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행의 내막

그 여자 그 남자의 사정

집으로 돌아온 지 5개월 즈음 지난 어느 가을날이었다. 아무렇지 않게 일상을 살아가다가도 뭔가에 홀린 듯 자꾸만 그때로 돌아가는 나를 보며 뭔가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무언가는 단순한 '해소'이기도 했고, '표현'일 수도 있었으며, 그 모든 것을 넘어선 '소통'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아직 그게 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나는 그 무언가를 위해 이 글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비장한 각오로 쓰기 시작한 글은 2주가 지나도록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했다. '그 여행의 내막'이라는 그럴싸한 제목 아래 껌뻑이는 커서만 들여다보기를 며칠.. '어쩌다가 이 여행을 떠나게 됐지..?'라는 질문을 던지고 보니 이건 모두 한 여자 때문이었다.



태초에 꽂.미.녀가 있었다.

어려서부터 무엇이든 하나에 꽂히면 '미쳤다'는 소리를 들을 때까지 매달려서 끝을 보고야 마는 여자가 있었다. 이름하야 꽂(히면).미(치는).녀(자). 소싯적 여기저기 어슬렁거리면서 미쳤다는 소리를 꽤나 들어봤던 그 여자가 이번에는 여행에 미쳤다고 했다.


29살이라는 다소 늦은 나이에 처음으로 외국 땅을 밟아보았던 그녀는 몹시 격앙된 상태로 돌아왔다. 자기가 평생 동안 만나본 사람보다, 여행지에 도착한 그날 하룻밤에 만난 인종의 수가 더 많다는 사실에 그녀는 적잖이 충격을 받은 듯했다. 자신이 얼마나 작은 세상 안에서 살아왔던 거냐며 한탄을 하던 그녀는 1년 뒤 세상을 돌아보겠다고 멀쩡히 다니던 직장을 때려치웠다.

그 당시 그녀에게는 7년을 사귄 남자친구가 있었다. 30대 초반의 나이, 긴 연애 기간, 안정기에 접어든 직장생활. 그는 자연스레 그녀와의 결혼을 생각하고 있었다. 고심 끝에 그녀에게 '결혼하고 싶다'는 말을 꺼내려던 그는 되려 그녀로부터 '일을 그만두고 1년 정도 배낭여행을 떠나겠다'는 말을 들었다.


결혼을 생각하는 사람이 혼자서 그것도 장기여행을 떠나겠다니.. '나는 생각하지 않는 거냐'며 화를 내거나 '미쳤냐'고 뜯어말리고도 남을 이야기였다. 그러나 그는 '우리 헤어지자'거나 '나야? 여행이야?'라는 좌절스런 말 대신 '니가 하고 싶은 거 다 해보라'는 말을 멋지게 날렸다.


그렇게 남자친구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은 그 철없는 미친 여자는 난생처음 커다란 배낭을 둘러메고 여행길에 올랐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6개월이 지났다. 이 나라 저 나라를 넘나들며 비행기를 시외버스 타듯이 타고 돌아다니던 그녀가 돌아왔다. 예정보다 빨리 돌아온 그녀를 맞이하며 그는 '여행을 하더니 이제야 철이 좀 들었구나' 싶었다. 그는 무사히 돌아온 그녀가 그저 반가웠고 무엇보다 일찍 돌아와 준 그녀에게 고마웠다.


그녀가 돌아온 연유는 이러했다. 혼자서 이곳저곳 다니다 보니 자꾸만 한국에 두고 온 그가 생각났단다. 좋은 곳을 가고, 맛난 것을 먹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 보면 문득문득 그녀가 맡기고 간 고양이를 돌보며 그녀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그가 눈에 밟히곤 했다고.


어디를 가서 무엇을 해도 더 이상 기쁘지 않았던 그녀는 유럽으로 향하는 비행기를 돌려 한국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그녀는 다짐했다. 그와 결혼을 해야겠다고.


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그녀는 그에게 결혼을 하자고 했다.



'여자의 꿈을 응원해준 남자,
그 꿈을 이룬 후 돌아온 여자,
둘의 웨딩마치 그리고 꿈같은 허니문..'




그들의 드라마가 이렇게 흘러갔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그녀는 다시 말하지만 꽂.미.녀였다. 여전히 여행에 꽂힌 채 미쳐있었던 그녀는 결혼 계획을 세우기도 전에 신혼여행 계획부터 들이밀며 그에게 함께 세계일주를 떠나자고 했다.


이미 오랜 시간 그녀의 엉뚱한 짓에 단련되어 온 그였기에 그녀의 제안에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다만 그렇게 갑자기 해치우기엔 결혼이라는 것이 호락호락한 문제가 아니었다. 날짜, 결혼식장, 신혼집, 혼수, 예단과 예물까지.. 결혼을 하기 위해 고려해야 할 수많은 것들을 놓고 고민하는 그에게 그녀는 자신의 생각을 들려주었다.


"전체 여행일자 및 경로와 6 대륙의 여행 최적기를 고려했을 때 결혼식은 봄 즈음에 하고, 여행경비를 마련해야 하니 예단 예물은 생략하자. 결혼식은 여행 발표회를 겸해서 하면 되고, 혼수나 신혼집은 여행에서 돌아온 뒤에 구하면 되겠네."


마치 답을 알고 있는 수학 문제를 풀듯 모든 것을 뚝딱 정리한 그녀는 결혼이 마치 신혼여행을 떠나기 위한 준비물인 것 마냥 모든 것을 신혼여행을 중심으로 결론지었다.


그는 곧.미.남 이 되었다.

그녀의 결혼 계획을 들은 남자는 2가지를 고민했다. '이 여자와 결혼하는 게 맞는가' 그리고 '이 여행을 떠나는 게 맞는가'. 20대에 가장 빛나는 시간 혹은 가장 볼품없고 초라한 시기를 함께 해왔기에 지금 와서 헤어진다는 건 생각할 수 없었다. 이 여자가 아니면 안 된다는 결론에 이른 그는 그녀와 결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와 결혼하기 위해서는 이 여행을 떠나야 했다. 직장생활 3년 차 이제 한창 일을 배우고 자리를 잡아가는 중이었던 그가 장기 여행을 떠난다는 것은 곧 직장을 그만둬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는 결혼과 동시에 퇴사에 관해 고민하며 여러 날을 보내었다.


물론 회사를 다니면서 그는 줄곧 퇴사에 관해(더 정확히 말하면 더 나은 환경으로의 이직에 관해) 생각해오곤 했었다. 그러나 그 시기가 이렇게 빨리, 그리고 갑자기 오게 될 줄은 몰랐다. 하지만 결혼과 퇴사에 관해 생각을 거듭할수록 막연하게만 머물러 있던 생각이 더욱 뚜렷해졌고, 만약 이직을 한다면 지금이 적기이자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직장을 그만둘 생각에 괜스레 불안해질 때면 '과연 이 결정이 현명한 걸까' 망설여지기도 했다. 그러나 죽을 때까지 일할 텐데.. 퇴사와 이직 사이에 한 번쯤 쉬어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데까지 생각이 이르자 그는 이 여행을 떠나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그는 그렇게 꽂.미.녀의 곁으로 가 기꺼이 곧(따라). 미(쳐버린). 남(자)가 되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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