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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연길모 Nov 30. 2022

엄마가 안 됐으면 큰일 날 뻔했다

임신, 그 놀라운 기적

"선생님, 냉동 난자 고려해야 하지 않아요?”

결혼 전 학습지 교사를 하던 내게 한 학생 엄마가 이런 어처구니없는 말을 진지하게 하는 게 아닌가. 그때 내 나이는 31살이었다. 어딜 가나 ‘노처녀’라는 소리를 징글징글하게 들었는데 ‘냉동 난자’ 제안까지 들으니 사는 게 구질구질하고 넌더리가 났다. 그러나 하늘은 무심하지 않았다. 그 후 1년 뒤 착하고 성실한 남자와 결혼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그땐 몰랐다. 결혼이란 또 다른 고난의 시작임을.

  결혼하면 애는 저절로 생기는 줄 알았는데 어찌 된 일인지 임신은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 깨 볶는 신혼 1년을 보냈음에도 아이가 생기지 않자 동네 산부인과에 가보았다. 의사는 내게 불임이라고 했다. ‘불임’의 뜻을 찾아보니 '정상적인 부부관계에도 불구하고 1년 이내에 임신에 도달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냉동 난자라도 해볼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 친구 중에 10년 만에 임신에 성공한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가 일반 산부인과보다는 불임 전문병원에 가야 임신 성공률을 높일 수 있다고 귀띔해 주었다. 나는 경기도에 많은 지점이 있는 난임 전문병원에 바로 예약했다.

  신랑과 함께 간 난임 전문병원은 낡고 음침했고 대기하고 있는 부부들은 말없이 핸드폰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간호사들은 사무적이었고 매몰찼다. 그러나 담당 의사의 상식을 뛰어넘는 환자 응대에 비하면 간호사의 불친절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 의사에겐 나는 한낱 임신 못 하는 포유류에 지나지 않는 것 같았다.

“이렇게 얇은 자궁벽으로 임신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하고 비아냥대는 게 아닌가.

임신이 안된다는 이유로 그런 모멸감을 견뎌야 한다니. 인종 차별, 종교 차별, 지역 차별 등 다양한 차별을 목격했지만, 임신이 되지 않아 겪어야 하는 차별에 분하고 억울했다. 어쩌겠는가? 나는 임신을 원하는 힘없는 ‘을’인 환자인 것을. 그러나 점점 그 병원에 갈 때마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 돼지가 된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아기를 기다리는 과정이 그토록 불행하다면 차라리 포기하고 싶었다. 결국, 몇 달 동안의 진료 끝에 그 병원에 다니는 것을 그만두었다.

  결혼 3년째 되던 어느 여름. 나도 꿈에 그리던 임신 테스트기의 두 줄을 보게 되었다. 그즈음엔 몸이 너무 차다는 한의사의 말에 옹기 항아리에 구멍을 뚫어 몸에 좋은 약재들을 태워 좌훈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태명을 항아리의 ‘아리’라고 짓고 우리 부부는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그런데 임신을 했음에도 몸의 변화가 하나도 없었다. 무지하게도 순한 아기여서 그런 줄 만 알고 임신 7, 8주 때 병원에 갔더니 ‘계류유산’이었다. 의사는 애초에 잘못된 아이여서 태어나도 힘들었을 것이고 오히려 계류 유산 후 임신확률이 높다고 위로했다.

  의사의 위로는 효과가 없었다. 오히려 계류유산 후 우울증이 찾아왔다. 마트만 가면 자랑스럽게 배 내밀며 다니는 임산부가 보기 싫어 집에서 울고만 있는 날들이 많았고, 감정 조절이 되지 않아 쉽게 사람들과 싸우기도 했다. 나뿐만 아니라 남편에게도 우울은 전염되어 우리는 더는 함께 웃지도, 전처럼 온갖 주제로 대화를 나누지도 않았다. 우리에겐 분위기 전환이 절실했다. 그해 크리스마스에 신랑의 제안으로 전남 장성군 축령산으로 향했다.

  오후 늦게 장성 편백 나무숲에 도착했다. 아무도 없는 눈 덮인 편백 나무숲을 걷노라니 마음속 응어리가 말랑말랑해지는 것 같았다. 저녁엔 가랑비를 맞으며 버스터미널 근처로 저녁을 먹으러 나갔다. 시골에, 그것도 크리스마스에 문 연 곳이 드물어 유일하게 불이 켜져 있는 생선구이 집으로 향했다.

 주인아주머니 한 분이 우리를 반겼는데 키가 자그마하고 몸집이 다부졌다. 아주머니는 우리에게 연인 사이인지 부부 사이인지, 왜 여기에 왔는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물어봤다. 안동 권씨라며 자신을 소개하던 아주머니에겐 묘한 힘이 느껴졌다. 그녀가 말을 시작하면 집중이 되고 내게 질문하면 꼼짝없이 대답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난임 이야기마저 처음 보는 사람에게 털어놓게 되었다.

“오해하지 말고 들어요. 조금만 내려가면 한약방이 있는데 거기서 약을 먹고 아들을 못 가진 사람이 없어. 우리 아들도 이번에 결혼했는데 며느리도 약을 먹고 있어요. 내가 전화해 볼 테니 한번 가볼래요?”

