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은성 Jan 28. 2022

집, 내 영혼의 안식처

20년 된 아파트를 유행에 맞추어 올 화이트 톤으로 리모델링 한 집에 세를 얻었다. 동쪽과 남쪽에 반씩 걸쳐 있는 복도식 아파트의 10층 끝집이다. 가로 5m, 세로 3m의 큰 방 하나와 그 절반 크기의 작은 방 하나 그리고 작은 주방이 있는 아담하고 깨끗한 집이다. 본격적인 독립생활을 마음에 드는 집에서 시작할 수 있었던 건 행운이었다. 집이라는 게 내 마음대로 구해지는 게 아니라는 말을 종종 들었다. 집을 지어서 이사를 하는 게 아닌 다음에야 부동산 시장에 나와 있는 집들 중에서 골라야 하는데 마침 내가 가려는 동네엔 조건에 맞는 집이 없거나 아니면 꼭 한 가지씩 결격 사유가 있어서 고르기가 난처한 경우가 많다고 했다. 결국엔 그중에서 적당히 조건을 맞추어서 결정을 해야 하는 게 현실이라고. 또 부동산 경기의 흐름 상 거래가 잘 이루어지지 않는 시기라 이 잘 나오지 않아 애를 먹기도 한다고 했다. 이런저런 경우의 수를 다 피해 큰 고생 하지 않고 괜찮은 집을 고를 수 있었던 건 초심자에게 주어지는 조건 없는 행운 같은 것이었을까. 거슬리는 게 하나도 없는 만족스러운 집에서 늦깎이 홀로서기를 시작할 수 있어서 기뻤다.     


그러나 역시.     


집은 살아 봐야 안다. 거슬리는 것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한 이 집에서의 첫날밤이 지나고 아침이 되었을 때 아연실색 할 놀라운 장면을 목격하고야 말았다. 아파트 생활을 시작한 30년의 세월 동안 만난 적이 없는, 앞으로도 결코 만나고 싶지 않았던 바퀴벌레가 기어가고 있었다. 경악했고 소름 끼쳤고 마치 이 집의 사방 벽이 바퀴벌레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정말 공포스러운 사실은 그 바퀴벌레를 잡을 사람이 나밖에 없다는 것,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나를 대신해 바퀴벌레를 잡아 줄 사람은 없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사람은 역시 적응의 동물이다. 저 한 마리의 바퀴벌레를 잡지 않으면 100마리 아니 1000마리의 바퀴벌레와 더불어 살게 될 것이라는 끔찍한 두려움이 나를 강하게 만들었다. 그것의 살결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화장지를 두껍게 둘둘 말아 내리쳤다. 잘 겨냥해서 실수 없이 한 번에 잡아야 한다는 걸 기억하고 있었다. 성공했다. 그 후 두 번째, 세 번째도 잡았고 약도 놓고 초음파 퇴치기도 사서 꽂았다. 바퀴벌레는 매일 한 마리 두 마리씩 끊임없이 출몰했고 그들의 출현에 익숙해지면서 지쳐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퇴근해서 집에 들어가는데 잘 보이지 않았던 옆집 아주머니께서 현관문을 활짝 열어놓으시고 대청소를 하고 계셨다. 가벼운 인사를 나누고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는데 현관문 틈으로 무언가가 기어 들어가는 장면을 목격하고야 말았다. 현관문을 열었을 때 경악스럽게도 올 화이트로 도배된 우리 집 벽을 타고 바퀴벌레 군단이 열을 맞춰 진군해 들어가고 있었다.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신발장에서 구비해 둔 바퀴벌레 약을 꺼내 그들의 뒤를 쫓아가며 뿌리고 약에 취해 비틀거리는 놈들을 쉴 새 없이 잡았다. 한바탕 소란 끝에 어찌 되었든 눈에 보이는 놈들이 없어졌을 때야 겨우 잠이 들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벌레가 없는 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자지 않을 수 없으니 이불을 뒤집어쓰고 부디 내 이불속엔 들어오지 않기만을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일주일쯤 지났을까. 더 이상 집에서 바퀴벌레가 발견되지 않았다. 그동안 옆집의 청결 상태가 바퀴벌레 출몰의 원흉이었던 것이다. 옆집이 깨끗하게 청소하고 바퀴벌레 약을 뿌리고 나니 그들은 다른 집으로 서식지를 옮겨 떠났다.      

