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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윤희 Mar 14. 2022

돈이 대순가? 내가 대수이지!

나를 아끼는 법

   "고등학생 때 선생님 중에 한 분이 본인 생일 때가 되면 자신을 위해 고가의 선물을 한다고 했어. 그게 너무 멋있는 거야."


   A는 몇 번이나 이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훗날 사회인이 되었을 때 그런 어른이 되기를 꿈꿨다. 그에게 선생님이 멋있었던 건 여러 가지 이유가 내포되어 있을 거 같다. 일 년에 한 번이라도 고가의 물건을 살 수 있는 능력을 갖췄다는 점, 그 여유. 욕구만을 채운 소비가 아니라 가치 있는 소비를 했다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 오로지 자신을 위해 한 소비, 그 속에 담긴 의미, 자신은 스스로에게 존재만으로도 소중한 존재이다라는 의미의 그 행위, 그 행위가 가장 큰 이유였을 테다.



   경쟁으로 잔인해지고, 살아남기 위해 인류애를 저버린 이 삭막한 세상 속에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소확행', '욜로'를 외치기 시작했다. 마치, 다 필요 없고 숨 좀 쉬고 살자, 나 좀 살자, 나로 좀 살자를 외치는 것처럼 들리는 아우성 말이다. 사람들은 잘 살아보려고 경쟁하고 그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덤볐지만, 그렇게 아등바등 살아는 남았을지는 몰라도 결코 살지는 못했다. 정작 스스로는 말이다. 다쳤고, 피폐해졌고, 재가 되었다. 세상이 아팠고 결국 돌고 돌아 언제 끝날지 모를 인생이라는 인식과 함께 현재의 행복을 찾기 시작했다. '소확행,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 '욜로, 현재 자신의 행복을 가장 중시하고 소비하는 태도.' 이 모든 게 나를 위한, 나를 아끼는 행위가 아닌가. 이처럼 A의 선생님은 생일날 자신의 존재에게 깊은 표현을 전하고, A는 그 행위를 우상시하며 현재와 훗날의 자신을 아껴냈다. 또 세상은 욜로, 소확행이라는 말을 만들어 내며 결국 단순한 행복을 노래하는데, 그렇다면 '나의 행복'을 오래도록 외쳐 온 나는,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나를 아껴주고 있었을까?



   소확행이라는 말이 한창 유행하던 어느 날, B는 침대에 누워 이불은 덮고 리모컨으로 TV 화면을 빙빙 돌리는 그 순간이 자신의 소확행이라고 했다. 그 순간이 너무 좋다면서. 그 이야기를 듣던 순간 나는 나의 소확행을 당장 떠올릴 수 없었다. 언제나 인생에 가장 큰 가치는 '나의 행복'이었지만, 막상 언제든지 누릴 수 있는 소박하지만 행복한 그런 한 행위를 정해두지는 않은 것이다. 아니, 어쩌면 작은 곳에 있는 행복은 알아채지 못하고 거창한 행복만을 찾아다녔을지도 모르겠다. 없었을 리 없는 소소하지만 행복했을 순간들을 그럭저럭 당연한 듯 지나쳤던 건 아니었을까? 나는 대부분의 순간에 내가 행복하지 않은 일은 선택하지 않으며 살아왔지만, 정해놓은 특정한 행복 속으로 매일이고 스스로를 데려갈 수는 없었다. 늘 나의 지금과 성과, 그리고 미래와 관련된 내 행복만을 생각하며, 인생이라는 커다란 틀에서 비치는 행복만을 나름의 방식으로 누려왔나 보다. 그러니까 나를 위한 행복이었지만, 결국 나의 삶, 인생에 대한 행복이었지 살아 숨 쉬는 나의 숨결에 대한 행복이었던 적은 없었던 거다.



   생각이나 삶이 복잡할 때마다 책을 읽거나 글을 쓰거나 음악을 듣거나 예능프로 혹은 드라마를 봤다.  혼자 카페에  고립되는  또한 같은 맥락이었고, 말없이 이야기를 진득이 들어주는 피아노를 마음이 풀릴 때까지 치는 일도, 친구를 만나 딴소리로 머릿속을 가득 채워 회피해 내는 일도 그랬다. , , 음악, TV, 카페, 피아노, 친구... 나에게는  머릿속이 복잡할 때면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있는 선택지들이 많았다. 하지만 '소확행'이라는 단어 앞에 이런 순간들을 꼽아   없었던  왜일까? 그것들은 언제까지나 고통에서 도망치기 위한 자극적인 요소들일뿐이어서였을까? 미스터리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에 대한 미스터리를 가지 선물을 고 시간이 꽤 흐른 뒤에야 풀어낼  .



