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꿈을 끌어 안아주겠다는 선명한 삶의 목적이 나를 강제하기 시작한다.
세계여행은 내게 일종의 장치 같다는 생각을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세계여행이 내 삶의 전부가 될 수는 없으니까. 솔직히 내년에 세계를 여행한다고 해서 그게 엄청 재밌을거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새로운 곳에 갔다는 느낌도 하루 이틀이지. 결국 각 지역에서 지내는 3주,4주는 아마 한국에서와 별반 다를 것 없는 일상일거다. 다만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아무도 나를 모르는 환경 속에서 있어보는 연습을 6번 정도 하는 거지. 근데 어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라. 나 지금 여기서도 그런 여행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서, 새로운 이웃을 만나고, 내 삶을 새로운 각도에서 관찰하면서, 새롭게 그 삶을 펼쳐 보이고 있잖아? 근데 여기서 내가 아쉬운 건 내 또래가 없다는 것.
근데 내 마음 속 깊이 그런 생각이 있다. 내 또래 중에 나와 통하는 사람이 있기나 한가? 그런 생각도 있다. 내 인생은 거꾸로 사는 인생같다. 내가 최종적으로 달성해야 하는 것은 내 또래 친구들처럼 야망있게 뭔가를 성취하는 삶이다. 하지만 그걸 하기 이전에 행복도 깨달아야 하고. 사랑도 발견해야하고. 뭔가 남들은 달리면서 살다가 뒤늦게 깨닫는 것들을 나는 이런 고민 저런 고민에 치여 살았다보니 더 일찍 깨닫고. 그 대신 더 늦게 달리게 되는 삶을 사는건가? 그런 생각을 자주 한다. 그래서 내 또래 사람들을 그냥 내가 마치 다 훤히 들여다보는 것처럼 관찰(실은 머리 속으로 생각)했을 때, 우월감을 향해 달리는 사람들은 그 우월감이 싫어서 안맞고. 우월감을 향해 달리기를 포기한 사람들은 그 열등감이 싫어서 안맞고.
소속감이 없다. 가토다이조의 -비교하지않는 연습-이라는 책에서 우월감과 열등감에 시달리는 건 소속감이 없는 문제라고 했다. 근데 난 그 문제랑은 조금 거리가 있는 것 같다. 그렇다고 내가 내 열등감을 무시하거나 해소하려고, 혹은 우월감을 계속 유지하려고 살진 않으니까. 스캇 펙은 자신의 책에서 심리적으로 성장한 사람, 즉 사려깊어진 사람은 필연적인 고독을 겪는다고 했다. 존재의 성장을 나눌 존재가 점점 더 적어지기 때문이다. 나는 현재의 내 모습을 후자라고 진단하지만. 실은 객관적인 조건 하에서는 내 삶은 한국 평균 또래 누가 보더래도 피할 조건인 것 같아서 전자로 떨어지기 아주 쉬운 상황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나는 그걸 적극적으로 계속 모면하려하는거지.
어찌보면 세계여행이라는 장치로 나는 그런 나의 객관적 조건들을 아예 떼어내려는 시도. 애초에 사회적으로 고립되어있고. 내가 정말로 마음과 내 생각을 나눌 집단과 소속이 없다면. 더 과감하게 사회적 죽음을 기획하는 걸수도 있다. 나는 사회적 죽음은 진짜 죽음이 아니라고 생각하는게. 인간의 사회적 본능은 사회적 죽음 이후에도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나는 이미 광천에서, 작년에 서울 또래들에 대한 환멸감을 확 느끼고선, 그 때 사회적 죽음을 이미 시작하면서 새로운 사회적 관계들을 나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형성했는지도. 당연히 기존의 친구들이 광천에 오고 서울에서 만났을 때 나는 더 나답고 즐겁지만. '평온하다'의 관점에서는 이제 광천에서의 사람들과의 약간 당연히 주고, 당연히 받고. 그렇게 서로를 존재의 힘을 격려하거나 발휘하는 것 외에는 잘 건드리지 않는 관계가 내게 더 익숙해졌다.
