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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은성 Nov 07. 2021

친구라고 말해도 될까요?

6개월 만에 미용실을 갔다. 미용실 가는 걸 귀찮아해서 미루고 미루다 보니 머리가 정말 많이 길었는데 긴 생머리 스타일은 미용실에 자주 가지 않아도 지저분한 티가 잘 나지 않는다. 보통 찰랑찰랑 윤기 있는 긴 생머리가 자신에게 잘 어울리거나 이런저런 스타일 변화를 줄 여지가 많아서 많이들 선택하는 스타일이다. 하지만 게으른 누군가는 그냥 가만히 있었더니 긴 생머리가 되어버렸고 머리를 질끈 묶었더니 그럭저럭 괜찮은 것 같아서 더 오래 가만히 있다가 더 긴 생머리의 여자가 되어버렸다. 어느덧 머리를 감고 말리는 시간이 점점 길어져서 불편하고 성가심이 미용실 가는 귀찮음을 넘어서는 단계에 이르렀다. 그리고 마침 찬 바람이 불기 시작했고 묶은 머리 밑의 목이 선득해져서 더 이상 미용실 가는 걸 미룰 수가 없었다.     


일터, 마트, 버스터미널, 지하철역, 숱한 단골 맛집들 모두 집에서 걸어서 15분이면 갈 수 있다. 15분을 벗어나는 것은 도서관, 기차역 그리고 미용실 밖에 없다. 사실 미용실은 집에서 가까운 곳이어야 한다는 게 나의 지론이다. 그래서 몇 차례 집 가까운 미용실을 찾아 나서 봤지만 번번이 실패로 끝이 났다. 그 결과 버스를 타고 20분을 가야 하는 머나먼 미용실에 머리를 맡기고 있다.      


자주 가는 대학가 쇼핑 거리의 한 복판에 있는 작은 3층 건물의 2층에 핑크색 간판이 걸린 미용실로 별로 눈에 띄는 곳은 아니었다. 보통의 오래된 인연의 시작들이 그렇듯, ‘이번엔 저기 한 번 가보자’하는 마음으로 아무런 정보도 없이 가볍게 들른 곳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일하고 있었고 그 많은 사람들이 문이 열림과 동시에 일제히 입을 모아 ‘사랑합니다 고객님, 친절히 모시겠습니다.’라는 우렁찬 목소리로 나를 놀래켰다. 안내하시는 분이 다가와 찾는 디자이너가 있는지 물었고 처음이라고 했더니 H디자이너를 매칭 해주었다. 그렇게 첫 만남이 이루어졌고 그 H디자이너와 20년 가까운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그전까지 들렀던 미용실들은 하나씩의 아쉬움들이 꼭 있었기에 두 번은 발걸음이 가지 않았다. 예를 들면 시술하는 동안 사적인 질문을 너무 많이 한다거나 헤어 상품을 소개하며 은근한 강요를 한다거나 분명 요구했던 스타일이 있는데 다짜고짜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며 본인의 뜻대로 변형해버린다거나 하는 등등의 불편함들이 하나, 둘씩은 꼭 있었다. 그래서 한 곳으로 정착하지 못하고 미용실 이곳저곳을 유랑하고 있었고 미용실을 가야 할 때가 되면 적당한 미용실을 찾아야 한다는 은근한 스트레스가 있었더랬다. 그런데 H 씨는 달랐다. 이것저것 말을 시키지 않았고 그렇다고 어색한 침묵으로 불편하게 하지도 않았다. 적당한 타이밍에 적당한 무게의 대화를 건넸고 잡지라도 보고 있으면 일절 말을 붙이지 않았다. 머리를 만질 때에도 세심하게 눈치채고 불편하지 않도록 배려해주었고 요구한 스타일에 대해 한 마디도 평하지 않고 원하는 바에 최대한 가깝게 만들어주려 노력하고 있다는 걸 느끼게 해 주었다. 물론 커트 솜씨는 말할 것도 없이 만족스러웠다.      


처음 머리를 하고 미용실을 나왔을 때 한 가지도 불편한 점 없이 상쾌한 마음이었다. 그러니 서너 달 후 다시 미용실을 갈 때가 되었을 때 고민 없이 그곳을 찾게 되었다. H 씨가 있는 그곳으로. 한 번, 두 번 들른 횟수가 늘어가니까 H씨도 나를 기억하게 되었고 ‘오랜만에 오셨네요’라는 인사를 건네며 단골 술집에서 지난번 먹던 그것이라고 말하면 알아들어주는 것처럼 지난번 했던 머리 스타일을 기억해주었다. 부담스럽지 않은 정도에서 ‘당신을 기억하고 있습니다’라는 최소한의 신호를 보내주었다. 어떤 스타일을 하더라도 끝내는 자연스러운 느낌으로 마무리되는 걸 좋아한다는 것을 빨리 간파해주었고 평소에 머리 손질을 전혀 하지 않는 감고 말리기로 끝나는 사람이라는 걸 알아채고 과한 스타일링은 하지 않아도 되는 쪽으로 정리해주었다. 주기적으로 해야 하는 어떤 일을 이토록 내 마음을 잘 읽어주는 상대에게 맡긴다는 건 마음 편한 일이다. 그 마음 편함에 시간을 좀 들이기로 했다. 가까운 미용실을 찾으려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허비하는 에너지를 버스 20분 타는 데 쓰면 되는 것이었다.      


근래 10년 동안은 미용실에서의 나의 요구 사항은 항상 똑같다. 염색을 하고 머리를 조금 자른다. 시술 시간은 1시간 30분이면 되지만 사람이 붐비는 주말에는 최대 1시간까지 기다릴 때도 있다. 그래서 미용실에 갈 때면 항상 책을 들고 가는데 그러면 오래 기다리게 되더라도 지루하지 않고 시간 아깝다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 차례를 기다릴 때나 시술을 받는 시간 동안 책을 읽고 있으면 그녀는 나를 그냥 가만히 내버려 둔다. 20년 가까운 시간을 함께 한 그녀와 나의 호흡이다. 20년... 그리 오랜 시간을 함께 하면 서로에 대해 조금은 더 알 법도 한데 그녀와 나 사이는 처음 만났던 그때와 다를 게 없다. 처음 그 거리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오랜만에 오셨네요.’ 라던가 ‘고개 조금만 들어주세요’, ‘머리 왼쪽으로 조금 돌려주세요’등의 요구만이 오갈 뿐이다. 그 심플함이 멀어도 그녀를 찾아가게 되는 이유다.      


일 년에 두세 번. 한번 방문에 2시간 내외. 눈을 맞추고 인사를 나누는 찰나들, 그동안 잘 지냈냐는 형식과 진심이 반반 섞인 질문들, 요즘 세상이 어떠어떠하더라는 형식적인 이야기들이 잠깐 오간다. 그리고 나는 책에 눈길을 돌리고 그녀는 머리를 자른다. 익숙한 침묵과 숙련된 가위질 소리가 둘 사이를 채운다. 서로를 잘 모르지만 그리고 앞으로도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난 이 사람을 내 인생에서 또 한 명의 친구로 생각하고 있다고 고백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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