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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윤희 Feb 14. 2022

울면 안 돼, 산타 할아버지가 선물 안 주시니까.

   ‘울면 안 돼, 울면 안 돼, 산타할아버지는 우는 아이에게 선물을 안 주신데요~’


   어릴 때 배운 울음에 대한 인식은 울지 않는 어린이는 착한 어린이, 우는 어린이는 울보로 불리게 되는 거였다. 고로 울지 않는 씩씩한 어린이가 되도록 교육받았다. 물론 그 뜻이 별별 작은 일에 너무 울지 말라는 의미이자 떼쓰지 말라, 울음을 무기로 사용하지 말라는 의미의 교육이지만, 그 깊이를 명확하게 배우지 못해서 우리 인식 속에는 우는 게 부끄러운 행위가 되었고, 울지 않아야만 씩씩한 사람, 씩씩한 사람이 우위에 있는 사람이 되었다.




   TV 예능 집사부일체에서 가수 이승기는 근 4년간 울어 본 적이 없는 거 같다고 털어놨다. 우는 법을 잊어버렸나 하는 생각이 든다고, 감정을 커트해 버리는 거 같다고 했다. 그가 어떤 사연을 가지고 어떤 마음을 중심에 두고 살아가는지 모를 일이지만 그 자세한 이야기를 듣지 않고도 그의 상태를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럴 수 있어.’



    

   이승기는 어디 하나 빠지는 게 없어 보인다. 잘생긴 외모, 큰 키, 가창력과 대상으로 증명해낸 예능인으로서의 가치 그리고 논란이 없었던 연기력까지. 10대 때 데뷔하자마자 스타가 되어서 30대가 된 지금까지 논란 없이 연예계 생활을 이어가고 있는 굴곡 없어 보이는 그의 인생이지만 왜 울 일이 없었을까. 밝고 때 타지 않은 좋은 사람 기운을 풀풀 풍기는 그의 에너지 속에 밝아야 한다는 강박 혹은 감사해야 한다는 강박 그리고 힘듦에 대한 회피가 담겨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그의 울음에 관한 고백에서 느낄 수 있었다. 울지 않고 힘듦과 아픔을 잘 이겨낼 수 있으면 좋은 거 아닌가 그럼에도 괜찮을 수 있으면 좋은 거 아닌가 싶을지 모르지만, 그게 곪고 곪아 어떤 파장을 일으키는지 그래 보지 않은 사람에게는 설명되지 않는 그 무언가가 있다.




   우리가 경험하고 익힌 모든    어딘가에  저장되어 있다고, 우리 몸은  기억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감정을 회피하고 정신력으로 이겨내 버리면 당장은 이겨낸  같지만 마음 어딘가에 해소되지 못한  묵혀 있던 감정이 어느  폭발해 버린다. 답답한 가슴이 디가 실마리 인지도 알려주지 않은  갑갑하게 군다. 그럼 나는 감정의 히스테리를 아무 힘도 발휘하지 못한  당해내다가 시간을 적당히 흘려내며 묵혀냈다. 그런 나에게 세상은 이따금씩 ‘울고 싶으면 울어도 된다,   울어야 한다.’ 같은 문구를 띄웠다. 하지만 별수 없는 , 언제가 울어야 하는 타이밍인지   없는 내가 있고, 울어도 되는 상황인  같을 때도 우는 법을 몰라서 괜찮은 가보다 하고 흘려보낸 내가 있기 때문이다. 괜찮았을  없는 일들에 대해 스스로 조차 괜찮은  알고, 금방 괜찮아진  알고 그렇게 평생에 걸쳐 겪은 여러 사건에 대한 감정들을 지워낸  묵혀냈다.




   그동안 우는 법을 잊어버린 건 아닌가 하고 의심해 본 적도 울어보자고 마음먹은 적도 여러 번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내일 있을 어떤 것 때문에 오늘은 안 돼, 며칠 뒤 있을 어떤 것 때문에 그때까진 안 돼 하며 절제력이 태클을 걸었다. 지금이야 하는 순간엔 울음이 나질 않아 울지 않고 지나쳤다. 울음이 나지 않기에 괜찮은가 보다 하고 넘어갔지만 실은 감정의 실체를 깊이 들여다볼 용기가 나지 않았거나 약해질까 두려웠던 걸지도 모른다. 절제, 스스로에 대한 보호가 결국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만든 과잉보호는 아니었을까?




   감정절제를 풀어내고 감정에 진실을 들여다보기마음먹은 , 묵혀있던 사소하고 자잘한 감정들이 무차별적으로 공격을 하듯 튀어나와서 감정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감정들을 받아내고 견디다가 어느  새로 태어나듯 살아야겠다는 해결책과 함께 거칠게 굴던 감정들이 꽤나 정리가 되는 듯했다. 머릿속에 평화가 찾아왔다. 하지만 이따금씩 떠오르는, 아파야 마땅했던 기억들을 피할  없었다. 그런 기억들이 불현듯 떠오를 때마다 감정은 그제야 아팠고, 명확한 이유를 가진 감정으로 인해 힘들었다. 스스로에게  감정을 인정하도록 허용했고 그리고 나니 감정이 끝없이 뜨거워졌다. 울고 있는 사람처럼 호흡이 불안정해졌다. 그리고 눈물  방울 없이  놓아 울었다. 콧등까지 차오른 눈물을 끝까지 폭발시켜내는 법을 모르는  같았다. 혹은 눈에서 액체가 흘러나오는 일을 두려워하는  같기도 했다.




   비록 마른 눈물이었지만 그렇게 마른 눈물을 흘리고 나니, 그렇다고 아무것도 어떠한 상황도 달라지는 건 없었지만 그럼에도 어느 한편 마음이 풀리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울면 괜찮아진다는 이해할 수 없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감정의 요동이 끝나고 알 수 없는 위로를 받은 기분이었다. 후련했고, 나를 울려냈던 명확한 이유, 오래된 이야기인 그 아픔은 더 이상 애써 감정을 컨트롤해 내지 않아도 될 만큼 묵직하지 않은 게 되었다. 그 케케묵은 일에 대해, 너는 (나는) 아팠노라고 인정했다. 위로했고 위로가 되었다.




   나는 평생 동안 씩씩한 사람이었다. 평생 동안 어떠한 우위에 있었고, 세상 어른들에게 그에 대해 칭찬을 받았고, 그를 통해 자존감을 높였다. 그런데 이제 와서 울고 싶을  울어도 된다니,   울어야 한다니. 나는 성실하게 마음을 붙잡다가 우는 방법을 잊어버렸는데...  배신감과 억울함을 어떻게 해야 하는 . 세상은 울어도 된다고 하면서 ‘울면   노래 가사는 여전히 바뀌지 않았지만, 나는 씩씩함에 대한 정의를 다시 쓰고 싶다. 회피하고 그럴듯하게 감춘  단단해 보일지 몰라도 씩씩함이 아니다. 씩씩함이란 충분히 아프고도 다시  털고 일어나는 현상, 그곳에 쓰여야 하는  아닐까? 넘어져 있는 동안 아픈 만큼 깊이 아파도 진한 울음을 터트려도  좋다. 다시 주어진 어떤 것에 흘러 흘러갈   있다면. (이런  진짜 단단함인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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