 

호된 신고식을 치른 기분이었다. 높은 곳에 있는 어떤 분이 '혼자 살아간다는 건 이런 거야'하고 쓴맛을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일까. 덕분에 나는 난생처음으로 내 집을 가지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오래되지 않은 깨끗한 아파트에 내 집을 마련하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이 마음속에 자리 잡았다. 물론 벌레와 집의 소유 간에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내 집이라고 해서 벌레가 나오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나. 분명히 알고 있지만 마음이 그쪽으로 움직였다. 작은 벌레에게조차 위협받고 싶지 않은 완전한 안전에 대한 갈구가 내 집의 소유라는 다른 맥락의 안정감에 대한 욕망으로까지 확대되었나 보다. 다행히 바퀴벌레가 더 이상 눈에 보이지 않게 되자 언제 그런 적이 있었냐는 듯 모든 스트레스는 말끔히 사라졌고 집에 대한 애정과 만족감이 다시 차올랐다.      


큰 방의 한쪽 세로 변에 침대를 놓고 그 맞은편 세로 변은 절반으로 나누어서 반은 서재로 나머지 반은 거실로 공간에 역할을 부여했다. 서재라고 지정한 공간에는 책장과 책상을 놓고, 거실로 정한 공간에는 러그를 깔아서 각각의 공간을 나름으로 구분을 해주었다. 책상은 벽면에 붙이지 않고 베란다 창을 향하도록 두어 책상에 앉아 밖을 바라보는 맛을 즐길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바로 이 책상의 위치가 집에 대한 내 생각을 좀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사람들이 집을 고를 때 '한강 뷰'니 '호수 뷰'니 하며 전망에 대한 취향을 이야기하면 의미 없는 것에 까다롭다고 생각했다. 집은 안전성이나 편의성이 최우선이지 창밖에 보이는 풍경을 집 선택의 조건으로 꼽는 건 허영이 아닐까 싶었다. 그런데 고기도 먹어본 놈이 맛을 안다고 전망도 누려본 사람이 그 매력을 아는 거였다. 나는 산이나 강이나 바다 같은 멋진 전망이 펼쳐지는 집에 살아본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전망이 사람의 영혼에 얼마만큼 아름다운 영향을 줄 수 있는지 몰랐다. 그런데 이젠 조금 알 것 같다. 이 집이 멋진 전망을 가진 집이어서 알게 된 건 아니다. 이 집은 아파트 숲을 이루는 무수한 콘크리트 나무들 중 한 그루로 아래에는 자동차가 넘실대는 아스팔트 강이 흐르고 고개를 들면 모난 창들이 빼곡히 박힌 콘크리트 상자 밖에 보이지 않는 흔한 도시의 아파트다. 하지만 전망은 눈으로만 보는 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혼자 사는 집은 고요하다. 내가 움직이지 않는 이상 그 어떤 소리도 나지 않는다. 이 소리 없음이 공허나 쓸쓸함을 불러올 거라는 생각은 선입견이다. 텅 빈 것 같지만 고요로 가득 차 있다는 걸 느끼게 되면 외로움이 아니라 따스한 충만함이 느껴진다. 나는 주로 창밖을 향해 있는 책상에 앉아서 커피를 한 잔 마시며 푸른 하늘을 바라보는 고요를 즐긴다. 가만히 앉아 있으면 내 방 깊숙이 들어온 햇살이 조금씩 자리를 옮기는 소리가 들리고 커피 한 모금이 목을 타고 넘어가는 소리도 선명히 들린다. 이 소리들을 들으면서 알았다. 이런 여유를 누리고 싶은 마음이었다는 것을. 산을, 강을, 바다를 바라보는 집을 찾는 마음들이 결국 이 마음의 여유와 시간의 여유를 갈구하는 마음이었다는 것을. 나 역시 혼자 살기 전에는 집에서 바깥을 바라보면서 생각에 잠기는 여유를 부려본 적이 없다. 내방 구석에 놓인 책상에 앉아 커피를 마셨고 벽을 바라보며 상상의 나래를 펼치곤 했다. 그런데 벽과 하늘은 겨울과 봄처럼 달랐다. 그 다름을 인지하고 나니 전망에 대한 취향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사람은 여러 가지 환경에 영향받는 동물이다. 내가 머무는 공간의 변화는 곧 나의 변화로 이어진다. 그중에서도 주거공간은 그 자체로 이미 삶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생각할 공간이 마련된 집에 머무르면 생각하는 사람이 된다. 그림 그리는 공간이 마련된 집에 머무르면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된다. 멋지게 책을 읽을 수 있는 공간이 있으면 책 읽는 사람이 된다. 내가 무엇을 원하는가를 생각하고 나를 어떤 사람으로 만들고 싶은가를 생각한 공간 구성은 삶의 만족도와 직결된다. 나는 이 집에 사는 동안 많은 것들을 시도해보고 싶다. 그래서 이 집을 나가게 될 때 “저 이 집에서 좋은 일이 많았어요. 좋은 기운 받으시길 바라요.”라고 이 집의 다음 주인에게 말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분을 위해서라도 잘 살아야겠다.

이전 13화 친구라고 말해도 될까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