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함에 대한 생각

by 김상혁


나를 차로 태워다 주는 어떤 분이 운전을 하다 과속방지턱 앞에서 감속을 못해 차가 크게 덜컹였다.

그 분은 과속방지턱을 밟기도 전부터 미리

“아 죄송합니다!!!!” 라 말한다.


나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대답한다.

“에이 죽지만 않으면 되죠. 죄송할 것 없어요”


이 말이 그렇게 무서운 말일 줄은 몰랐다.



미안함은 일종의 사람과 사람사이를 엮는 끈과 같다.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은 내가 그 관계의 장 안에 계속 거하겠다는 일종의 표시다. 그러나 더 슬프고 아픈 것은, 미안하다고 말할 때는 상대의 자유를 오롯이 기다리고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잘못을 해놓고 미안하다고 말할 때, 상대는 나를 때릴 수도 있고, 나를 욕할 수도 있고, 나의 모든 것을 빼앗아갈 수도 있고, 혹은 미안하다고 말해줘서 고맙다라고, 나의 미안함을 받아줄 수도 있다. 그리고 나를 떠날 수도 있다. 그런데 누군가가 내가 미안하다고 말했는데 “죽지만 않으면 되죠. 죄송할 것 없어요”라고 말한다면? 어쩌면 ‘너가 나를 죽이지는 않았으니 나 또한 너를 죽이는 것을 제외한 모든 것을 할 자유를 누릴테니 죄송해할 필요 없다.’ 라는 의미를 크게는 함축한다. 따라서 그 정도의 자유를 “미안하다”는 말을 함으로써 상대에게 허락할 마음이 아니라면, 미안하다고 말하기 이전에 마음 속에 있는 걸 다 꺼내어 쏟아내는 것이 차라리 나을 것이다.

미안하고 죄송하다고 말할 것이라면, 진실로 상대의 자유를 기다리고 감당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한 편으로, “죄송할 필요 없어요” 라는 말은 “미안하다”라고 말함으로써 관계 속에 끈을 맺으려는 사람에게 자유를 되돌려주는 것이기도 하다. 따뜻하면서도 차가운 말이다. “미안하다”는 말을 밥먹듯이 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꼭 그런 사람들을 보면 하는 생각이 있는데, ‘저 사람은 지금 내가 여기서 화내도 받아줄 생각으로 미안하다고 말하는건가?’ 이 생각은 나를 향해서 반대로도 해본다. ‘내가 지금 미안하다고 하는게 저 사람이 화내도 할 말 없을 상황이어서 하는걸까?’ “미안하다”라고 말하는건 상대에게 자유를 선물하는 말이 되어야 할텐데, 오히려 “미안하다”는 말을 자기 자신의 자유를 보호하기 위한 수단으로 삼는 경우가 종종 있다. 혹은 ‘내가 미안하다고 말했으니 너와 나의 끈은 여전히 이어져있어야 할거야’ 라는 확정적인 안정감을 보장하려고 “미안하다” 말하곤 한다. 차를 운전하다가 과속방지턱을 덜컹 밟는 정도의 귀여운 잘못이 아닌 심각한 잘못을 계속 해놓고 “미안하다”를 남발하는 사람은, 오히려 자신이 교묘하게 상대에게서 자유를 빼앗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진지하게 숙고해보아야 한다.


그래서 오히려 아예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는 경우도 더러 있다. 나는 심각한 잘못을 남발해놓고 “미안하다”는 말을 그만큼 남발하는 것보단 차라리 이 경우가 낫다고 생각한다. 감정은 어쨌든 남아 입으로 쉽게 씻어내려 하기보단 행동으로 씻어내는게 차라리 낫기 때문이다. 또한 교묘한 눈속임으로 내가 자유를 주는 척 하면서 오히려 자유를 빼앗는 것보다 차라리 함구할 자유, 스스로를 보존할 자유를 자신 스스로가 감당하는 것이 더 낫다. 그리고 정말 내게 죽어선 안될정도로 소중한 사람에게는 오히려 미안하다는 말을 하기가 쉽지 않다. “미안하다”고 말해서 상대에게 내게서 떠나는 것까지 선택할 자유를 주는 것이 죽기보다 싫은 마음일거다. 혹은 죽어선 안될 정도로 소중한 사람과 서로 이미 빼앗고 빼앗겨버린 자유를 의식하여 아직 남아있는 자유라도 그대로 인정받고 싶은 절박한 마음일 수도 있다. 이 경우 “미안하다”라고 말하는 순간 바로 울어버릴게 무서워 그 말을 하지 못하기도 한다.


