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직서 대신 휴직서를 내밀다

인생의 디톡스가 필요한 순간

직장 생활 3년 차에 또다시 몸뚱아리가 엉망진창이 되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성한 데가 없다'는 말이 나를 두고 하는 말일 줄이야. 2년 전 이맘때에도 목디스크가 터지는 바람에 급하게 병가를 냈었지만, 그 이후로도 꾸준히 종일 컴퓨터를 끼고 앉아 타자를 두드렸다. 주인의 방치와 학대로 망가진 목과 어깨, 골반과 허리는 밤낮으로 살려달라고 아우성을 쳐댔다.


마음이 힘든 것에는 이골이 나서 이젠 웬만한 스트레스엔 흔들리지 않는 맷집이 생겼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건 나의 오만이었다. 무뎌진 줄 알았던 나의 세포들은 그저 묵묵히 그 스트레스를 견뎌내고 있는 중이었다. 머리에서는 원인 모를 지루성 두피염 때문에 진물이 뚝뚝 흘렀고, 알르지 시즌도 아닌데 코 안쪽이 곪아터져 누런 코가 뭉텅뭉텅 나왔다. 몸에 독이 차는 걸 견디다 못해 세포들이 썩어가는 중인 것 같았다.




위염과 식도염으로 소화기능은 상실된 지 오래였고, 조금만 자극적인 것을 먹어도 쓰라린 목구멍에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제거해도 생존에 문제가 없는 장기라 가장 먼저 타격을 받는다던 자궁은 본인 한 몸을 희생하기로 작정한 듯했다. 생리 기간을 한참 앞두고서 열흘 넘게 콸콸 피를 쏟아내더니 일주일이 채 지나지 않아 다시 또 피를 토했다. 두려운 마음에 달려간 산부인과에서는 스트레스로 호르몬 체계가 무너진 것 같다며 한 뭉치의 호르몬제를 처방해 줬다.


몇 달에 걸쳐 나타난 무수한 증상들을 하나씩 마주 할 때마다 조금씩 불안이 커졌다. 지금으로부터 5년 전, 직장을 그만두기로 결심하기 직전의 몸상태로 돌아가는 내 몸 앞에서 나는 다시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대로 몸을 방치할 수는 없으니 어떠한 방향으로든 결정을 내려야 했다. 그러나 이제 더는 20대가 아니었기에 모든 것이 이전처럼 간단하지 않았다. 오랜 고심 끝에 나는 사직서 대신 휴직서를 내밀었다.

잃는 것은 작고 소중한 월급뿐, 모든 면에서 득이다
삶을 바꾸기 위한 시도들

지금의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특정 한 부분이 아닌 삶 전반에서의 변화가 필요했다. 나는 몸과 마음, 인생 전체에 가득 들어찬 독을 빼기 위해 삶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에서 디톡스를 결심했다.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과 물부터 몸에 밴 행동과 생활환경까지. 다시 말해 수면, 섭식, 운동, 시간, 관계, 습관 등 일상에서 경험하는 모든 것을 변화시켜 나갔다. 그 낯선 변화들을 나의 익숙한 일상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환경 : 삶의 변화를 위해 집안 환경부터 바꾸었다. 바쁘고 피곤하다는 핑계로 쌓아뒀던 묵은 짐들을 몽땅 꺼내 필요 없는 것들을 정리해 버렸다. 지속적으로 거슬렸던 잡동사니들이 사라지니 그것만으로 스트레스가 줄어드는 것 같았다. 먹어야 할 것들과 사용할 물건들을 눈에 보이게 꺼내두고 변화될 삶의 패턴에 맞게 집안 구조도 변경했다. 거실 테이블 옆엔 작은 책장이 놓였고, 부엌에는 티포트가 자리 잡았다.


