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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윤희 Oct 23. 2021

나는 나일뿐이다.

아픔을 견디는 법

   스스로에 대해 습관적으로 해명하고 다니는 게 있다면, ‘원래 연락을 잘 안 해요.’다. 연락이란 게 사람마다 스타일이 다 다른 거지만, 대부분은 연락의 빈도를 친밀도의 척도로 여기거나 상대에 대한 호감 표시로 여기는 듯했다. 그래서 종종 상대에 대한 나의 마음을 오해받곤 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노력을 해도 카톡을 하루 종일 즐기는 사람처럼은 될 수 없었고, 노력을 해도 필요한 말과 간단한 재미 이상은 번거롭고 귀찮다고 여기는 기질이 계속 제 자리를 찾아가려고 드는 걸을. 자꾸만 제 자리를 찾아가려 드는 이 본능을 이겨 낼 수 없었다. 그렇다고 성격이 조용하고 차분하냐고 묻는다면, 이 세상 이런 수다쟁이가 없다고 수줍게 고백하겠다. 뭘 또 시시 콜콜 손가락으로 떠드나, 만나서 얼굴 보고 떠들지.           



   연락에 큰 의지가 없어서 인지 필요 이상의 시시콜콜한 카톡에는 할 말 없게 대답하는 나를 발견한다.  의도 한 건 아닌데 내가 던진 대답을 보고 있자면 내가 생각해도 상대가 그다음 말을 잇기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연락에 대한 의지는, 관계의 지속성 혹은 깊이에 대한 의지와 비슷하게 해석이 되기도, 상대에게 서운함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후로는 내가 한 답장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뭐가 문제일까? 해결책은 굳이 찾지 못했다. 기껏 새로운 화젯거리를 던져보았을 뿐 그 마저도 그리 길게 오고 가진 못했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그럼에도 내 카톡 세계에서 신기한 점은 현장이 아닌 카톡으로도 나를 떠들게 만드는 사람들이 있다는 거다. 재미없게 구는 나의 답장에도 개의치 않고 계속 답장하도록 만드는, 내 수다의 진가를 카톡에서도 발현되게 만드는, 뭐 그런 대답을 하는 사람들. 이상하게 그들의 카톡은 번거롭지 조차 않다. 비결이 뭘까? 그들과의 카톡을 아무리 분석해 보아도 그 비결은 알 수 없었지만, 그 기술은 분명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능력이었다.



   요즘 SNS에는 ‘OO 한 사람 특징’과 같이 출처 모를 분석 결과 값이 떠돈다. 적게는 약 5가지 특징, 많게는 약 10가지 특징으로 정리해 놨다. (결국은 책 홍보인 경우가 많다.) 인간의 행동은 본인도 다 알 수 없는 무수히 많은 이유들이 복합되어 나오기 마련이다. 뿐만 아니라 어떠한 특징을 보이는 사람들을 단 몇 가지로 정의 내릴 수 없다. 그럼에도 광고처럼 끝없이 튀어나오는 OO 한 사람 특징이라는 제목은 내가 sns에 소비하는 시간을 증가시키는데 큰 몫을 했다. 나는 그것들을 보며 주로 공감을 했고, 스스로의 희망사항과 같은 특징을 보며 나와 부합하는 내용이 조금이라도 있을 땐 스스로를 그런 특징을 가진 사람으로 끼워 넣었다. 또 이상향 같은 특징은 고개를 끄덕이며 학습을 하기도 했다. 그런 사람이 되려면 이렇게 해야 하는구나 하고. 그리고 무엇보다 요즘 나의 화젯거리는 카톡이었기에 대화를 잘 이끌어 내는 사람의 특징 같은 글에 몰입했다. 글에서 학습하길 대화를 잘 이끌어 내는 사람의 특징은 내 이야기를 많이 하기보다 상대에게 질문을 던져 상대를 말하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고개를 끄덕이며 나의 부족함을 입력시켰다.



   또 내가 상대로부터 마음에 대해 오해를 사는 게 있다면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는 거였다. 여기서 말하는 이야기란 나의 아픔, 힘듦, 고민, 하다못해 나를 고통 속에 빠트리는 그 어떤 것에 대한 흉, 욕 조차도 숨겨내는 나를 보고 하는 말이었다. 대게는 관계가 깊어지면 비방용 같은 내용들을 털어놓으며 마음을 해소할 대상을 만들기 마련이니까. 그건 신뢰와 믿음이 바탕이 되어야 하는 일인데 그렇지 않은 나를 보고 주변에서는 서운함을 느끼거나 벽을 느낀다고 했다. 하지만 사실 내가 그래 왔던 건 우리 우정의 신뢰나 깊이 문제가 아니라 스스로가 가진 대부분의 문제들을 철저히 무시해 왔기 때문이다. 입 밖으로 내뱉아 그 실체를 다시 보고 싶지 않았고, 흔들리고 싶지 않았고, 나의 인생에 포함시키고 싶지도 않았으며, 무엇보다 회피하고 이겨내고 극복하는 일이 너무나 금방이었기 때문이다. 과장을 좀 보태서 숨 쉬듯 쉽게 할 수 있는 일일만큼 가볍게 이겨낼 수 있었기에 말해서 털어낼 거리도 못되었다. 그래서 늘 이렇게 말하곤 했다. '말할 게 없어.', '힘든 게 없어.', '말할 필요도 없이 혼자 다 이겨낼 수 있는 일이었어.'



