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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은성 Feb 09. 2022

불청객을 물리치는 방법

내게는 특별한 손님들이 찾아오는 집이 하나 있다. 지은 지 아주 오래된, 방도 많고 다락과 창고도 있는 햇볕 잘 들고 바람 잘 통하는 좋은 집이다. 이 집엔 울타리도 없고 문도 항상 열려 있어 비어있을 때가 없이 여러 손님들이 자주 드나든다. 손님 중에는 찾아와 주기를 기다리는 손님도 있고 습관처럼 들르는 반갑지 않은 손님들도 있다. 와주기를 기다리는 손님이 영 오실 기미가 보이지 않을 때는 그를 불러들이는 의식으로 청소를 하고, 달갑지 않은 손님들이 눈치도 없이 오래 머물고 있을 때는 이제 그만 돌아가 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청소를 한다.      


머릿속에 지어놓은 이 집에는 늘 불청객들이 찾아와 방을 하나씩 차지하고 들어앉는다. 어떤 손님은 침대에 꼼짝 않고 누워서 ‘아무것도 하기 싫어’라는 말만 반복하고 있고, 어떤 손님은 휴대폰만 들여다보고 앉아서 ‘오늘까지 끝내야 하는데’하고 말로만 일을 하고 있다. 다른 방에서는 ‘오늘 점심은 뭘 먹지, 오늘 저녁은 뭘 먹지’라며 먹을 것만 밝히고 있고, 또 다른 방에서는 이쁜 연예인들 사진만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다이어트를 해야겠다’는 말만 중얼거리는 손님도 있다. 하루는 ‘꼼짝도 하기 싫어’ 하는 목소리만 들리고 어느 날은 ‘뭘 먹지’ 하는 소리만 들리는데 이들을 그대로 방치해두면 목소리들이 점점 커지고 서로 엉켜서 머릿속이 빈틈없는 소란으로 가득 찬다. 그럴 땐 일어나서 움직여야 한다. 그들에게 집어삼켜지기 전에 그들을 내쫓아 방을 비우고 깨끗이 청소를 해야 한다.      


도리질하며 불청객들을 쫓아낼 때마다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 어릴 때 tv에서 본 그 스타는 스트레스를 받으면 청소를 한다는 말로 나를 의아하게 만들었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잠을 푹 자거나 맛있는 걸 먹으면서 자신을 위해주어야지 청소가 웬말인가! 자신을 너무 괴롭히는 스트레스 해소법이 아닌가 생각했다. 뒤늦게 알게 되었는데 이 의식은 분명 효과가 있었다. 머릿속에 들어가서 사이렌을 울리며 다들 이제 그만 내 집에서 나가 달라고 소리를 지르는 대신 창문을 열고 먼지를 턴다. 그리고 책상 정리부터 시작한다. 어질러진 책과 노트를 책꽂이에 꽂고 흐트러져있는 필기구들도 제자리에 놓는다. 청소기로 바닥을 밀고 곳곳에 먼지를 닦는다. 설거지도 뽀독뽀독 소리 나게 하고 욕실 바닥도 튼튼한 솔로 박박 문지른다. 한 바탕 청소를 끝내고 차 한 잔 타서 책상 앞에 앉으면 어느새 머릿속 집이 조용해졌음이 느껴진다. 시끌벅적 떠들던 손님들은 모두 떠나가고 집이 텅 비었다. 그들이 떠난 빈 자리에 비로소 편한함이 스며든다.