섭식 : 내가 먹는 음식이 내 몸을 구성한다는 걸 알았기에 섭취하는 음식의 양과 종류를 바꿨다. 안 좋은 음식을 급하고 과하게 먹는 식습관에서 벗어나 좋은 음식을 천천히 조금만 먹기로 했다. 이전까지 주 식단을 차지하던 고기 당 밀가루 우유를 줄이고 힘들다는 이유로 마시던 술도 끊었다. 대신 채식과 곡물 위주의 음식으로 식단을 바꾸고 영양제로 빈 곳을 채웠다. 낮에는 커피 대신 야채수나 차를 달여 들고 다니며 수시로 마신다.


수면 : 하루가 끝나는 것이 아쉬워 늦은 새벽까지 졸음을 참아가며 핸드폰을 붙잡고 있던 삶에서 벗어나고팠다. 밤 10시가 지나면 폰을 내려놓고 일기장과 책을 챙겨 침실로 들어가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한다. 하루를 돌아보며 글을 쓰고, 잔잔한 글을 읽다 보면 나도 모르게 눈이 스르륵 감긴다. 일찍 잠에 드니 다음날 아침에 자연스레 눈이 떠진다. 처음에는 8시였던 것이 점점 7시, 6시를 지나 이젠 5시에 일어나게 됐다.


하루가 시작되는 것이 끔찍해 몸부림쳤던 때와는 달리, 새로운 하루가 기대돼서 절로 눈이 떠진다. 오늘은 무얼 할까 이번엔 어딜 가볼까 생각하다 보면 기분 좋은 조급함에 몸을 일으키게 된다. 여전히 체력이 좋지 않아 낮에 의식을 잃고 기절할 때가 많지만, 그마저 내게 필요한 시간이란 생각에 기분 좋게 휴식을 취한다. 잠깐의 꿀잠 뒤 새롭게 시작되는 두 번째 하루가 신나는 건 말할 것도 없다.

나의 꿀잠 파트너들을 소개한다
더하기와 빼기 그 사이 균형

운동 : 휴직 첫날 눈을 뜨자마자 요가원을 찾아 새벽반을 등록했다. 몇 년 만에 매트 위에 몸을 뉘이니 그간 몸이 얼마나 망가졌는지 여실히 느껴졌다. 가만히 누워있기만 해도 뒤틀린 뼈와 근육들이 욱신거리고 어느 동작을 하든 통증이 동반된다. 지금은 몸풀기에 가까운 기본 동작만 겨우 따라 하는 상태지만, 꾸준히 수련하다 보면 조금씩 나아지는 몸을 경험하게 될 것 같다.


하루 일과를 끝낸 저녁에는 필라테스 레슨으로 몸의 골근육을 정렬한다. 아직은 운동보다는 재활에 가까운 동작이 전부지만 끝나고 나면 온몸이 땀에 젖는다. 하루종일 나를 괴롭히는 통증의 원인을 찾을 때마다 속이 시원하다 못해 짜릿하다. 운동으로 헐거워진 곳이 단단히 조여지고 과긴장 된 곳이 풀어지다 보면 조금씩 통증에서 자유로워지게 될 거라 믿는다. 그때까지 열심히 재활하며 내 몸을 돌봐야겠다 다짐한다.


관계 : 가장 큰 결심과 노력이 필요했던 변화는 관계였다. 사람을 좋아하는 성격 탓에 항상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기를 원했던 나는, 종일 쉴 틈 없이 사람들과 연락을 주고받으며 생각나는 이에게 안부를 물었다. 그러다 보니 스케줄러엔 늘 약속이 빽빽이 들어차있었고 혼자 머물며 나에게 집중하는 시간은 부족했다. 저 나를 찾는 이들 중 대부분은 슬프거나 분노에 찬 상태로 자극적인 얘개를 들려줬기에 나는 그들과의 만남 뒤 소진감을 느꼈다.


고시 공부를 할 때조차도 끊지 않던 관계를 정리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다른 사람들로 인해 느끼는 감정적 동요를 없애기 위해서였다. 타인과의 접촉을 줄이고 싶었던 나는 카톡과 인스타를 지워버렸고, 동시에 나를 쓰레기통으로 이용하는 사람들과 거리를 뒀다. 이전까지 남에게 소모했던 감정과 에너지를 아끼고, 제한적으로 주어진 이 소중한 시간을 나에게 할애하기로 했다. 그 남은 시간을 전히 나에게 더 집중하며 보내려 한다.