그때 시각은 저녁 8시가 다 되었고 내리던 비는 눈이 되어 내리고 있었다. 사실 우리 부부는 결혼 생활 동안 지겨울 정도로 한약을 먹었다. 더구나 평소대로라면 냉소적이고 논리적인 남편은 한약이 아들 낳게 해준다는 말을 믿을 리 만무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날 나뿐만 아니라 신랑까지도 주인아주머니에게 홀린 것인지 우리는 순순히 아주머니를 따라 눈을 맞으며 한약방으로 향했다.

  한약방은 이미 문을 닫은 뒤였지만 아주머니의 전화로 할머니 한 분이 우리를 맞으러 나와 있었다. 그 할머니는 한약방 안주인이었다. 아주머니는 가고 할머니를 따라서 안채로 들어갔다. 다리에 장애가 있는 한약방 할아버지는 안채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 우리 부부의 진맥을 한 뒤 한약방 할아버지 부부와 우리 부부 네 사람은 자연스럽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정신없이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10시가 넘고 있었다. 헤어지면서 한약방 할아버지는 자기 약을 먹으면 석 달 안에 임신이 될 테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숙소로 가는 길에 신랑은 할아버지의 말을 비웃었지만 나는 수없이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 것도 모자라 장성 한약방 할아버지의 말에 또 희망을 걸고 있었다.

  택배로 온 한약을 열심히 먹었지만 두 달이 되도록 임신 소식은 없었다. 나는 시험관을 결심하고 3월 첫 주에 수원에 있는 난임 전문병원에 예약했다. 축령산에서 좋은 기운을 받은 것이었을까, 아니면 시험관을 결심해서였을까 예전처럼 우울하거나 비참한 기분은 들지 않았다.    어느덧 2월 말 신랑 생일이 되었다. 며칠 전에 생리를 시작해야 날짜가 맞는데 생리가 늦어지고 있었다. 아무 기대 없이 임신 테스트기를 꺼내어 화장실로 향했다. 결과는 두 줄이었다! 보고 또 봐도 믿을 수 없는 선명한 두 줄이었다. 마음을 진정하고 신랑이 퇴근하기를 기다렸다. 신랑이 신발도 벗기 전에 달려가 생일 선물로 그 귀한 두 줄 임신 테스트기를 건네주었다. 신랑은 흐느끼며 나를 안아주었다. 이번에도 소란을 피우면 귀한 아기가 날아갈까 두려워 우리는 그 누구에게도 임신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나날이 변화하는 내 몸 상태를 확인하며 8주째 되던 날 산부인과에 갔다. 아기집이 보이고 아기의 힘찬 심장 소리를 들었다!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내 자궁으로는 임신할 수 없다고 했는데 어떻게 아기 천사가 와서 자리 잡았을까! 나도 엄마가 되는 것이다!     




  결혼 전 나는 계획을 촘촘하게 세우고 그것을 달성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불가능이란 루저들의 변명일 뿐 노력하면 안 되는 것은 없다고 믿었다. 그러나 임신은 그런 내 믿음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다. 사랑하는 남편을 닮은 예쁜 아기를 낳고 싶었지만 노력해도 안 되는 것은 있었다. 사는 것이 다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받아들이니 안개가 걷히고 내 길이 보였다. 아이를 갖기 위해 결혼한 게 아니라 신랑을 사랑해서 결혼했고 아이는 하늘이 주시면 감사히 받는 선물이며 안 주신데도 신랑과 사랑하며 살아가야 할 나의 길 말이다.

  결혼할 당시 나의 몸과 마음의 상태는 처참했다. 끼니를 건너뛰는 것은 다반사였고 하루가 멀다고 동료들과 자극적인 음식과 술로 밤을 지새웠으니 내 몸은 독에 찌들고 피곤함에 지쳐있었다. 심리적 문제도 컸다. 결혼은 했지만 내 안에는 나 자신 외에 다른 존재가 들어올 만큼의 자리는 없었다. 일에 대한 욕심으로 동료들과 다툼이 잦았고 시기, 질투와 험담으로 마음은 가뭄의 논바닥과 같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상태로 임신을 꿈꿨다는 것이 기가 막혀 웃음이 나온다.

  임신을 위해 노력한 3년은 온전히 내 몸과 정신을 돌본 귀한 시간이었다. 내 삶은 규칙적인 시간에 따라 고요히 흘러갔고 독서와 명상으로 지난날에 대한 반성, 감사와 사랑이 조금씩 싹트기 시작했다. 그해 나는 11월 13일 3.3kg의 손가락 열 개, 발가락 열 개의 건강한 딸아이를 낳았다.

  어느덧 아이는 정수리 냄새가 진동하는 13살 사춘기 한복판을 지나고 있다. 아이를 생각하면 더 운동하게 되고, 더 공부하게 되고, 더 참게 된다. 엄마가 되지 않았다면 나는 사람들이 견딜 수 없는 괴물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쥐뿔도 모르면서 자기 잘난 맛에 목소리만 큰 사람 말이다. 이제 엄마라는 소원은 이뤘으니 남은 내 바람은 고운 할머니가 되는 것이다. 자식과 손자가 오기만 기다리는 냄새 나는 할머니가 아니라 자식이 예약해야 만날 수 있는 흰머리 휘날리며 이리저리 바쁜 할머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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