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생 때는 수업시간마다 다회 발표할 기회가 주어졌었다. 하지만 기억하는 한 단 한 번도 자의로 손을 들어 발표하는 일은 없었다. 타의라고 한다면 선생님이 정해놓은 규칙에 의해서 어쩔 수 없이 하는 일을 말하는데 예를 들면, 하루에 몇 회 이상 발표를 꼭 해야 한다는 규칙이나 4명 정도로 이뤄진 모둠인원 모두가 몇 번씩 발표를 해야 모둠 전체가 별점을 받을 수 있다는 규칙에 의해서 모둠 친구들이 나를 가만히 두지 않아서 일 때가 그랬다. 이런 상황을 제외하고는 정답을 알아도 몰라도 생각이 있어도 없어도 발표 같은 건 절대 하지 않았는데 심지어 꼭 발표가 아니더라도 수업시간에 전체에게 던져지는 질문에도 굳이 크게 입을 열지 않았다. 알아도 몰라도 생각이 있어도 없어도 말이다.
발표랑은 평생 데면데면한 내가 외국어를 사용할 땐 가끔씩 억울한 기분을 느껴야 했다. 뱉고 있는 말이 외국어라는 이유가 내성적인 성격의 이해보다는 외국어 능력에 대한 잣대로만 해석된다는 점에서 그랬다. 할 줄 아는 말도 공개 석상에 가면 매끄럽게 잘 안 나오는 건 모국어도 마찬가지인데 외국어를 쓰게 되면 성격이 아니라 외국어 수준으로만 평가되니 말이다. 물론 모국어 보다 더더욱 안 나오는 건 사실이지만, 가끔씩은 내 이름은 누구입니다 도 당차게 안 나오고 고작 한 문장만 말하는데도 머리가 정지가 되어 공백을 크게 두게 될 때, 이게 다 성향 문제이지만, 가끔씩은 직접적으로 공부하라는 소리도 들어야 하며 그렇지 않더라도 본 능력보다 저 평가되었을 걸 생각하니 베갯잇 젓을 만큼 억울한 일이다. 친구랑 스몰톡 정도는 쉽게 잘 되는데요?라고 생각한 들 내성인의 외국어 스피킹 공부는 허무, 허탈로 좁혀진다. 혼자만 떠들면 뭐 하나 정작 능력 발휘 및 과시해야 할 때는 처음으로 돌아가는 것을.
공부하는 외국어가 서양이면 내성인은 외향인이 되지만 상대적으로는 더 내성인이 되는 기분을 느낀다. 그러니까 서양인들이 외향적이라 그들의 분위기를 맞춰서 한국어로는 보일 수 없는 외향적인 태도를 갖춤에도 불구하고 그들 사이에서는 한국인들 사이에서 보다 더 내성인이 되는 걸 체감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펼쳐진다는 거다. 한국말로는 하지 않을 리액션도 취하고 한국말로는 하지 않을 선질문도 하고 한국말하면서는 하지 않을 커다란 표정과 액션을 취하는데 아무리 오버액션을 해도 그들의 액션은 흉내 낼 수가 없는 게 그들과 대화하면 내성적인 성격이 더 크게 그 공간에서 도드라지고 있음을 눈앞에서 확인하게 된다. 그들은 모르겠지, 지금 내가 인생에서 얼마나 최대치의 외향성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 그렇다고 외향인들이 오해하면 안 되는 건 내향인들이 지금 적응을 못하고 있는 건 아니라는 사실이다. 충분히 적응을 해서 일상적이고 편안한 상황에 이른 게 이 정도인 거다. 어쩌면 외향인들이 우리의 소극적임에 적응을 못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특히 서양 친구들은 나와의 관계를 적응 못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난 당신과 대화하지 않고 있는 지금이 불편하지 않습니다만...?
한국인도 외국인도 아무도 모르겠지만, 실은 외국어로 단전부터 외향력을 끌어올리는 경험들이 쌓여 그 덕에 발표를 하는 순간 외국어로 말할 때가 한국어로 말할 때보다 더 자신감 실려 있는 태도가 된다는 걸, 나만은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