따라서 세계여행을 꿈으로 갖고 있는 나는 여전히 '사회적 관계'라는 외적 틀에서 자유롭지 않다고 볼 수 있다. 진정한 나를 발견 했다기 보다. 나를 둘러싼 외적 환경들을 한 번 탈탈 털어내는 작업이다. 물론 그 탈탈 털어내는 것에 아주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부모님의 아주 작은 실말 같은 기대도. '저는 이제 정말 제 좆대로 살겁니다! 엄마가 죽을 것 같이 불안해해도 어쩔 수 없어요. 그건 엄마의 불안이니까. 아빠가 좀 외로워도 괜찮아요. 아빠 볼 사람 많잖아요'
그러나 세계여행이라는 사회적 죽음이라는 장치 안에서, 나는 나를 발견한다. 그냥 딱 상상해보았을 때도 그렇다. 내가 지금의 사회적 관계에서 또 한 번 벗어나. 완전 새로운 사람들과 또 다시 관계를 형성했을 때. 예를 들면 남미에서 한국 사람들과는 완전 다른 방식으로 인생의 즐거움과 행복에 너그러운 사람과 관계를 맺거나. 아예 호주로 건너가 유학생활하고 있는 친구와 깊이 대화를 나누고. 뉴질랜드의 자연에서 트레킹하는 어떤 사람과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며 차를 마신다면. 인도의 리시케시에서 요가하고 명상하는 사람들과 기타치며 신나는 시간을 보낸다면. 그 안에서 내가 자꾸 한국에서의 불안감, 죄책감, 수치심들이라는 망령들을 자꾸 자꾸 물리치고, 자꾸자꾸 그냥 지나치게 했을 때. 당연히 나는 그 속에서 내가 그래도 계속 무엇을 하고 있는지. 그래도 계속 어떤 꿈을 꾸는 사람인지를 명확히 알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세계여행을 마음 먹은 지금 이 순간부터도 나는 나를 발견한다. 내 안에 오물처럼 묻혀있는 덩어리를 빼어내서 내 팔에 들고 있는 것과 같다. 그걸 유심히 살펴본다. 세계여행이라는 이름으로 붙여진 내 삶의 꿈. 무게. 나는 이제 세계여행이 나의 삶이 될 수 없다는걸 알고 있기에. 그것이 내 삶에 미친 영향들을 본다. 아, 이 꿈 때문에 내가 그렇게 강박적으로 언어를 공부했구나. 아, 이 꿈 때문에 나는 계속 외국으로 대학원을 특별히 하고싶은 공부도 없었으면서 가고 싶어했구나 같은. 그러면서, 밑을 내려다보면서 그 오물 덩어리 밑에 있는 꿈을 본다. 영상을 만들어 이야기를 하는 일. 아. 내 첫 번째 꿈은 브이로그를 만들어 내 이야기를 하는 거였지. 아. 난 중학교때 간절하게 가수가 되고 싶어했지. 내 목소리를 내고 싶어했지. 하지만 그 꿈은 무참히 고등학교 때 아빠에 의해 좌절 되었었지. 그리고 난 공부를 시작했지.
벌렁이는 내 꿈이 드러난다. 세계여행도 사실, 그 꿈의 수줍음을 가리기 위한 치장에 불과했다. 하지만 치장에 불과했던 그 꿈을 모두 해치워 버려야한다. 그래야 더 가벼운 마음으로 숨어서 벌렁이고 있던 내 원래의 꿈을 닦고, 들어올릴 수 있을테니까. 그리고 내가 세계여행을 하고싶었던 이유도 결국 더 다양한 것들을 보고 경험하며 영상을 만들고 싶어서라는 것도 깨닫는다. 그럼 세계여행을 하기로 결심한 지금부터, 나는 그 벌렁이는 마음으로 하루하루 영상을 만들어 나가야 하는구나. 더 이상 무게감에 짖눌리지말고, 벌렁이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더러운 것들을 피하지 말고. 그렇게 밤에 눈을 감을 때부터 아침에 눈을 뜰 때까지. 그 꿈을 끌어 안아주겠다는 선명한 삶의 목적이 나를 강제하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