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살아도 혼자는 아니랍니다
-식물과 함께 산다는 것-
베란다에 화분이 두 개 있다. 독립을 시작하고 10개월이 되었을 즈음 불순한 목적을 가지고 다소 즉흥적인 결정으로 율마 화분 두 개를 샀다. 불순한 목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식물에 대한 관심에서 결정한 동거가 아니라 집을 이쁘게 꾸미는 장식적인 역할을 떠맡기기 위해 데려왔기 때문이다. 즉흥적이었다고 한 것은 평소에 식물을 키우는 것에 대한 호기심이 전혀 없었고 내 인생에서 화분을 키우는 일을 상상조차 해본 적 없었던 사람의 갑작스런 선택이었기 때문이다. 관심 없었던 일이 현실이 되면 예상치 못한 비극적 사태를 마주하게 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몇 년 전 교습소를 오픈했을 때 형부가 내 키만 한 행운목을 선물해주셨다. 상담실에 커다란 행운목 하나 있으니 공간의 분위기가 달라졌고 뭔지 모를 격이라는 게 한층 높아진 느낌이 들었다. 넓적한 잎의 초록색이 공간에 생기도 불어넣어주어서 여러모로 만족스러운 선물이었다. 생각나면 물이나 주면서 행운목이 풍기는 분위기를 맘껏 즐겨야지 생각했다. 그랬다가 아주 큰 코 제대로 다쳤다. 그렇지, 생명이 어떻게 공짜로 잘 살기를 바랐던 것일까. 함께 잘 살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었던, 아니 알아야 하는 게 있을 거라는 생각조차 못 했던 대가로 행운목은 하루가 다르게 말라 갔다. 물을 잘 주고 잎도 잘 닦아주었는데도 시들시들해져 갔다. 죽기 직전이 되어서야 부랴부랴 엄마 집으로 옮겨서 심폐 소생을 하고 응급 처치를 한 후에 겨우 살려냈다. 그 사건은 식물을 키우는 일은 나와 맞지 않는 취미라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10층에서 동남쪽을 향하고 있는 내 방에는 아침 시간에 햇볕이 깊숙이 들어온다. 집안 가득 햇빛이 들어앉은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귀한 예술작품 보는 즐거움 못지않은 충만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때로는 아름다운 것을 마주했을 때의 인간의 본성이 발현되어서 햇빛은 내일도 모레도 찾아온다는 사실을 잊고 무아지경으로 사진을 찍어대기도 한다. 집 베란다에 햇볕이 가득한 모습을 본 친구가 율마를 키우면 좋겠다고 조언을 했다. 희한한 것이 평소 식물에 대해 잘 모르는데 율마라는 이름을 들으니 어떤 나무인지 이미지가 바로 떠올랐고 집과 잘 어울리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화분을 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두 번 고민 없이 율마를 선택했다. 인근의 화훼 단지로 율마를 찾아 나섰다. 옹기종기 모여있는 녀석들 중에 모양이 잘 잡히고 건강해 보이는 것으로 고르려고 이것저것 들었다 놨다 하고 있는데 꽃도 피지 않는 나무를 왜 사려고 하느냐고 다른 예쁜 식물로 고르라고 말씀하시는 분이 계셨다. ‘저는 꽃 피고 열매 맺는 모습을 지켜보는 즐거움까지 생각할 레벨이 아니랍니다. 일단 살게 할 수 있느냐에 집중해야 하는 수준이랍니다.’라고 마음속으로 대답을 해드리고 율마 화분 두 개를 골라 집으로 돌아왔다.
책상에 앉으면 베란다 문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게 되는 자리에 화분을 두었다. 나란히 앉히고 보니 꼭 엄마와 아이 같아서 둘이 함께 있는 그림이 마음에 들었고 그것들도 낯선 곳에서 서로 의지가 되겠구나 싶었다. 초록이라는 색이 그런 것인지, 생명이기 때문에 그런 것인지 베란다에 그 녀석들을 들여놓으니 생기가 돌았다. 꽃도 피지 않는 그저 초록의 삐쭉삐쭉한 이파리들뿐이지만 파릇파릇한 향기가 베란다를 가득 채우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겨우 화분 두 개일뿐인데도 화분을 놓기 전과 후의 분위기가 확연히 달라지는 게 신기했다. 감사하게도 죽지 않고 시들지도 않고 무던하게 잘 적응해 주었다. 친구의 조언대로 햇볕이 잘 드는 자리에 앉히고 베란다 문을 항시 열어두어 바람이 잘 통하게 해 두었다. 물은 이틀에 한 번씩 아주 듬뿍 주었다. 그것뿐이었다. 그뿐인데도 한 계절 지날 때마다 훌쩍 자라는 게 눈에 보일 정도로 키가 아주 쑥쑥 자랐다. 옆으로 살집을 늘리지는 않고 키만 삐죽이 자라는 게 맘에 좀 걸리긴 했지만 그래도 생생하게 살아있다는 게 어딘가.