쓰레기에 파묻힌 집에 사는 사람들을 tv에서 본 적이 있다. 그저 청소하지 않는 습관과 게으름으로 집이 저 지경에 이르렀다고 생각하고 그들을 혐오했다. 하지만 엉망이 되어버린 집은 그들의 게으름의 결과가 아니라 상처가 남긴 흉터라는 걸 이제는 안다. 감당할 수 없는 상처가 마음에 지어놓은 집의 가장 어두운 방으로 들어가 구석에 웅크리고 앉았다. 세상으로 나오기가 두려워서 점점 더 깊은 어둠 속으로 숨어들었고 몸집은 점점 커졌다. 결국엔 그 상처가 마음의 방들을 모두 차지해버려서 건강한 손님들이 그들의 마음의 집을 찾기가 더 어려워졌을 테고 그들은 결국 그 방에 들어가 불을 켜고 창문을 열어 먼지를 털어낼 힘을 잃게 된 것이다. 내 집과 내 방이 곧 내 마음과 내 머릿속의 투영임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하루 계획표를 짤 때 씻고 밥 먹는 시간은 적어 넣는데 청소하는 시간을 따로 적어 본 적이 없다. 청소를 너무 하찮게 생각했다. 좀 더러워도 괜찮다. 중요한 일 먼저 하고 시간 나면 그때 몰아서 해도 괜찮다 생각했다. 어느 날 가스레인지 위에 가득 묻은 얼룩이 눈에 들어왔다. 분명 하루 이틀 방치된 얼룩은 아니었다. 얼룩이 있다고 해서 당장 가스레인지가 켜지지 않는 것은 아니니 다음에, 다음에 하며 미루다가 그 지경에 이르렀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가스레인지뿐 아니라 주위 벽에도 이런저런 얼룩들이 잔뜩 튀어있었다. 수세미를 들고 여기저기 얼룩들을 닦아내기 시작했는데 잘 지워지지 않았다. 두 번 세 번 문질러야 했고 그러고도 닦이지 않는 얼룩은 지독한 세제를 뿌려 닦아냈다. 이 정도로 굳어버리기 전에 닦았다면 힘 덜 들이고 쉽게 닦았을 텐데 차일피일 미루다가 결국 두 배 세 배 힘들게 만들었다. 모든 일들이 그렇구나 싶다. 모두 '하나'에서 시작된다. 귀찮아서 그냥 넘기고, 괜찮겠지 하고 그냥 넘긴 그 '하나'들이 쌓여서 결국 문제가 되고 그 문제 해결에 들어가는 힘을 키운다. 그걸 눈치채고 나니 가스레인지에 튄 라면 국물 하나를 쳐다보는 마음이 복잡해진다. 지금 닦지 않으면 닦는 날까지 계속 신경 쓰일 테고 그동안 얼룩은 더 짙어져서 나를 더 힘들게 만들겠지. 그러니까 귀찮다고 그냥 내버려 두기가 꺼림칙하다. 결국 하나의 얼룩일 때 쉽게 닦아내는 쪽을 선택하면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나의 날렵한 몸놀림에 아낌없는 셀프 찬사로 보상해준다.        


요즘 나는 하루를 청소로 시작한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얼마 동안은 몸과 정신이 몽롱하다. 이때 책을 읽기 시작하면 십중팔구 졸고 글쓰기를 시작하면 무엇을 써야 할지 잘 떠오르지 않아서 아침 시간을 허비하게 되는 일이 많았다. 정신과 신체의 활동이 일정한 궤도까지 올라오는 데는 시간이 조금 걸리는데 이 시간에 커튼을 젖히고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작한다.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책상에 놓아둔 찻잔을 씻는다. 여기저기 널려있는 책이나 필기구를 정돈하고 비뚤어져 있는 소품들도 제 방향을 찾아준다. 그러고 나면 어느새 잠이 달아나고 몸과 의식이 하루를 시작할 준비가 되었다는 신호를 보낸다. 간단한 요기를 하고 커피를 한 잔 내려서 정돈된 책상 앞에 앉으면 텅 비어있는 내 집에 반가운 손님들이 하나 둘 찾아오기 시작한다. 그러면 나는 그 손님들의 도움을 받아 책도 읽고 글도 쓰는 일상을 시작한다. 하루를 시작하는 10분은 그 하루 전체의 예고편이다. 시작이 편안해야 하루가 편안하다. 하루의 시작을 잘 가꾸는 것은 내 인생을 가꾸는 것과 다르지 않다. 나는 당분간 아침 청소에 내 편안한 미래를 맡겨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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