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럽고도 즐거운 요가 시간
나는 요가를 한다. 그런데, 내가 이 문장을 쓰면서도 조금은 죄스러운 이유는 그 횟수가 주 1회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요가를 즐겨하는 요기니분들에게는 감히 말도 못 꺼낼 것이다. 그냥 스트레칭을 한다고 적을까 하다 용기를 내 보았다.
내가 요가를 시작한 것은 경기와 서울을 오가는 출퇴근을 하기 시작하고 2달쯤 지났을 때였다. 한 차례 독한 감기를 앓고 난 후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서 일할 때야 체력이 부족해도 어느 정도 커버(?)가 되었으나, 이젠 상황이 달랐다. 아이가 아파서 쓸 연차는 있어도, 내가 아파서 쓸 연차는 없었으니 나는 살기 위해 운동을 해야 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내가 운동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아니, 이렇게 단정 짓기엔 좀 애매하다. 가기는 싫지만 그래도 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운동을 하러 가서 선생님의 가르침에 따라 움직이면 그 이후에 뿌듯한 마음이 든다는 건 잘 알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기분이나 느낌이 좋다는 것도 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운동 갈 준비를 하는 귀찮음’이 덮는 느낌이다.
이런 내가 어떻게 요가를 시작하게 되었을까. 그건 아주 우연한 기회였다. 나는 20대 시절, 여러 명이 단체로 듣는 요가 수업에서 안 되는 동작을 무리하게 하다 목을 심하게 다친 이후로는 ‘요가’를 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아이와의 산책길에 마치 숲 속에 있는 듯한 ‘요가원’을 하나 발견했던 것이다. 요가를 하는 공간이 통유리로 되어 있고, 그 창으로 잔디밭의 초록빛을 볼 수 있다니. 계속 눈길이 갔다.
어느 화창한 봄날, 나는 무작정 찾아가 어제까지 했던 사람처럼 다시 요가를 시작했다. 수련 마지막, 밖을 바라보며 명상을 하는 시간은 내 삶에 잠시나마 활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내 몸은 여전히 뻣뻣했고 내 동작은 선생님이 보여주시는 동작과 조금도 비슷하지 않았지만, 난 개의치 않기로 했다. 그저 ‘이 시간’을 내게 주는 선물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지난 1년, 나는 감히 주 1회뿐인 ‘이 시간’이 지쳐가는 나를 위로했다고 말하고 싶다. 남편의 갑작스러운 야근이 결정된 날에는 아이를 달고(?) 갔다가, 내가 운동을 하는 동안 퇴근한 남편이 요가원에서 아이를 데리고 가기도 했다. 나는 ‘주 1회’라는 작은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어떻게든 지키려 노력했다. 그 주에 요가를 다녀오면, 소소한 성취감이 들었다. 그런데, 왜 요가 시간을 늘리지 않았느냐고?
두 가지 마음인 것 같다. 주에 2일(!)이나 ‘나를 위한 시간’을 갖겠다며 아이와의 유일한 소통 시간인 저녁을 포기할 순 없다는 마음, 그리고 주에 하루라도 운동을 한다면 ‘안 한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라는 간사한 마음이 그것이다. 이제는 인정해야겠다. 나는 살기 위해 운동을 하는 사람이지, 운동을 좋아하진 않는구나.
마지막으로, 해당 요가원의 원장님께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다. 가장 저렴한 주 1회 회원권을 끊은 회원에게 계속 더 길고 비싼 회원권을 끊으라고 채찍질하지 않아 주셔서. 만약 그랬다면 소심한 나는 더 큰 목표가 무서워 도망쳤을지도 모르겠다.
원장님, 아이 핑계를 댔지만 사실은 제가 주 2회나 운동을 갈 깜냥이 안 돼요. 그래도 마음의 여유가 생기면 업그레이드할게요. 꼭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