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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은성 Feb 16. 2022

고요와 친해지기

나를 키운 건 8할이 텔레비전이다. 드라마를 보며 인생을 배웠다. <꾸러기>와 어린이 시절의 즐거움을 함께 했고, <사춘기>를 보면서 그 나이의 고민과 우정을 나누었다. <우리들의 천국>은 대학 생활을 꿈꾸게 했고, <사랑을 그대 품 안에>는 나도 언젠가 차인표씨처럼 멋진 남자를 만날 거라는 색소폰 멜로디 가득한 연애를 상상하게 했다. 그 밖에도 일일이 열거할 수 없는 많은 드라마에서 사람들이 말하고 행동하는 것들을 보면서 나도 그들처럼 멋지고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을 품었다. 텔레비전 속 이야기는 허구라며 브라운관 속 현실과 실제 세상은 다르니 둘을 혼돈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라고들 했다. 하지만 그건 한 아이의 지성을 무시해도 너무 무시한 걱정이었다. 현실과 가상을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무지하지 않았다. 취사선택할 수 있었다. 친구를 위로할 땐 어떻게 말하는 것이 좋은지, 이웃 어른에게 인사를 할 땐 어떤 태도가 알맞은지, 잘못을 했을 때 어떤 타이밍에 사과의 말을 건네는 게 좋을지 같은 사람 관계의 미묘한 태도들을 tv를 보면서 배웠다. 텔레비전이 바보상자라니, 그건 텔레비전을 재밌게 볼 줄 모르는 사람들이 만든 별명이라 생각했다. 텔레비전에서 무엇을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 바보상자가 될 수도 백과사전이 될 수도 있었다. 좋은 드라마 한 편은 책 한 권만큼이나 가치 있다. 여러 인간 군상을 접하면서 그들이 어떻게 어울려 살아가는지 엿볼 수 있다. 어른이 되어서도 이 생각에는 변함이 없고 어린 시절 tv에 투자한 시간들을 아까워하지도 않는다. 텔레비전에 신세진 게 많고 덕분에 잘 자랐다.     


하루 일이 끝나고 퇴근을 하는 시간엔 나를 위하고 싶은 마음이 커진다. 아주 맵거나 지극히 달콤한 음식으로 혀끝을 만족시켜 주고 싶기도 하고 하루 피로가 싹 달아날 만큼 즐거운 오락거리를 보여 주고 싶기도 하다. 묘하게도 밤의 그 시간만큼은 모든 긴장을 털어버리고 아무 생각 없이 1차원적 만족 속으로 풍덩 빠져버리고 싶다. 집으로 가서 저녁 식탁을 준비하고 밥 먹으면서 재미있게 볼만한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고심해서 고른다. 눈과 손과 입을 쉼 없이 움직이면서 tv와 음식에만 몰두하는 이 시간이 내 하루의 수고에 대한 보상이다. 하지만 이 보상은 첫 번째 프로그램으로 충분한데 매번 하나로 끝내지 못하고 두 개 세 개로 이어지고 만다. 딱 한 프로그램만 보겠다고 작정하지만 이어서 방송되는 예능 프로그램이 재밌어 보이면 하나만 더 보자 하고 마음이 약해진다. 그리고는 두 개를 다 보고도 아쉬움이 남아서 리모컨으로 채널을 계속 돌린다. 보고 싶은 게 있어서도 아니고 그냥 움직이기가 싫어서 여기저기 돌려보면서 시간을 축내고 있다. 도저히 더 볼 게 없고 아까 먹은 밥도 진작에 소화가 다 된 느지막한 시각이 되면 그제서야 무거운 엉덩이를 든다. 퇴근 후의 달콤한 휴식 시간은 이미 다 지나버렸고 읽으려고 했던 책은 오늘도 들춰보지도 않고 책상 위에 놓여있다. 잠자리에 들어가며 후회를 한다. 한 프로그램만 봤어야 했는데라고. 텔레비전이 있는 집에서 살 땐 그랬다.     


그리하여.     


