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몸이 증거입니다

해외에서 재판하기 3

2주에 걸쳐 변호사가 요구하는 모든 서류를 준비했다. 그리고 우리 부부의 이전 경제상황을 증명하는 문서와 현재 몸상태에 대한 국내 주치의의 소견서, 지금껏 한국과 터키 병원에서 지불한 모든 비용에 대한 자료들을 꼼꼼히 모아 국제우편으로 부쳤다.


내가 보낸 서류들을 받은 변호사는 100% 타인의 과실로 인한 사고인 만큼 모든 과정이 1년 이내로 끝날 수 있을 거라고 했다. 그리고 덧붙여 터키에 비해 한국에서의 급여 수준이 높기 때문에 사고로 인한 휴업 보상금이 많을 거라며 불안해하는 우리를 안심시켰다.


그때까지만 해도 모든 것들이 순탄하게 흘러가는 듯했다. 나는 엄연하게 일방적으로 사고를 당한 피해자였고, 으레 피해자에게는 피해에 대한 합당한 보상과 적절한 조치들이 주어질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제나 그랬듯 세상은 녹록지 않았고 나는 핑크빛 세상 대신 희끄무레하게 낀 안개를 맞닥뜨렸다.




서류를 보낸 날로부터 2주 뒤, 변호사는 터키 병원에서 받은 검진 결과가 너무 좋게(?) 나와서 재판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줄 거라고 했다. 의학적인 소견에 따르면 남편의 경우 5% 정도에 후유장애가 있지만 나는 0%로 산정된다며, 이럴 경우 큰 보상금을 기대할 수 없다고 했다. 만일 재판이 이대로 진행된다면 남편은 약간의 돈을 받을 수 있었지만 나의 경우 한푼도 받지 못하게 될 가능성이 컸다.


의학적으로 후유장애의 정도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가동 범위에 제한이 있어야 했지만, 나의 부상 부위는 관절 부가 아니어서 주관적 호소만으로는 후유장애여부를 판단할 수가 없다고 했다. 남편에 비해 나의 부상 정도나 통증이 아무리 심하다고 해도 의학적 진단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할 경우 그것을 증명할 방법이 없었다.


더군다나 사고로 인한 직접적인 손해(병원비, 소송비)는 물론, 사고가 없었다면 얻을 수 있었을 간접적인 손해(주로 임금)와 위자료까지 모든 것을 보장하는 한국의 법체계와는 달리, 터키 법의 경우 사고로 인한 후유장애가 없을 시 직접 손해, 간접손해, 위자료 등의 보상금 중 어떤 것도 받지 못하게 되어있다고 했다. 그게 말이 되냐며 변호사에게 따져보았지만 그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은 '법이 그렇다'는 말 뿐이었다.


어처구니없는 결과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어떻게 문제가 없어서 아무것도 보상을 받을 수 없다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법이 그렇다는 말을 할 수 있지? 나는 여전히 하루 종일 통증과 싸우고, 내 몸에 이렇게 큰 흉터가 남아있는데. 아직도 차를 탈 때마다 공포에 시달리고 망한 신혼여행을 생각할 때마다 울화가 치미는데 내가 멀쩡해서 보상을 받을 수 없다니..' 그의 말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 억울한 마음에 눈물이 났다.


상대방의 고의가 아닌 예상치 못한 사고로 인한 피해임에도, 누군가의 잘못을 처벌할 목적이 아닌 나의 피해를 보상받기 위한 것임에도 이렇게 억울하고 화가 나고 세상이 미운데, 만약 누군가가 마음먹고 고의로 저지른 일이거나, 범죄를 일으킨 가해자의 처벌이 마음대로 진행되지 않으면 얼마나 세상이 원망스럽고 화가 날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닌 싸움

나는 로스쿨에 다니는 동생에게 연락해 상황을 설명하고 현실적인 조언을 구했다. '후유장애가 없어서 미래에 노동능력 상실의 가능성이 없더라도, 과거에 사고로 인해 일하지 못했던 기간 동안의 보상은 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 만약 과거든 미래든 일하지 못한 것에 대한 보상을 못 해준다면, 적어도 사고로 인해 발생한 직접적인 손해에 대한 보상(병원비, 비행기 값 등)은 이뤄져야 하는 거 아닌가?'


한참 분노 섞인 나의 한탄을 듣던 동생은 추가적 후유장애 판정을 받기 위해 다른 병원에 가서 재정밀 검사를 받아 본 이후에 계속해서 싸움을 이어가라고 했다. 그리고 그 결과가 나온 뒤 추가로 재판 결과에 불복하여 상소를 할 것 인지, 적당한 선에서 보상금을 받고 케이스를 마무리할 것인지 판단해도 늦지 않다며 변호사 또한 케이스별로 돈을 받는 것이니 할 수 있는 한 끝까지 가보라고 했다.


문득 터키 병원에서 검진을 받을 때가 떠올랐다. 도와주는 친구들을 생각해서 '저는 괜찮아요'라며 웃으면서 젠틀하게 답했었는데, 이럴줄 알았다면 내 상황을 호소하며 미친척 똥을 싸면서 뒤구부렀어야 했다는 후회가 들었다.


지금의 상황을 바꾸기 위해 할 수 있는 2가지 방법이 있었지만 모두 쉽지 않았다. 다른 병원에서 재검사를 받으려 해도 코로나로 모든 병원이 닫혀 있었고, 재검사 결과가 확연하게 좋을 가능성 또한 희박했다.


만약 현재 재판 결과에 불복하여 재심으로 가게 된다면 2년 이상이 걸리는 긴 싸움이 될 것이고, 그 과정에서 재판이 있을 때마다 내가 터키로 불려 가게 될지도 모른다. 원하는 결과가 나올 때까지 얼마든지 재판을 이어갈 수는 있겠지만 아무도 그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장담할 수 없다.




그러나 포기할 수는 없다. 고작 얼마 간의 돈으로 모든 것이 해결이 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내 망쳐버린 신혼여행과 엉망이 되어버린 내 몸뚱이에 대해 최소한의 대가라도 있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비록 기약 없이 길고 지루한 싸움이 되겠지만, 이 싸움에서 내가 이길 수 있을지 끝끝내 굴복하게 될지 알 수 없지만 그럼에도 나는 싸우려고 한다.


내가 터키어를 공부해서 재판 결과의 부당함에 대해 직접 호소하고, 내 감정과 생각을 전달하기 위해 법정에 나서서 진술을 하는 수를 써서라도 나는 포기하지 않을 거다. 나의 이 싸움이 어떨 결과로 이어질지 아직 알 수 없지만, 적어도 후회나 아쉬움만으로 남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싸워보고 싶다.


여기 유일하고 명백한 증거인 내 몸이 싸워달라고 말하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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