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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은성 Feb 05. 2022

나는 내가 지킨다.

끝내 지키지 못하게 된다면 그냥 받아들인다.

요즘 내 삶의 가장 큰 적은 유튜브다. ‘적’이라고 하기엔 너무 좋아하고, 자주 만나고, 붙어 있는 시간도 많아서 미안하긴 한데 사실 좋아하고, 친하고, 너무 오래 붙어있기 때문에 오히려 적이라고 규정하게 되었다. 시간은 결코 등속도 운동을 하지 않음이 분명하다. 10분 남짓의 유튜브 영상 몇 개를 보았을 뿐인데 어떻게 1시간, 2시간이 훌쩍 지나버릴 수 있는 걸까. 내가 유튜브 영상에 넋이 나간 사이에 시곗바늘이 숫자판 위를 성큼성큼 빠른 걸음으로 걸어간 게 틀림없다. 더 이상 볼 게 없어졌을 때 고개를 들어 시계를 보면 그제서야 보폭을 줄이고 그런 적 없다는 듯 시치미를 뚝 떼고서 똑딱똑딱 점잖게 걸어가는 두 다리에서 수상함이 느껴진다. 하지만 시계를 아무리 의심스럽게 노려봐도 시곗바늘은 뒷걸음질로 시간을 돌려주지 않는다. 그저 나의 지극한 사랑을 탓할 뿐이다. 사랑은 자신의 가장 귀한 것을 기꺼이 내어주는 것이라고 했던가. 나는 내가 가진 것 중 가장 귀한 ‘시간’을 유튜브에게 아낌없이 줘 버렸다. 더 이상 시간이 왜 이렇게 빨리 지나가느냐고, 요즘 왜 이렇게 바쁜지 모르겠다고 말할 자격이 없다.      


변명을 하려는 게 아니라 나의 무절제를 견제해줄 이가 없다는 사실이 내 삶을 점점 무질서와 시간 낭비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건 아닐까 생각해보게 되었다. 누군가 곁에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유튜브만이 아니다. 청소를 몇 날 며칠 하지 않거나, 설거지를 산처럼 쌓아 두고 하지 않아도 아무도 모른다. 매 끼니를 배달음식과 인스턴트 음식으로 때우고 밤마다 술로 잠을 청해도 잔소리하는 사람이 없다. 이게 함정이다. 편하고 자유로워서 좋은 건 맞지만 편함과 자유로움이 오히려 부메랑이 되어 내 삶의 질을 떨어뜨리는 결과를 초래한다. 편하기만 하면 더러운 환경에서 생활해도 괜찮나, 자유롭기만 하다면 내 몸이 망가져도 상관이 없는가. 그렇지 않다. 나는 몸이 조금 고되더라도 위생적인 환경에서 건강한 음식을 먹으며 ‘잘‘ 살아가는 것이 삶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렇다고 나에게 잔소리해줄 누군가가 필요하다는 이상한 결론은 사절이다. 일단은 거울에 비친 나를 자주 들여다보자고 다짐하는 것으로 시작해보려 한다.    

  

사람은 몸이 아플 때 마음도 함께 약해진다. 아프면 혼자 살고 있다는 현실이 몇 배로 슬프게 느껴지고 혼자살이에 대한 회의감이 몰려온다. 아프기 전까지 편하고 자유로운 시간을 실컷 누렸던 건 싹 잊어버리고 외롭고 쓸쓸하게 혼자 앓고 있는 지금의 모습이 내 삶의 전부인양 서글퍼진다. 혼자 살든 둘이 살든 누군가 나 대신 아파줄 수 없는 건 똑같으니까 혼자라고 해서 더 서글플 건 없다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도 모르게 뱉어낸 앓는 소리가 누구에게도 부딪히지 못하고 그대로 메아리가 되어 내게 돌아오는 걸 들어본 사람은 자신에게 특별한 연민을 품을 수밖에 없게 된다. 혼자 사는 사람은 나를 돌볼 사람이 나밖에 없다는 황량한 현실에 익숙해져야 한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엄격한 관리자로서의 역할을 잘 해주어야 한다. 안 아파야 한다는 말은 억지다. 다만 더 아플 수 있는 상황에 자신을 방치하는 일은 없도록 해야 한다.


가끔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집에 혼자 있는데 갑자기 쓰러지면 어떻게 하지? 119를 부를 수 있을까? 문을 열어줄 수 없는 상태라면 어쩌지? 가까운 사람들에게 현관 비밀번호를 알려줘야겠다. 비상연락 버튼도 설치해야겠다.’ 같은 생각들. 하지만 결국은 ‘그냥 받아들이자.’로 생각을 끝낸다. 사람은 언젠가는 죽는다. 내게도 그 순간이 올 것이고 하필 운이 좀 나쁘게 혼자 있을 때 그 순간이 찾아오더라도 어쩔 수 없는 나의 운명이다. 나의 죽음까지 내 마음대로 결정하려 한다면 오만도 그런 오만이 없다. 이러면 어쩌지 저러면 어쩌지 하는 생각은 모두 부질없다. 죽음에 대해 내가 할 수 있는 건 오로지 받아들이는 것 하나뿐이다. 다만 스위치 오프 후의 암전처럼 순식간에 죽음에 이르지 못하고 숨이 차츰차츰 사위어 가다 결국 완전히 멎을 때까지 의식이 남아 있다면 무척 무섭고 외로울 것 같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면 도리질을 친다. 생각한다고 달라질 것 없는 걱정은 하지 않기로 했으므로 생각은 거기까지만 하기로 한다.      


내 삶은 내가 지켜나가겠다. 그리고 끝내 지키지 못한 순간이 찾아오면 그땐 그냥 받아들이겠다. 일단은 유튜브 보는 시간부터 줄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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