독립할 때 tv를 사지 않기로 결정했다. 뜬금없는 결정은 아니었고 텔레비전 없이 살아보고 싶은 소망을 항상 가지고 있었다. tv를 너무 좋아해서 하루 중 tv 보느라 낭비하는 시간이 너무 많았다. 텔레비전 한 프로그램 시청 시간이 60분을 넘지 않을 때는 그래도 좀 괜찮았다. 계획표를 짤 때도 한 시간씩 딱딱 끊어지도록 프로그램을 배정할 수 있어서 시간 관리에 작으나마 도움이 되었고, 시계의 큰 바늘의 움직임과 프로그램 전개 속도가 발을 맞추고 있어서 큰 바늘이 12에 이르면 프로그램이 끝나면서 자연스럽게 분위기 전환이 되었다. 그런데 요즘은 기본이 70분이다 보니 한두 프로그램만 보더라도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린다. 그리고 24시간 텔레비전을 볼 수 있어서 스스로를 컨트롤하기가 점점 힘들어졌다. 하나만 보고 다른 일을 해야지 굳게 결심을 하고 tv 앞에 앉지만 시간은 어느새 12시를 넘기기 일쑤였고 절제하지 못한 자책감을 안고 잠드는 날이 많았다. 그리하여 스스로 조절할 수 없다면 애초에 집에 들이지 않겠다는 굳은 마음으로 tv와 작별을 선택하게 되었다. 너무 사랑해서 헤어진다는 말이 딱 어울렸다.    

  

좋은 타이밍이었다. 이사라는 변화 안에 tv와의 작별이라는 작은 변화를 끼워 팔기 한 덕에 티 나지 않게 자연스럽게 헤어질 수 있었다. 만약 공간의 변화 없이 tv만 내다 버렸더라면 아마도 금단현상에 괴로웠을 것이다. 하지만 새로 이사한 집에서는 처음부터 tv 없이 시작했으니 허전하거나 초조하지 않았다. 여행을 가면 tv를 잘 보지 않게 되는 마음이랑 비슷하달까. 어쨌든 낯선 공간에 머무르게 된 것이니 있는 그대로에 스며들 듯 적응하면서 자연스럽게 tv 없는 생활을 시작했다. 성공적으로. 엄마와 함께 살 때는 하루 종일 텔레비전이 켜져 있었다. 집에서 아무 소리도 나지 않으면 어색했고 쉴 새 없이 들리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있어야 오히려 편안했다. 하지만 이젠 더 이상 집에서 소리가 나지 않는다. 텔레비전이 없는 집은 고요하다. 그 고요에 익숙해지는 것에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쉼’이라는 단어와 꼭 어울리는 집이 되었다.      


어색하지 않고 심심하지 않고 소리 없는 밤이 무섭지도 않았다. 생각이나 행동이 tv 소리와 영상에 삼켜지지 않으니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무슨 생각에 빠져있는지가 또렷해졌다. 버리는 시간이 줄고 집 안을 느리게 서성거리는 시간이 조금 생겼다. 그 시간을 잔잔한 피아노 연주곡으로 채우기도 하고 점잖은 캐모마일 향으로 채우기도 한다. tv를 편애했던 나의 시선은 창문으로 옮겨져서 하늘도 보고 바람도 구경한다. tv라는 절친과의 헤어짐에 아픔은 없었다고 하면 그가 좀 섭섭할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글쓰기라는 친구가 그의 빈자리를 허전함 없이 꽉 채워주고 있다는 소식까지 듣는다면 배신감까지 느끼려나.


좋은 친구를 사귀고 싶으면 먼저 옆자리를 비워야 한다. 옆자리가 비어서 외롭다고 슬퍼하지 말고 고요하게 기다린다. 기다리면서 내 옆자리를 내어주고 싶은 친구는 어떤 이인지 생각해본다. 그래야 누군가 ‘안녕’ 하고 인사했을 때 내 옆 빈자리를 내어줄지 말지를 판단할 수 있다. 또다시 떠나보내야 할 친구가 아니라 오래도록 함께 할 친구를 알아볼 수 있다. 내가 선택한 이별과 그 뒤에 찾아온 고요는 내게 평생 친구를 선물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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