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오늘까지만
세상 모든 것들에 대한 수다 - 유혹
저녁 8시, 퇴근길. 정지 신호의 강렬한 빨강을 응시하며 횡단보도 앞에 서 있다. 이 횡단보도를 건너서 오른쪽으로 가면 곧장 집으로 가게 되고 왼쪽으로 가면 대형마트를 비롯한 갖가지 먹거리 프랜차이즈들이 즐비한 번화가가 나온다. 출근길에 이 횡단보도를 건널 땐 분명 오늘만은 옆길로 새지 않고 집으로 바로 가겠다고 다짐을 했건만 아무도 듣지 못한 다짐임이 문제였던 것인지 하염없이 흔들리고 있다. '이 횡단보도를 다 건널 때까지만 고민하자, 그리고 발걸음이 이끄는 방향으로 가는 거야' 라며 왼쪽 길로의 가능성을 열어둔다. 괜히 늦은 걸음으로 결정을 1초라도 미루다가 '그래 오늘까지 만이야' 라며 왼쪽 길로 뻔뻔한 발걸음을 내딛는다.
퇴근하고 먹는 끼니이니 저녁밥이라고 해야 할 테지만 보통 제대로 식사를 하게 되는 시간이 9시를 훌쩍 넘을 때가 많아 저녁이라기보다는 야식이라는 지칭이 더 알맞을 듯하다. '저녁 식사' 라고 하면 당연히 잘 챙겨 먹어야 할 건강한 한 끼라는 이미지가 떠오르지만 '야식'이라고 말하면 건강과는 다소 거리가 먼 것들이 꼬리를 물고 따라붙는다. 성인병이라던가 비만이라던가 혹은 자제력 부족과 같은. 그래서 '줄여야 하는데...' 라던가 '끊어야 하는데...'라는 말들과 되게 잘 어울리고 '오늘까지만 먹어야지'를 별명처럼 가지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야식이 하루의 식사들 중 가장 맛있는 한 끼라는 건 부정하고 싶지 않다. 같은 라면을 끓여 먹어도 9시 이후에 끓인 것이 더 맛있다는 비법은 분명 나만 맹신하는 진리는 아닐 것이다.
야식의 부정적 이미지에 기여한 것은 야식 메뉴들이 대개 맵고 짠 음식들이 많고 그 양도 보통의 한 끼보다 넘치는 경우가 많아서가 아닐까. 사실 담백하고 깔끔한 음식은 야식과 어울리지 않는다. 아주 자극적이고 먹는 동안 아무 생각 들지 않는, 그리고 그 강한 맛에 현혹되어 다음에 또 생각나게 되는 그런 메뉴들이 야식의 주인이다. 입 안이 얼얼하도록 맵고 짠 음식들을 땀을 뻘뻘 흘리며 먹다 보면 조금 전까지 나를 짓누르던 피로와 스트레스는 간다는 말도 없이 어느새 사라져 있다. 몰두해서 먹는 동안 쾌락을 동반한 혀끝의 고통이 지치고 피곤함의 고통을 이기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아픔이 더 큰 아픔으로 잊히는 것과 같은 이치로.
내 야식의 주메뉴는 순대다. 순대 1인분은 혼자 먹기에 양도 적당하고 막장을 듬뿍 찍어서 먹으면 하루의 고단함이 짠맛과 함께 꿀꺽하고 넘어가는 것 같다. 쫄깃해서 씹는 맛도 있고 간이니 허파니 두루 섞인 내장을 골라 먹는 즐거움도 있다. 그래서인지 일주일에 두 번씩 먹어도 질리지 않는 영혼의 야식이 되었다. 희한한 것이 보통 음식은 여럿이 둘러앉아 먹을 때 더 맛있지 않나. 그런데 나에게 이 순대만큼은 퇴근길에 단골 분식점에서 1인분을 사 와서 집에서 혼자 먹을 때 가장 맛있다. 같은 집의 순대라도 여럿이 먹거나 집이 아닌 식당에서 먹으면 맛이 덜한 기분이 든다. 아마도 밤늦은 시각 하루 치의 인생을 마무리하면서 삼키는 순대는 그저 단순한 순대 한 접시가 아니기 때문이겠지. ' 후유 오늘 하루도 이렇게 지나갔구나'라는 안도가 담겨있겠고 '오늘도 수고했어'라고 알아주는 끄덕임도 있겠고 수고했으니 배불리 먹으라는 토닥토닥 다독임도 담겨있을 것이다. 그 모든 것들을 천천히 음미하며 먹을 수 있어서 어쩌면 조금 더 맛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배도 든든하게 차고 마음도 따뜻하게 채워지면 텅 빈 순대 접시를 바라보며 여지없이 다짐한다. 내일은 가벼운 샐러드 정도로 저녁을 먹어보자고. 분명 배가 부를 때는 자신이 있다. 그런데 퇴근길 빨간불이 켜진 횡단보도 앞에만 서면 왜 항상 왼쪽 길에 홀리고야 마는지 참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