새로 찾아낸 근사한 작업 공간들
변화의 시작은 지금부터

습관 : 무수한 것들을 비워낸 뒤 그 빈자리에 허락한 새것은 단 3가지였다. 운동, 독서 그리고 글쓰기. 기존의 습관 중에서도 나에게 해가 되지 않으면서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는 것만 남겨두었는데, 그러면서 자연스레 나만의 모닝루틴이 만들어졌다. 아침에 일어나 따뜻한 차 한잔과 함께 기도로 하루를 시작한다. 거실 책상에 앉아 감사일기와 가계부를 적고 집과 몸을 정돈한 뒤 집을 나서는 것이 아침루틴이 됐다.


시공간 : 9시부터 6시까지 정해진 공간에 무조건 갇혀있어야 하는 삶에서, 언제든 원하는 곳에서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삶으로 전환되었다. 최근에는 혼자서 차를 몰고 돌아다니며 새로운 공간을 탐색하고 있는데 바다 혹 숲이 보이는 도서관이나 아무도 없는 이른 아침의 카페를 즐겨 찾는다. 어디든 노트북을 펼치는 곳이 그날 하루 나의 작업실이 되어주기에 매일 새로운 곳에서 은밀한 기쁨과 설렘을 만끽하고 있다.


일상: 그간 생각해 왔던 주제로 글을 쓰거나 오랜 시간 미루며 쌓아놨던 책을 읽고, 지금껏 추구해 왔던 과거를 돌아보거나 앞으로 살아가고픈 미래에 관해 상상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항상 과하게 각성되거나 혼란한 마음으로 번잡하게 보내던 일상에서 벗어나, 기꺼이 느리고 차분하게 조용한 일과를 보내고 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나의 감정과 생각들에 가만히 머무는 시간이 늘어난다. 그동안 무심코 지나치며 소홀히 대했던 내 마음들을 하나씩 충분히 짚어보고 있다.


봄이라 사방이 꽃 천지다

감정과 생각이 선명해지니 자연스레 온몸의 감각들도 깨어나는 기분이다. 햇살의 눈부심, 귓가에 속삭이는 새소리, 볼을 스치는 바람의 느낌, 길가에 핀 꽃의 향기까지 모든 것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늘 종종거리던 나의 발걸음도 느려졌다. 그 덕에 폰화면이나 길바닥이 아닌 주변을 둘러보며 걷는다. 길을 걷다 꽃을 발견하면 소녀미를 넘치는 중년의 여인처럼 꽃사진을 찍어댄다. 마치 대학생 시절 시도 때도 없이 하늘을 찍어대던 그때의 나처럼, 세상이 아름답게 보이고 마음의 여유가 생겨나고 있다.


무엇보다 삶의 주도권을 회복한 것이 가장 만족스럽다. 내게는 내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는 '자율성과 통제력'이 삶의 만족도에서 중요한 요인인 것 같다. 지금껏 살면서 잠시 멈춰 선 적은 많았지만, 내가 원할 때에 스스로가 원해서 멈췄던 적은 많지 않았다. 그러나 언제든 원할 때 원하는 곳에서 멈춰 선 나는 항상 이렇게 생생히 깨어있고 피어났다. 다시 한번 원하는 때와 장소에서 멈춰 선 지금, 그 어느 때보다 생기가 돈다.


격정적이고 독창적인 작품을 쓰고 싶다면,
실제 삶이 규칙적이고 질서 정연해야만 한다.
- 구스타브 플로베르 -

내게 주어진 이 소중한 시간 동안 스스로 일구어 낸 단정하고 질서 정연한 삶 속에서 내 인생이라는 격정적이고 독창적인 걸작 한편을 써보고 싶다. 독이 빠져나간 몸과 마음 그리고 삶이 무엇으로 채워질지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