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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재욱 May 30. 2022

앵두나무의 꽃말은 오직 한 사랑

 3층까지 자란 나뭇가지에 달린 손톱만 한 열매가 이른 햇빛에 반짝거렸다. 주방 작은 창문을 액자 삼아 붉디붉은 알갱이로 가득 찬 캔버스. 이스라지라는 앵두나무가 활짝 핀 장미처럼 수줍은 낯빛으로 알알이 물들었다. 견물생심이라던가. 나도 모르게 큼직한 검정 비닐봉지를 손에 들었다.

 

 세상 어디나 시작부터 앞선 환경이 있나 보다. 앵두나무도 그랬다. 이쪽에서는 3층이지만 앵두 쪽에서는 2층. 힘들이지 않고 3층까지 자란 이유다. 그런데도 그다지 부화가 치미지 않은 것은 애초 예상한 높이의 목표보다 손쉽게 손이 닿았다는 것이다. 까치발을 하고 두 팔을 뻗으며 앵두 열매를 봉지에 담기 시작했다. 금세 검은 봉지가 묵직해졌다.


 오직 한 사랑, 앵두나무의 꽃말이다. 집주인은 이미 떠났는데, 앵두나무 혼자 주렁주렁 열매를 달았다.

 3층에 사는 이웃은 창문 너머로 먹다 남은 음식 찌꺼기며 이런저런 쓰레기를 봉지째 앞집으로 던지곤 했다. 그 때문에 마당 곳곳에는 흰 봉지, 검정 봉지가 널브러졌고 낡은 기와를 얹은 단층 건물보다 너른 마당에는 풀이 무성했고 그 사이사이 하늘색 노루귀, 노란 민들레, 보라색 엉겅퀴 꽃이 뒤죽박죽 피어 있었다.



 재개발구역인 이곳은 사람들이 떠나는 중이다. 마을 인근에는 진작에 개발을 끝내고 솟은 이십여 층이 넘는 아파트가 병풍처럼 서 있고, 마을을 빙 둘러 공중 높이 걸린 현수막 아래를 지나는 사람들도 언제나 이곳에 공사가 시작될지 궁금한 눈치다. 하지만, 공사가 언제 시작될지는 쉽게 예측할 수가 없다. 법적 보호를 받을 수 있는 이주 기간을 훨씬 넘기고도 이사를 하지 않는 이들 때문인데, 재개발이란 것이 모든 이가 반기지도 않고, 갈 곳이 없는 어떤 주민에게는 재개발이란 사업이 영 내키지 않을뿐더러 내쫓기다시피 하는 현실임을 생각해보면 이사를 하지 않는다 하여 대놓고 타박할 수도 없는 실정이다. 하여튼 육백여 세대 중에 백여 세대가 아직 이곳에 남았고, 나는 그들이 이곳에서 안전하게 지내다가 무사하게 떠나도록 돕는 일을 하고 있다. - 이런 생각은 내 쪽에서고 저쪽에서는 어떤 판단을 내릴지 알 수 없다.     

 


 얼마 전 명도 강제집행이 있었다. 한마디로 재개발구역 내에서 이사 가지 않고 버티고 있던 영업권자를 쫓아내는 일이다. 업주는 죽어도 못 나가겠다며 가게 안에 가스통 두 개를 쇠사슬에 묶어두었다. 법원에서 나온 집행관과 노란 조끼를 입은 노무, 그러니까 영업장 안의 물건을 밖으로 꺼낼 인부들, 그리고 위아래 옷부터 신발까지 온통 검정으로 맞춘 튼튼해 보일 수밖에 없는 덩치 큰 젊은 사내들과 두어 명의 여성들이 가게를 에워쌌다. -여성까지도 전부 검은색이었다. 얼굴만 빼고는. 이들은 경비업체에서 동원된 경호원이고 법원과 계약이 되어있다.

 

 강제집행이 시작되고 얼마 안 돼서 사내는 차디찬 가스통 두 개만 남기고 가게 밖으로 쫓겨났다. 문을 연지 20년이 넘었다는 열 평 남짓의 자그마한 가게 안에서 끊이지 않고 물건들이 쏟아져 나왔다. 서너 시간이 지나갔고, 아무렇게나 마대자루에 담긴 물건들이 몇 대의 트럭에 실렸고, 드디어 가게 셔터문이 닫혔다.  그러고는 다시는 문이 열리지 않도록 쇠문 테두리에 엄지만 한 나사못으로 촘촘히 박았다.

 가게 주인은 이날 강제집행에 들어간 비용과 자신의 물건이 보관될 컨테이너 임대료를 지급해야 한다. 그런데도 그는 의외로 순순히 응했다. 어쩔 도리가 없었을까. 그의 표정은 담담했는데, 아직 재개발조합과 협의가 안 된 인근 업주들은 삼삼오오 모여 한숨을 내쉬었고, 진작에 이주를 끝내고 공사 시작을 기다리던 조합원들은 길 건너에서 팔짱을 낀 채 아무 말도 없었다.

 

 재개발조합이 쓰는 막대한 금액은 모두 빌린 돈이다. 공사가 늦어질수록 대출이자로 인한 조합의 빚이 늘어간다. 백여 명의 남겨진 이들은 갈 곳이 없어서 울고 오백여 명의 조합원들은 늘어가는 이자 돈이 걱정돼서 운다. - 악의적인 목적으로 이사, 영업보상을 이용하는 이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까지 생각할 여력이 내게는 없다.

 

 재개발, 재건축 사업은 공익사업이다. 다수를 위한 사업이란 것인데, 다수에 속한 이들도 소수에 속한 이들도 즐거운 얼굴은 아니다.

 


 앵두 열매를 한창 따다 보니 땀이 주룩 흘렀다. 아직 정오도 안 됐는데, 그늘이 생각났다. 어떤 때는 따스운 햇살만 찾았었지. 같은 해인데 말이지.


 앵두를 따다 말고 흠칫 뒤로 물러섰다. 손가락 한 마디쯤 되는 하얀 흔적 때문이었는데, 나무 잎사귀에 붙은 고치였다. 그 속에 든 것이 나방인지 나비인지 알 길이 없다. 다만, 주렁주렁 달린 앵두만큼이나 잎사귀마다 고치 집이 달린 걸 보니, 무엇이 들었든지 간에 깨어날 것 같다.

얼마쯤 지나야 봉지 가득한 앵두처럼 햇살에 잘 익은 생명이 태어날까?


 기왕이면 공사가 시작되기 전에 모두가 힘찬 날갯짓으로 훌훌 날아오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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