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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윤희 Oct 24. 2021

나는 새롭게 태어날 거야.

   죽다 살아남은 사람들이 말하길, 죽는구나 싶었던 그 순간 인생이 머릿속에 필름처럼 지나갔다고 했다. 올림픽에서 메달을 딴 선수들도 시상대 위에서 자신의 인생이 필름처럼 지나갔다고 말하는 경우를 종종 보았다. 그런데 죽을 순간이 아니어도 올림픽 시상대에 올라서는 일처럼 대단한 순간이 아니어도 살다 보면 그런 순간이 오기도 하는 건지. 아무 이유도 없이 어느 날 갑자기 머리를 쿵 내리치듯 지나온 인생이 정리가 되었다. 이게 바로 그들이 말한 '인생이 필름처럼 지나갔다.'와 같은 느낌인 걸까?


 

   어이가 없게도 수업을 듣다 말고 내가 지금 여기 왜 있지? 하는 생각과 함께 찰나의 순간만에 내 인생이 모조리 읽혔다. 그리고 울컥한 마음을 삼켜내기까지에 이르렀다. 이상하게 머릿속에 그려진 인생이 슬픈 것도 너무 좋은 것도 아니었는데도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감동, 아름다움 뭐 그런 언저리를 자극한 거 같았다. 보잘것없는 삶이라도 그 자체가  존귀하다는 게 이런 걸까?



   태어나서 가장 먼저 만났을 사람, 내 운명을 결정지은 내 가족과 배경, 내 기억 속엔 없지만 가족이 기억해 주는 어릴 적 소소한 순간들과 내가 하고 있는 기억들 그리고 나를 채워 온 사람들, 경험들 또 노력을 쏟아부은 것들... 그 모든 것들이 지금 내 모습의 원인과 이유이자 운명이었다는 사실이, 현재의 나, 현재의 내 모습을 이해시켰다. 이 날, 이곳에서, 이 모습을 하고, 이 수업을 듣도록 지어진 운명. 운명은 목청껏 울며 엄마 뱃속에서 나온 그날부터 열심히 나를 이곳으로 밀어 왔던 거다.



   이 모든 게 운명이라... 운명이 이 정도일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이 좀 씁쓸했다. 그러면서도 또 한편 용기가 생겼다. 끝없이 의심해 온 내 삶이, 마땅한 것이라고 그럴 만한 가치를 가진 사람이라고 말해주는 거 같았기 때문이다. 모든 군더더기들이 털어지고 그와 동시에 마음에 중심이 섰다.



   태어난 순간을 상상했다. 태어난 순간부터 가지고 있었을 것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했다.  오로지 그것들 만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기 시작했을 것이며 그게 무엇이  아무것도 모른  그저  세상이 신비롭고 새롭기만 했겠지? 그땐 과거로부터 끌고 들어온 감정도 없었을 테고, 부여잡고 있는 감정도 없었을 테고,  존재가 아프지도 않았을 테다. 그저 현재 주어진 이것이 나의 것이고,  세상이 전부였으리라. 그렇다면 부여잡고 때때로 마음을 혼미하게 만들었던 모든 감정을 청산하고 새롭게 태어나면 어떨까? 감정을 제외한 현재 가진 모든 것들이 나에게 주어진 기본 아이템이라면, 미처  챙겨 오지 못한, 나의 것이   없었던 아이템에 대해 아프지 않을  있지 않을까? 그날 반갑지 않은 감정들의 지배가 좀처럼 끝나지 않고 지쳐갈  새롭게 태어나야겠다 생각했다.  기본 아이템은 오직 필름이 지나치던 순간 마음에 세워졌던 ‘중심 전부일뿐.



    나는 새롭게 태어날 거야. 그런 마음을 먹었더니 무겁고 찝찝하게 자리를 차지하던 검은 때가 한순간에 씻겨져 내려갔다. 한참을 뒤흔들던 기억들이 사라질 리 없었지만 마치 전생처럼 아득하게 보였다. 그저 아련하게 그 감정을 회상할 수 있었다. 그 회상이 더 이상 나의 현재가 아닐 수 있었다. 그리고 걸음걸음 익숙하게 걷던 거리를 걷는 발바닥의 촉감까지도 설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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