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게 꼭 바다를 헤엄치는 것 같아서

이제 그만 깊이 잠영하고 싶다

by 김상혁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주지 않았던 그 사람들.
나는 아직도 그 사람들에 속해있다.
나 또한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주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젠장할….

이제 더 이상 이 불안감에 내 인생을 맡기지 않겠노라고 연휴 내내 다짐했다.


어쩜 좋을까, 난 앞으로 글로 쓸 ‘이 말’을 실제로 하지 못한다. 그리고 사실 ‘이 말’을 하고 싶으면서, ‘이 말’을 하지 못한 내가 뭔가 좀 더 잘했으면 좋았을텐데. 뭔가 좀 더 착했으면 좋았을텐데 하고 꼭 내게 가혹하게 군다.


죄책감,


더 잘했으면 좋았을텐데 하는 마음은 내가 속 마음을 꽁꽁 숨기지 못하고 아슬아슬하게 잘못한 실수에 대한 가책이 아니라, 차라리 속마음을 꽁꽁 숨기고 있는 비겁한 나 자신에 대한 가책일 수 있겠다. 그 속마음대로 내 인생을 사는 두려움을 감수하느니, 차라리 더 잘했으면 좋았을텐데 애쓰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죄책감은 아무리 더 노력해도 빠져나올 수 없는 늪이다. 더 노력하는 수면 위가 아니라 저 깊은 심해 속에 ‘죄라고 생각하는’ 나의 속마음은 언제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글쓰기란 아마 그 깊은 심해 속에 있는 것을 끄집어내는 과정이리라.



어떻게 사람들이 그렇게 아무렇지 않을 수 있어요?

어떻게 마지막 순간까지 그렇게 가식적일 수 있죠?

정말 앞뒤가 다른 인간들, 이제 정말 지치네요.

그 시간들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던거네요.



사람이 좀 아무렇지 않을 수 있고. 사람이 좀 가식적일 수 있고. 앞 뒤가 다른게 인간이고, 인생은 결국 흘러가는 것이기에. ‘이 말’을 나는 내뱉지 않았지만,


아무렇지 않은 것에 대해. 진실하지 않음에 대해. 앞과 뒤가 다름에 대해. 깊이 잠겨있는 진실의 여부에 대해 깊이 같이 고민해줬다면, 내가 그렇게까지 답답함을 느끼진 않았을 것 같다.


한 순간에 나는 내 진실에서 훅 하고 멀어져버렸다. 다시 표면의 파도를 헤치는 것에만 몰두하는 그 불안한 나 자신이 보였다. 한 번도 잠수해서 깊이 잠영해볼 생각은 해보지 못한 그 나 자신. 나는 삶이란게 바다라고 생각했나보다. 계속 헤엄치지 않으면 물에 잠겨 죽어버리는게 삶이라고 생각했기에 이런 비유가 떠오르는걸까. 그 비유를 수정하기 위해 알고보니 심해 속에 아틀란티스가 있다거나, 알고보니 수중 센터가 있다거나 하는 생각들을 해보지만, 별 수가 보이지 않는다. 이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선 삶을 바다라고 생각하는 나의 생각에서 아예 벗어날 필요가 있는 것 아닌가? 그 상상을 버려야 비로소 깊이 잠영할 수 있겠다.


진실은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다. 그래서 진실을 찾는 이들은 고통과 처참함에 더 가까이 가기도 하지만, 그 또한 진실과 거리가 멀다. 이 생각에는 내 나름의 자기와 타인에 대한 균형감각이 서려있다. 내가 겪어온 고통과 힘든 과정들은 모두 나의 진실을 찾는 데 도움을 줬다. 힘든 고통을 온 몸으로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살아있는 나는 그렇게 생각하곤 한다. 그게 꽤 맞아보인다. 하지만 그걸 내 주변의 타인한테 그대로 말할 순 없다. 너도 나와 같은 고통을 똑같이 겪으라고 말할 순 없고, 혹은 미래의 나에게 그러니 계속 똑같은 고통을 겪으라고 말할 수도 없다.


깊이 잠영해서 바다라는 상상에서 벗어나서 사는 삶이 현재의 자기. 속 마음의 자기.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똑바로 직시하고 느끼는 삶이다. 내가 어제부터 다시 느끼기 시작한 불안. 그래서 어디라도 머물 곳을 찾아 정신 없이 헤매기 시작하는 그런 삶으로부터는 이제 더는 희망을 볼 수 없을 것 같다. 이걸 알기라도 하는게 다행이지. 어휴. 지금 이 불안은 그냥 흘려보내지리라. 이 불안에 내 몸을 맡겨버리지 말고, 인생을 걸어버리지 말자. 인생은 그 불안 이후에도 펼쳐진다. 과거의 고통을 바라본 나의 희망적 태도가 그것을 늘 증명했다. 하지만 희망을 그냥 미래에 내걸어버리지 말자. 과감히 끊어내보자. 고통 하나가 오는게 두려워 다른 고통을 또 만들지 말고 그 너머에 있는 것을 보기 위해서라도 그냥 가만히 기다려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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