나를 이미 떠나가고, 지나가 버린 사람에게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은 경우도 있다. 이를 보통 ‘미련’이라고 부르는데, 다시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관계가 다 지나간 후에 남아버린 감정은 결코 어느 누구 한쪽만의 몫이 아니기 때문이다. 미련한 사람은 관계 안에서도 계속 미련하게 자기 자유를 상대에게 내주고. 그렇게 자유가 팽만해진 상대가 그 미련한 사람을 떠나갔을 때, 다 내줘버린 자유를 되돌려 받지 못하고 관계가 종료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를 이미 떠나가고, 지나가 버린 사람에게 “미안하다”고 계속 말하고 싶은 경우는, 오히려 그 사람을 잊지 못하는 상태가 아니라 그 사람으로부터 마땅히 받았어야 할 자유를 되돌려받고 싶은 마음일 수 있다. 그 사람에게서 자유롭고 싶어서, 그 사람에게 미련을 갖기도 하는 것 같다.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자유를 내어주고, 다른 사람에게 자유를 돌려받는다는게 정말 가능한 일인가? 모든 것이 결국 다 나의 선택이기 때문이다.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도 내가 선택한 일이고. 미안함을 느끼는 것도 나의 감정이다. 그렇기 때문에 미안함을 통해 나와 상대 사이에 주고받아지는 자유만을 생각할게 아니라, 미안함을 가질 자유, 미안함을 말할 자유 또한 고려해보아야 한다. 나의 미안함은 내꺼다. 누가 나한테 미안해하지 말라고 말할 권리도 없고, 미안해하라고 말할 권리 또한 없다. “죽지만 않으면 되죠. 죄송해할 필요 없어요” 개뿔, 그냥 내가 너한테 미안함을 느낀거지 필요해서 느낀게 아니다. 미안함을 갖고 미안함을 말하는게 관계의 장 안으로 발을 들이는 적극적 행위라면,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미안함에 대응하는 최고의 방법은 미안함으로 되갚는 것이다.

“아유, 제가 괜히 정신뺏어서..저도 죄송합니다”


미안함을 전적으로 내가 선택하는 감정, 그리고 행위라고 바라볼 때, 우리는 그 어느 것도, 어느 누구에게도 되돌려받을 것이 없는 종류의 미안함을 마주하게 된다.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을 떠나버린 존재를 향한 미안함이다. “죽지만 않으면 되죠. 죄송할 것 없어요” 라는 말을 할 수도 없는 존재들을 향한 미안함. 내가 충분히 미안해하지 않고, 내가 충분히 죄송해하지 않아 죽어버린 것 같이 느껴지는 존재들을 향한 미안함. “미안하다” 고 말해도 내가 내어줄 자유도, 교묘하게 다시 돌려받을 자유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롯이 내가 “미안하다”고 말하고 “미안하다”고 느끼는 자유만이 존재한다. 너와 나의 관계의 장이라는게 더 이상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지만, 여전히 어쩔 수 없이 미안함을 홀로 남아 느낀다. 그 어쩔수 없는 미안함을 향해 “그런 마음 가질 필요 없어”라고 말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 엄숙함으로 존중할 수밖에 없는 미안함이다. 자신 스스로 미안해할 자유를 충분히 누리고, 충분히 자각하고, 충분히 흘려 보내야만 비로소 자유로워질 수 있는 미안함이다.


어쩌면 진정 순수한 미안한 감정은 살아있는 이에게는 느낄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나쓰메소세키가 쓴 소설 ‘마음’의 한 구절이 이 사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예전에 그 사람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는 기억이 이번에는 그 사람 머리 위에 발을 올리게 하는 거라네. 나는 미래의 모욕을 받지 않기 위해서 지금의 존경을 물리치고 싶은거지. 난 지금보다 한층 외로울 미래의 나를 견디는 대신에 외로운 지금의 나를 견디고 싶은거야. 자유와 독립과 자기 자신으로 충만한 현대에 태어난 우리는 그 대가로 모두 이 외로움을 맛봐야 하는 거겠지.”


미안함은 이젠 더 이상 볼 수 없는 존재들에게만,비로소 순수하게 느끼게 ‘되는’ 감정.


이 미안함에 대한 생각 끝에, 사이코패스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사람을 죽이고도, 사람이 죽은걸 보고도 아무것도 못느끼는 성격적 장애. 사이코패스의 면모를 더더욱 장려하는 이 사회. 미안함이 자유롭게 숨 쉴 공간이 점점 더 쪼그라드는 세상. 자신이 더 자유롭기 위해, 나에게 나를 가두려는 미안함만을 계속 강요하는 누군가들. 미안함은 죄가 없다.



“죽지만 않으면 되죠. 죄송할 것 없어요”


아니아니. 미안함이라는 감정을 특권과도 같은 자유로 옮길 궁리를 해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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