   실용적인 물건 외에는 굳이 많은 소비를 하지 않는다 (옷은 예외). 이건 절약정신이나 짠순이는 기질을 가져서가 아니라 단순히 소비 취향이자 성향이다. 국내여행은 물론이고 해외여행을 가서 조차 기념품이라는 이름으로 무언가를 사는 일이 잘 없다. 절제가 아니라 굳이 필요성도 큰 욕구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 내가 어느 날 감성을 불러일으키는 탁상용 조명과 잠들기 전 침대에 뿌리는 향수를 선물 받았다. 내 돈으로는 굳이 사지 않았을 물건들이었다. 그래도 이런 것들이 존재하고 판매되고 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겠거니 싶어 괜히 방 불 대신 선물 받은 조명 불 아래서 책을 읽거나 일기를 쓰는 날을, 침대에 들어가기 전 향수를 뿌리고 그 향을 맡으며 잠들어 보는 날을 애써 만들었다. 사실 처음에는 선물을 준 사람들에 대한 애정과 이런 물건들을 삶 속에 들여놓은 사람들의 기분을 느껴보고자 밤이면 종종 조명 불 아래 책 읽고 일기 쓰다 향수와 함께 잠이 들었지만, 본성으로 돌아가려는 인간의 본성처럼 머지않아 그런 밤들은 일상에서 사라졌다. 그런데 살아내느라 벅찼던 어느 날 문뜩 지친 마음에 오늘 밤은 침대에 향수를 뿌리고 잠들어야지 하는 마음이 든 게 아닌가. 그리고 스스로를 아끼는 느낌이 이런 느낌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향수를 뿌리고 잔다고 지친 마음이 다 괜찮아지는 것도, 내일 더 좋은 날이 오는 것도 아니겠지만 그래도 잘했다, 수고했다, 소중하다, 애정 한다는 마음을 품은 내가, 스스로에게 쏟아붓는 뜨거운 마음, 그 온기를 타고 나의 존재와 나의 숨결의 가치를 느끼는 순간, 그래서 모든 게 괜찮다 싶도록 위로받는, 그 작은 행위가 가진  뜻. 뭐 그런 느낌이 말이다.



   향수와 조명이 생각나는 날들이 많아졌고, 많아진다. 지치거나 체력과 사투해낸 날도 그렇지만, 스스로에게 실망한 날 혹은 잘 살아낸 날과 좋았던 날에도 나에게 따뜻한 마음을 건네고 싶은 마음이 든다. 소중한 나 자신아 다 괜찮아. 못나도 내가 있고, 힘들었다 해도 내가 있고, 잘했다고 한다면 알아주는 내가 있어. 비록 세상이 반응하지 않더라도 너의 매일과 그 가치를 알아주는 내가 있어. 아마도 향수와 조명을 떠올리는 날에는 이런 말들을 전하고 있는 거 같다. 또 이런 말들을 스스로에게 전할 수 있기에 흔들리는 날들이 있다 해도 괜찮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소문난 개구쟁이 가수 강남이 통장잔고 삼천 원을 시작으로 1년 적금을 든 적금이 만기가 된 날, 40만 원짜리 양복을 사 입고는 엄마한테 230만 원짜리 양복을 샀다고 그래서 돈 다 써버렸다며 장난을 쳤다. 그에 대해 강남의 엄마는 ‘잘했네~ 예쁘다!’라는 반응을 보였고, 엄마에게 잔소리를 들을 줄 알았던 강남은 당황하며, 잘했어? 하고 되묻는다. 그때 엄마는 이런 대답을 내놓았다. ‘아휴, 이런 날도 한 번 있어야지.’ A의 선생님의 생일 선물이 떠오르는 대답이다. 그래, 그렇다. 나를 위해 과소비하는 그런 날도 있어야지(비록 실용적이지 않더라도?).  돈이 대순가. 돈보다 나의 숨결, 존재만으로 더 가치 있고 소중한 나인데.



   그러니, 소비 앞에서도 삶 앞에서도 너무 냉철해지지는 말자. 아무렴 어떤가. 아니, 아니, 혹 뜻이 왜곡될까 봐 하는 말이지만, 나를 아끼기 위한 방식으로 꼭 (과)소비를 택하겠다는 뜻은 아니다. 소비의 명분을 만들어 버린 것도 분명, 분명 아닐 테다. 아무렴. 아무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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