘이나 생겨버렸으니 등골이 휠 지경이다. 트렁크 가득히 짐을 싣고 5명이 한차에 꼬깃꼬깃 끼어 앉아 젤리하의 집으로 향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르다가 입원한 파묵칼레 대학병원에 들렀다. 사고 후 처음 보는 아르다를 만날 생각에 모두가 들떠 있었다. 우리는 '가서 최대한 밝은 모습으로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인사하고 오자'고 약속했고, 병원으로 가는 차 안에서 나는 한참 동안 아르다에게 건넬 터키 말을 연습했다.


Seni özledim Arda. üzgünüm

(보고 싶었어 아르다. 그리고 미안해)

이제 집으로 갑시다

하지만 병원에 도착해 아르다 얼굴에 생긴 큰 수술 자국과 떠지지 않는 아르다의 한쪽 눈을 본 순간 실컷 외워온 말들이 머릿속에서 새하얗게 지워졌다. 애써 웃어보려 했지만 이내 차오르는 눈물 때문에 화장실로 뛰어들어갔다.


뒤따라 들어온 젤리하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있었다. 우리는 서로를 안은 채 물을 틀어놓고서 한참을 울었다.




젤리하의 퇴원 소식을 들은 이웃들과 친구들이 그녀의 집을 방문했다. 그녀가 근무하고 있던 학교에서는 그녀와 아르다의 쾌유를 빌며 성금을 모금해 찾아왔고, Sevil의 식구들이 다 같이 방문했다. 아침저녁 할 것 없이 찾아오는 그녀의 손님들을 받으면서 정신없는 일주일을 보냈다.


식구들은 돌아가며 밤낮으로 아르다의 곁을 지켜야 했다. 젤리하의 동생 Sevil이 그녀를 돕기 위해 찾아왔고 그의 남편과 아이들까지 온 가족이 이곳에서 지내기로 했다. 익숙하지만 여전히 신기한 얼굴들에 신이 난 두 천사는 밤낮으로 우리를 찾았고, 그렇게 10명이 넘는 대식구가 한집에서 살기 시작했다.

매일매일 귀에 피가나도록 내이름을 불러대던 IPek과 Idel / 나를 위해 세빌이 챙겨다 준 새 웨딩드레스

하루는 TV를 보고 있는데 '엄마의 날'이라는 뉴스가 나왔다. 아르다를 간호 중인 작은 딸 세빌과 환자인 젤리하가 그걸 챙길 정신이 있을 리 만무했다. 바쁜 자식들을 대신해 백수인 우리가 나서야겠다고 작당한 우리는 처음으로 단 둘이 몰래 집을 나와 손짓 발짓으로 꽃집과 빵집을 찾았다.


두 병자의 서프라이즈 파티에 놀란 두 어머니는 꽃다발을 받고서 눈물을 글썽이셨다. 번역기를 돌려 '고맙다, 이쁘다, 사랑한다' 하시기에 '자식들 때문에 고생이 많다'고 하니 울다가 이내 깔깔 웃으셨다.


우리가 그곳에 머무는 내내 터키는 라마단 기간이었다. 어머님은 금식을 위해 하루 종일 물 한 모금 안 마시면서도 청소와 빨래를 하고 밥을 해 먹이느라 눈에 핏줄이 다 터지셨다.


기존 식구들 만으로도 북적대는 집안에 두 명의 객식구까지 붙었으니 얼마나 부담스럽고 신경이 쓰였을까. 고작 이 케이크와 꽃다발만으로는 이 마음을 다 전할 수 없겠지만,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죄송하고 감사하다.


그날 이후 우리는 젤리하의 부모님을 마마&바바라, 그분들은 우리를 아들&딸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여느 날과 다를 바 없는 어느 아침의 일상.

내리쬐는 아침 햇살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뒤척거리다 슬그머니 눈을 뜬다. 쿨럭거리는 바바의 기침소리와 달그락대며 마마가 아침밥 준비하는 소리가 들린다. 베란다로 올라오는 담배냄새와 렌틸콩 수프 냄새를 맡으며 아침을 시작한 지도 벌써 2주가 지났다.


눈을 반쯤 감은 채로 어그적 어그적 1층 거실로 내려가 아침 인사를 건넨다. 토마토, 오이, 치즈를 얹은 바게트를 한입 베어 물고 손바닥 가득히 아침 약 한 봉지를 털어 삼킨다. 소파에 드러누워 TV를 보다 잠시 졸고 나면 또 점심 먹을 시간이다. 밥 먹고 약 챙겨 먹는 것이 하루 일정에 전부인 생활은 처음인지라 뭔가 허전하고 자꾸 좀이 쑤신다.

아침을 먹고나서 거실에 모여 TV를 보는게 유일한 일과였다

지난 며칠간 기분이 우울했다. 이른 새벽에 자꾸 눈이 떠지고, 아무 이유 없이 왈칵 눈물이 나서 입을 틀어막고 울기도 했다. 몸이 회복되니 마음이 곪아가는 것 같았다. 씩씩하게 먹어대던 밥도 입맛이 없어 금세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얼굴에 그늘이 드리운 나 때문에 가족들이 괜스레 내 눈치를 살폈다.