애초 동거의 목적은 그저 집을 이쁘게 꾸며보고자 하는 것에 불과했는데 그들로 인해 예상하지 못했던 감정들을 경험하고 있다. 묘하게 자꾸 시선이 간다. 그저 가만히 있을 뿐인데도 사랑스러움이 느껴진다고 할까. 특히 마음의 여유를 즐기는 시간에는 늘 그 녀석들에게 말을 걸게 된다. 은근한 눈빛으로 바라보면서 오늘 바람 냄새는 마음에 드는지, 햇볕이 몸 구석구석 잘 비추어주고 있는지, 나 커피 마시는 모습은 잘 보이는지 물어본다. 그리고 너희 덕분에 커피 맛이 더 좋다고 고맙다는 말도 전한다. 이틀에 한 번 물을 주고 생각날 때 화분 방향을 조금 돌려주는 게 다지만 결코 아무것도 아닌 일은 아니다. 관심이 조금만 소홀해지면, 다른 것에 정신이 팔려 보고도 지나쳐버리는 날이 길어지면 잎의 끝이 마른다. 물이 부족해서 마르는 것이 아니라 물을 주는 사람의 마음이 부족해서 마른다. 결국 마음이다. 마음을 써야 살게 할 수 있다. 항상 지켜보면서 무엇이 필요할까 생각하고 필요한 것을 넘치지 않게 주어야 산다. 그들이 내 시야 안에 항상 있었기 때문에 잊지 않을 수 있었다. 바로 이것이 핵심이었다. 책상에 앉아 밖을 내다보면 제일 먼저 율마가 보인다는 것. 그래서 매일 그 녀석들을 바라봐주었다. 아, ‘주었다’는 건 어울리지 않겠다. 바라보면서 기쁨을 얻은 건 오히려 내 쪽이니까. 생명이기 때문에 그들에게서 느껴지는 다정한 온기가 있었다. 흐뭇해졌고 바라보는 자체로 기쁨이 느껴졌다. 귀여운 강아지처럼 꼬리를 흔들거나 별빛같이 빛나는 눈동자로 쳐다봐주진 않지만 우리는 분명 교감하고 있다.
율마를 데려온 지 1년이 지났다. 1년 동안 무럭무럭 자라서 화분이 그 녀석들 키에 비해 좀 작아 보인다. 아이들이 한창 클 나이엔 봄에 입었던 티셔츠를 가을에 입히려고 꺼내면 팔이 짧아지고 몸통도 작아져서 꼭 동생 옷 입은 것처럼 댕강한 모습인데 지금 우리 집 율마 화분이 딱 작아진 티셔츠 꼴이다. 분갈이라는 것을 해야 할 때인가 보다.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일은 해보기도 전에 벌써 귀찮다. 화분을 볼 때마다 귀찮다는 생각이 들어서 차일피일 미루고 있다. 그런 걸 보면 아직도 화분과 함께 살 자격이 없구나 싶다. 좋은 것만 즐기고 이쁜 것만 보고 싶은 것 아닌가. 함께 하기 위해선 좋은 것만 할 수 없다는 건 만고의 진리거늘 왜 그건 잘 학습되지 않는 걸까. 식물과 함께 살기 위해서는 동물과 함께 사는 것만큼은 아니겠지만 나름의 수고를 감내해야 한다. 책임이 따르는 일이다. 법정 스님께서 그토록 애지중지 아끼시고 사랑 주시던 난초 화분을 떠나보내셨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그 마음만 헤아리고 나는 나의 화분과 조금 더 함께 살 방도를 찾아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