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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은성 Mar 20. 2022

쇼핑을 적으로 만들지 않는 법

몇 달 치의 카드 이용 내역서를 들여다본다. ‘나‘라는 사람이 이렇게 단조로운 삶을 살고 있구나 싶은 그리 놀랍지 않은 사실을 발견한다. 늘 들르는 카페에서 늘 마시는 커피를 사고, 늘 가는 마트에서 늘 사는 식재료들을 샀다. 얼굴에 바르는 로션도 늘 같은 것으로 주문했고, 불규칙하고 충동적으로 자주 책을 샀다. 예상 밖의 소비는 없다. 카드 이용 내역만으로 본 ’나‘는 무슨 재미로 살까 측은한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세상 재미없는 사람처럼 보인다. 한 사람의 삶이 고작 카드 이용 내역서 몇 장 해독하는 것으로 빤하게 들여다보인다는 것이 허무하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매일 들르는 카페에서 매일 같은 커피를 사더라도 어느 날은 아침 9시에, 어느 날은 오후 3시에 카드를 긁었다는 미묘한 시간의 차이가 있다. 내역서에 적힌 구매 내역과 숫자들로는 알 수 없는, 때론 달고 때론 짠한 다채로운 진짜의 삶은 바로 이 차이 속에 숨어 있다. 나의 삶의 의미는 내역서에 드러나 있는 품목과 가격에서가 아니라 드러나 있지 않은 이야기들 속에 꽁꽁 숨겨져 있으니 결코 보이는 게 다가 아니다.      


한 달을 기준으로 셈을 해볼 때 돈을 전혀 쓰지 않는 날이 며칠이나 될까. 정확히 헤아려본 적은 없지만 짐작컨대 3일 이상 되지 않을 듯하다. 확인해보는 건 간단하다. 카드 사용 내역에 찍힌 날짜들을 확인해보면 답이 나온다. 사는 행위에 중독된 것이 아닐까. 뭔가가 필요해서가 아니라 사는 행동을 하지 않음이 낯설고 허전해서 하루라도 뭔가 사지 않고는 불안한 지경이 된 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든다. 삶에 꼭 필요한 물건이라는 건 사실 손에 꼽을 만큼 적다. 대체로는 없어도 살 수 있고 더러는 없어서 더 잘 살 수 있는 물건들도 많다. 삶에 필요한 것들은 이미 모두 가지고 있다. 충분히 가지고 있으면서도 쉴 새 없이 살 것을 물색하는 행동은 아마도 공허한 마음을 물건을 소유하는 것으로 달래온 오랜 습관의 흔적이 아닌가 싶다. 사지 않고 흘려보내는 날을 늘려가고자 하는 바람은 있지만 그렇다고 나의 공허함을 달래주는 쇼핑 습관을 모두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요령껏 잘 이용하면 내 마음 달래주는 데 쇼핑만큼 확실한 건 없다는 자본주의적 지혜를 발휘할 수 있다.

    

쇼핑은 마음을 채우는 묘약이 되기도 하고 마음을 비우는 명약이 되기도 한다. 먼저 마음을 채우기 위해 나서는 쇼핑은 두 가지 결핍을 견디지 못해서다. 그중 하나는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다. 사람을 만나 눈을 맞추고 웃음을 머금을 수 있는 대화의 순간이 그리울 때 마음에 허기가 진다. 당장 마음의 허기를 달래줄 누군가를 찾아 나서기 어려우니 응급처치 삼아 나를 잠깐 속여서 달랜다. 우는 아이 아이스크림으로 달래듯 이쁜 물건 하나를 쥐어주면 짧은 시간이나마 만족감을 맛보며 쓸쓸한 마음을 잠깐 모른 체 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보다 더 근원적인 것인데 바로 ‘나’와의 대화의 결핍이다. 그런 날이 있다. 내가 그림판 퍼즐 조각들처럼 흩어져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날. 흩어진 조각들을 그림판에 하나하나 끼워 넣어 완성하면 어떤 그림인지를 알 수 있을 텐데 조각들이 모두 흩어져 있어 도대체 어떤 그림인지 알아볼 수가 없는 상태의 날이. 그런 날 흩어져 있는 마음을 추스르고 싶을 때 바깥에 나가 물건들을 구경하면 마음을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것에로 집결시킬 수 있다. 그게 하얀 머그컵이 되었든 줄무늬 양말이 되었든 정신 집중의 신호탄이 되어줄 수 있다.      


때로는 혼란스럽고 산만한 마음을 비우기 위해 쇼핑을 나설 때가 있다. 마음을 비우기 위해 쇼핑을 나선다는 말은 일견 우습다. ‘비우다’가 ‘사다’로 실현 가능한 것이었던가. 그런데 한 번쯤 이런 경험들 다 있지 않을까. 스트레스를 받았거나 마음이 복잡하거나 생각이 많아서 머릿속이 뒤죽박죽일 때 쇼핑을 하고 나면 해소되는 기분을 느낀 경험 말이다. 시선이 물건에 사로잡히면 정신은 눈을 따라간다. 흰색이 좋을지 검은색이 좋을지 고민이 시작되면 조금 전 머릿속을 채웠던 불쾌한 생각들은 마음을 빼앗는 물건들에 자리를 내주고 물러나 앉는다. 형체를 갖지 못한 못난 마음들은 구체적인 모양과 색을 가진 물건들 앞에 더이상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독점하고 있던 나의 집중력을 빼앗기고 만다. 내 집중력을 붙들어 매어 놓지 못한 어두운 마음들은 결국 기세를 누그러뜨리고 색을 빼앗겨 점점 존재감이 옅어지다가 끝내 별것 아닌 것이 되어버린다. 기껏해야 작은 화병 하나, 반팔 티셔츠 한 장으로 머릿속 가득 끼어있는 먼지들을 털어낼 수 있다면 꽤 괜찮은 거래이지 않은가.      


할 일이 많아 시간에 쫓겨도 일이 손에 잡히지 않고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럴 땐 서점이나 문구점을 들른다. 다리가 아플 때까지 서점 구석구석을 탐방한다. 구경이 끝나면 온라인 서점에서 구매할 계획으로 장바구니에 넣어 두었던 책들 중 하나를 골라 사서 나온다. 집에서 배송된 책을 받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구체적인 만족감이 번진다. 직접 만져보고 들춰보고 제일 이쁜 녀석으로 고르는 재미는 온라인 쇼핑의 편리함과 바꿀 수 없다. 장바구니에 가득 담긴 물건들을 결제하는 것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마음이다. 직접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이거 살까 저거 살까 마음껏 고민한 후에 선택한 물건을 손에 들고 돌아올 때 채워지는 마음이다. 그러고 나면 갈팡질팡 하는 마음은 가라앉고 해야 할 일에 기꺼이 집중할 수 있게 된다. 


마음이 산란한 날, 그런 내 기분을 알아주는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다. 햇볕을 친구 삼아 산책을 할 수도 있고 따뜻하고 잔잔한 차 한 잔을 권할 수도 있다. 산책이나 차에 비하면 쇼핑으로 마음을 달래는 건 왠지 속물인 것 같은 불편한 마음이 뒤따른다. 그런데 너무 멋지게만 살 수 있나. 가끔 속물이 될 때도 있고 참을성 없는 아이가 될 때도 있는 거지. 큰돈 써서 빚더미에 앉는 것도 아닌데 스스로를 너무 다그치지 않기로 했다. 즉흥적이고 소소한 쇼핑들이 마음의 안정에 도움이 된다면 지나치게 의존하는 깊은 친구로 만들지 말고 가끔 만나 즐거운 친구 정도로 사귀어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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