그날도 느즈막히 일어나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하루를 시작하려는 중이었다. 빵을 입에 집어넣으려는데 핸드폰으로 사진 한 장이 날아왔다. 그 사진에는 누군가가 나에게 적은 한 통의 편지가 찍혀있었다.


그 편지에는 나의 상태를 아는 듯 마음을 토닥토닥 다독이는 글귀들이 적혀 있었다. 희미한 웃음을 입가에 걸친 채 한 자 한 자 더듬어 내려가던 나는, 편지 끝자락에서 믿을 수 없는 글귀를 발견했다.


'지금 언니 집 앞이에요'


튀어나올 듯 커진 두 눈에는 벌써 눈물이 그렁그렁. 터질 듯이 두근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전화를 걸었다.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어디냐고 묻는 내게 그녀는 지금 집 앞인데 길을 못 찾겠다고 했다. 나는 맨발의 잠옷 차림으로 집 밖을 뛰쳐나갔다.


저만치 멀리 골목 끝에서 달려오는 그녀를 본 나는 이 믿을 수 없는 상황이 꿈이 아니기를 바랐다. 꺅꺅거리며 달려온 그녀를 끌어안자마자 마치 10년 만에 손녀를 다시 만난 시골 할머니처럼 꺼이꺼이 울었다.


뜻밖의 선물, 유일한 나의 손님

나보다 한 달 먼저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유럽을 여행 중이던 그녀는, 사고 이후 간간히 주고받던 통화 말미에 '떡볶이가 먹고 싶다'며 울부짖던 내 목소리가 계속 마음에 걸렸단다. 일주일 가까이를 밤낮으로 고민하던 그녀는 결국 떡볶이 한 팩과 라면 세 봉지를 들고서 터키행 비행기에 올랐다.


모든 일정과 예산이 정해져 있는 상황에 쉽지 않은 결정이었음에도 그녀는 많은 것들을 포기하고 나에게로 와주었다. 처음으로 찾아온 나의 유일한 손님에 가족들은 너 나할 것 없이 그녀를 반기며 만나러 와 줘서 고맙다고 했다.

케찹과 커스터드 소스 - 줄여서 케스터드 자매라 한다

멋진 곳을 보여주고픈 마음에 그녀와 함께 파묵칼레를 찾았다. 오랜만에 예쁜 옷을 차려입고 집을 나서려니 마치 다시 여행자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었다. 둘이 카페에 가서 밀린 수다를 떨고, 눈물 나게 먹고 싶던 김밥과 떡볶이를 만들어 먹으면서 한국에서 이다지 특별할 것 없는 이 모든 것들이 얼마나 특별해질 수 있는지를 새삼 느꼈다.


늘 혼자서만 여행을 해왔던 그녀에게 외국인들과 (그것도 10명이 넘는 대가족들과) 함께 지내는 것은 퍽 낯선 경험이었다. 아이들은 눈만 뜨면 그녀를 찾아댔고, 온 가족이 다 함께 시간을 보내다 보면 어느새 하루가 훌쩍 지나있었다. 이렇게 어린아이들과 이렇게 긴 시간을 보내본 적은 처음이라고 했다.

집에 식구들이 다 모이면 거실은 늘 이렇게 북적거렸다. / 범인은... 두 명..
터키 독립기념일 행사를 맞아 나선 밤마실

매일 밤 그녀를 숙소로 돌려보내고 나면 소풍 전 날밤처럼 '어서 내일이 오기를' 기다리며 잠들었다. 사고 이후 다음날이 기다려지는 건 처음이었다. 매 순간 가슴이 간질거릴 만큼 행복해하는 나를 질투하기라도 한 듯 그녀가 오기 전 한없이 느리게만 흘러가던 시계는 야속할 만큼 빠르게 움직였다.


그녀가 떠나는 날 이른 새벽. 아직 동이 떠오르기도 전 어슴푸레한 새벽길을 걸어 공항으로 향하는 그녀를 마중했다. 버스를 태워 보내기 전 진짜 작별이 코앞으로 다가온 나 그녀를 처음 만났던 그 순간처럼 다시 꼭 끌어안았다.


'나를 만나러 이곳까지 와줘서 고마워. 너도 무사히 남은 여행을 마무리 짓고 우리 한국에서 다시 만나자..'


진부하기 짝이 없는 작별인사를 건네던 나는 애써 터져 나오는 울음을 꾹꾹 눌러 담았다. 그녀에게 말로 차마 다 표현할 수 없는 나의 마음을 전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다시 또 엉엉 울어버릴 것 같아 애써 웃으며 그녀를 보냈다. 나는 그날 멀어저가는 버스를 한참 동안이나 바라보았다.


다시 그녀가 없는 나의 일상으로 돌아온 오늘, 그녀와 함께 많은 것을 나눈 카페에 혼자 앉아 그녀의 빈자리를 가만히 더듬어본다.


북적이던 가족을 떠나 다시 혼자가 된, 알게 모르게 헛헛할 그녀의 마음 또한 우리가 함께 나눈 기억들로 폭닥 폭닥 채워지길 바란다.


고마워 수리

내게 와줘서 고마워.


못다한 터키 이야기

https://youtu.be/Tb93LUUpTk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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