    단단하게 다져놓은 아니, 딱딱하게 다져놓은 마음에 탄력을 만들어 보고자 가장 먼저 다짐한 건 감정에 흔들려보고 그 흔들린 감정을 세상 속에 입으로 내뱉어보는 일이었다. 그건 나의 약함을 인정하고 어딘 가에 의지해 보겠다는 선언과 같았다. 그리고 세상에 뱉어 스스로에게 그 실체를 드러내는 일, 약한 나를 세상에 의지시켜 보는 일이 곧 탄력이 생기는 일이라 생각했다. 처음으로 나 이토록 아프다고 말하는 순간, 그 순간이 탄력 +1을 추가시킬 수 있는 날이 될 거라고, 그렇게 스스로 결정해버렸다.



    기억을 하는 한 난생처음으로 감정의 이동경로에 대해 실시간으로 읽어 내는 중이다. 마치 일기예보를 매일같이 체크하듯이 말이다. 해가 너무 뜨거우면 괜찮지 않고 더웠고, 추워지니 추웠고, 비가 오니 밝은 하의가 얼룩덜룩해 질까 싶어 하나도 괜찮지 않았다. 젖는 걸 완전히 피할 수 없지만 그래도 우산 같은 걸 펼쳐 들기 시작했다. 즉, 오는 비를 완전히 막을 수도 해를 뜨게 할 수도 없었지만, 비 오는 걸 인정하고 얼룩 해질 하의가 하나도 괜찮지 않아서 방어하기 시작한 거다. 비? 그게 뭐야? 다 괜찮아하고 혼자 태양 아래를 걷는 듯 걸어버린 게 아니라.



    드디어 우산을 쓰게  나의 우산은 함구였다. ‘말하지 않기.’ 이건 분명히 회피가 아니었다.  감정을 인정했고, 감정에 흔들릴 수도 있고, 그러기에 충분한 일이라고 인정했다. 그리고 그에 대해 가장 먼저 하고 싶었던 , 어딘가에 말을 뱉지 않고 나와  둘이 하는 충분한 대화였다. 이게 내가 아픔을 이겨내는 방식이라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나의 아픔까지도 소중했기에 아껴주고 싶은  같다. 나의 모든 서사를 이해하는 유일한 사람,  자신과 충분히 대화를 하고 이런 모습이어도  괜찮아졌을 , 누가 뭐래도 나만은 나를 품어줄  있을 , 어떤 말도  괜찮을  같을 , 세상 밖에 넌지시 대충 말했다. (탄력을 키우기 위해 뱉기를 다짐한  다짐 때문은 아니고 어쩔  없이 말을 해야 하는 상황도 있는 거니까.) 그리고 탄력 +1 생겼음을 감지했다. 말을 뱉기 전부터도 말이다. 만약 여전히 함구를 했더라도  탄력 하나를 장착한 사람임이 틀림없다. 



   세상의 많은 조언은 힘듦은 털어라, 말을 하라 였지만, 과연 정의된 방법이 어딨을까. 말을 하지 않아서 치유가 되기도 하는 거 아닌가? 그냥 각자의 방법이 있는 거 아닌가? 그리고 이쯤에서 시간을 소비해 가며 대화를 잘 끌어내는 사람의 특징을 학습하다 말고 헷갈리는 점이 있다. 나는 대화를 못하는 사람인가 잘하는 사람인가. 뚝뚝 끊기는 카톡을 하는 스스로에게 꽂혀 대화라는 주제에 시선을 빼앗겼지만, 돌아보면 나는 뚝뚝 끊기는 카톡을 한 그들과 현장에서 만나 대단한 수다쟁이 모드였다. 그러니까 그냥 대화를 뚝뚝 끊기게 하는 사람도 8시간 쉬지 않고 수다를 떨 수 있고, 8시간 수다를 떨 던 사람도 24시간 모든 일상을 공유하고 싶지는 않을 수 있다. 난 그냥 그런 사람이다. 정의고 특징이고 그런 게 다 어딨나. 아픔을 이기는대도 대화를 하는대도 난 그냥 나면 그뿐 아닌가. 특징이라면, 그냥 나, 개인 그 자체가 특징인 게 아닐까. 나는 나일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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