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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윤희 Apr 04. 2022

오늘도 사막 모래 위에 누워 잠이 들지라도

나를 아끼는 법 2

   스스로에게 냉정하게 판단하고 돌아서는 날들을 많이도 보냈다. 아마 스스로를 성찰하고 스스로와의 대화가 가능해진 이례로 거의 대부분을 차가웠던 거 같다. 부모에게 자식은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자식이라고 하지만 그 깊은 마음이 우려내는 표현은 제각각이다. 어떤 부모는 감싸고 돌기 바쁘고, 어떤 부모는 채찍질하기 바쁘며, 어떤 부모는 애지중지, 어떤 부모는 그 무게가 무거운 만큼 아프고 힘들어 손을 놓아버리기도 한다.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부모와 자식 간이라면 나는 나에게 마음이 깊은 만큼 바라는 게 많고 그래서 냉정한 평가만을 내리는 부모 유형에 속할 것이다. 좋고 소중한 내가 멋지고 잘난 내가 되길 바랐다.


 

   요령을 부리지 말고 정도를 밟아야 한다고 스스로를 가르치며 노력의 가치와 본질의 가치에서 벗어나는 일을 허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따라왔던 결과에 대해서 역시 너그럽지 않았다. 만족스럽지 않은 결과 앞에 과정을 인정해 주지 않았고, 적당한 결과 앞에서도 과정 속에 보였던 틈을 비판했으며, 웬만한 결과는 만족스러운 결과로 인정해 주지 않았다. 즉, 과정도 결과도 다, 보다 더 완전하기를 끊임없이 바랐다. 게다가 좋은 인간, 괜찮은 인간이기도 해야 했다. 바보 같거나 어리석지 않아야 했고(실은 똑똑하고 명확하고 현명해야 했다.), 규칙에 맞게 바르게 행동해야 했고, 도덕 책에 쓰인 대로 이상적인 인간이어야 했으며, 많은 이에게 좋은 영향을 가진 친구가 되어야 했고, 가식적이지도, 이기적이지도 않아야 했다. 아무것도 못나지 않아야 했다. 이 모든 게 남에 의해서가 아니라 나에 의해서, 자기만족을 위해서였다. 그러나 늘 그랬듯 하늘을 찌르는 기준 선 덕에 아무리 노력해도 만족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럼에도 나를 아끼고 좋아했던 건, 이런 가치와 시선을 가지고 노력하고 고민하는 나여서였던 거 같다. 그 또한 이상적이라 생각했으니까.



   지금 이렇게 쓰고 보니, 로봇이 아니고 완전하게 태어난 인간도 아닌 나에게 너무나 벅찬 조건들이다. 이 조건들이 그때도 나를 지치게 만들었던 거 같다. 하지만 완전한 내가 되길 바랐던 그때, 지치는 것조차 허용할 수 없었기에 끊임없이 나를 갉아먹으면서도 나를 일으켰다. 책, 글, 음악, TV, 카페, 피아노, 친구 이 모든 취미활동을 총동원시켜 아파할 틈 없이 끊임없이 스스로를 회복시켰다. 그리고 그럴 수 있어 행복했다. 이런 인간일 수 있어 좋았기 때문이다. 그때는 말이다.


         

   더 노력하고 더 열심히 해야 하는데, 마음만큼 몸이 따라주지 않는 나태한 내가 싫어 나를 갉아먹던 어느 한순간, 답지 않게 이런 마음을 살짝 털어놓은 적이 있다. (못나지 않아야 했기에, 아프다고 스스로가 잘 인정하지도, 남에게 밝히지도 않았기에 그런 일이 거의 없는 편.) 속 이야기를 하지 않는 내가, 그에게 카톡을 하기로 택한 건, 감정을 너무 심각하게 가져가지도 않고, 많은 걸 가볍고 유쾌하게 넘기지만, 그 속에 나름의 생각이 있는, 심플하게 대응해 줄 수 있는 아이였기 때문이었다.


   '나 너무 열정이 없고, 나태한 거 같아. 독하지 못해.' (큰 마음먹고 턴 마음이 고작 이 정도였다.)


   '지금도 너무 독하니까 걱정하지 마라.' (심플한 그는 더 이상 어떤 문제가 있는지 걱정하지도 깊게 묻지도 않았다.)


   그의 심플한 답장에 정곡이 조금 찔렸고, 양심도 조금 찔렸다. 주변에서 내 이미지는 내가 바라는 바, 애써온 바에 꽤 가깝게 가 있었을 뿐 아니라 늘 잘하고 싶어 난리가 나있는 상태여서 그랬고, 반면, 만족할 수 없어 늘 자신이 부족했고, 나태하다 생각했던 나만 아는 이면의 모습 때문에 그랬다. 어쨌든 그때 그 심플한 답장에 힘입어 또다시 일어났다. 하지만 어쩌면 그때 나는 그 답장에 긍정적인 회복력을 가질게 아니라 스스로가 스스로를 대하는 자세에 대해 의심을 했어야 했다. 주변이 다 알도록 뜨거웠지만, 자주 나를 채찍질했고, 마음만큼 몸이 따라주지 않는 나에게 스트레스를 받았고, 그런 나를 또 채찍질하며 어떤 흔들림도 허용할 수 없었던 스스로에 대해서 말이다. 과연 이 학대가 가치가 있는 일인가 하고 말이다. 아니, 적어도 학대는 아닐까 하고 말이다. 아니, 아니, 적어도 '나는 지금 잘하고 있구나.’하고 그 모습 그대로의 스스로를(혹은 그의 답장을) 믿어주기라도 했음 어땠을까.   

 


   돌아보면 그렇다. 스스로에게 썼던 글(일기 등..)에는 결국 파이팅, 할 수 있어, 잘 될 거야 따위의 희망을 퍼부었고, 읽은 책에서도 꼭 희망을 찾아내 감명을 받았다. 그것들이 나를 버티게 했고 지금의 나를 있게 하고 살아내게 했지만, 천체를 해석할 줄 모르는 내가, 나침판도 없이 사막을 걸으면서 희망을 끊임없이 끌어내고, 그 희망으로 인해 온전히 행복하기란, 그럴 수 있어 행복했지만 완전하거나 확실하기는 어려웠을지 모른다. 나의 숨결, 그 존재의 가치는, 내가 바라는 곳, 그 정처로 향하는 길인지 아닌지도 모를 사막 어딘가, 그 모래 위에서 비록 오늘도 누워 잠이 들지만, 나라는 끈을 놓지 않았음에 잘했고, 수고했고, 아무렴 다 괜찮다고 말하는 순간 발현되는 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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