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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윤희 Oct 18. 2021

얄밉게도 나를 살게 한다.

스테로이드, 간사함

   20년이 넘도록 스테로이드를 달고 살아야 할 운명이었다. 2-3년 전, 거짓말처럼 그들을 청산할 수 있게 되어 지금은 그동안 의존해 왔던 약의 5-10% 정도만으로도 살 수 있게 된, 기적에 살고 있지만 말이다. 기적이 일어나기 전 10년 즉, 스스로 관리할 수 있게 된 나이가 된 후부터는 무던히 스테로이드를 거부해 왔다. 피할 수 있을 때까지 피하고 기피하고 버티기 싸움을 했다. 하지만 사실 스테로이드가 없었다면 난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테다. 애증, 아니, 아니, 애는 그때도 지금도 없다. 싫지만 어쩔 수 없이, 더 살아 보려고, 결국엔 그에게 빌면서 의존해야 했던 그런 나의 갑이었다.


 

   걸핏하면 멋대로 스테로이드를 끊고, 머지않아 결국엔 그에게 손을 내미는 싸움을 하는 10년 동안 나는 그에게 의존하지 않고 이겨내는 법을 터득하고 싶었다. 치료가 되는 게 아니라 순간적으로 숨겨내는 깜짝 쇼나 하는 마약 같은 약에 놀아나고 싶지 않았다. 고쳐내는 것도 아닌데 언제까지 너를 신성시 여기며 속고 또 속아야 하는가. 당장은 마치 다 나은 것처럼 약효를 봤지만, 그가 숨겨놓은 게 돌아서면 고스란히 나타나고 또 나타났다. 그때의 실망과 좌절, 박탈감 같은 기분을 아는지. 그 반복을 계속 잇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기대도 하지 않고 그냥 아플게. 무엇보다 스테로이드는 내성이 생긴다고 하지 않았던가. 의존을 하면 할수록 결국 점점 더 높은 강도의 약을 써야 할 운명이지 않았던가. 매번 좌절을 하면서도 결국 또 그에게 매달리는 동안 그는 나를 속이며 또 다른 건강까지 조금씩 앗아가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의 권력이 얍삽하고 얌체 같은 게 정말이지 너무 싫었다.   



   주로 참다못한 엄마가 등 떠밀 때나 스스로가 죽겠다 싶을 때까지 병원에 가지 않았다. 조금만 살만해도 병원에 나타나지 않고, 버티고 버티다 참을 수 없이 심각한 상태가 돼서야 다시 병원에 나타나는 나에게 의사 선생님은 늘 ‘너무 늦게 왔다.’, ‘치료시기를 놓쳤다.’고 말씀하셨다. 급기야 제발 꾸준히 다녀보라고 자신을 믿어보라고 의사들이 쉽게 하지 않는 책임 실린 말을 하며 애원하다시피 하셨다. 난 그제야 몇 개월을 속아보았다. 그리고 기적이 일어난 지금, 결론적으로 스테로이드와 선생님은 분명 큰 몫을 했지만 결정적인 역할을 하진 않았다. 아니 마지막 몫 까지 다 할 수 있도록 선생님께 기회를 드리지 않은 것도 같다. 하지만 기적이 오기 얼마 전 선생님의 애원으로 성실히 병원에 출석했던 시기 결정적으로 얻은 건, 스테로이드에 대한 혐오가 줄어들었다는 사실이다. 그 덕에 지금도 스테로이드를 찾아야 할 순간이 오면 기꺼이 그를 찾아드는 평화가 찾아왔으니, 이 또한 결정적이지 않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을 것도 같다.



   치료가 될지 안될지는 의사도 장담해 줄 수 없는 이 병은 죽는 날까지 함께 살아갈 마음을 먹어야 하는 병이다. 치료가 된 사례도 무수히 쏟아져 나오지만 내 증상은 희망보다 포기하는 편이 더 나았기에 완치는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죽을병은 아니지만 사람을 죽일 수도 있는 이 병을 가진 나에게, 혐오하는 스테로이드와 그것이 적힌 처방전을 처방해 주는 선생님은 단지, 살고자 하는 의지가 있을 때 돈을 들이면 생명을 조금 더 연장시켜주는 존재, 그 정도일 뿐이었다. 희망 따위는 걸지 않았다. 하지만 몇 달에 걸쳐 장기 치료를 받는 동안 스테로이드 역할에 대해 깨달은 게 있다면, 그는 얌체가 아니라 어쩌면 개선될 기회를 주는, 더 나은 삶을 살아보라고 지지를 해 주는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네 아픔을 치유되는 날까지 잘 견딜 수 있도록 도와줄게 하고서 말이다. 선생님은 우선 스테로이드로 병을 숨겨내면서 순간적이지만 좋아진 틈을 타 여러 방식을 써서 치료를 했다. 그리고 각종 치료와 스테로이드 투여를 병행하면서 서서히 스테로이드의 강도를 줄여나갔다. 아마도 일반 치료제로는 빠르게 악화되는 균의 속도를 잡아낼 수 없으니 스테로이드를 써서 속도를 주저시킨 후 근본을 치료해 나가는 방식을 쓰고 계셨던 게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스테로이드는 기회인 것이다. 기회.



   감정의 이유 있는 장난 질에 놀아나기를 자처하는 요즘 스테로이드를 떠올린다. 희망을 줬다 풀었다 얄밉게 행동하며 사람을 지치게 만드는 게 스테로이드 같다는 생각을 한다.



   인간의 마음은 참으로 간사해서 아픔이란 감정이 다 치유되지 않았더라도 온종일 모든 순간을 아파하지는 않으며, 그 와중에 좋은 게 오면 좋은 대로 누리기도 했으면서도 곧 언제 그랬냐는 듯 아픔에 힘들어하곤 한다. 이런 인간의 간사함이 지금 내 마음이 어떤 상태로 가고 있는 건지 혼란스럽게 만든다. 충분히 인정하고 아파하고 괜찮아진 줄 알았던 감정이 며칠을 걸러 나타나고 또 나타날 땐, 회피를 참아내고 감정을 받아내는 과정이 힘들어진다. 인정하고 아파했더니 해결되는 게 아니라 걷잡을 수 없이 깊어지고 길어지기만 하는 거 같았기 때문이다. 끝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이게 다 마음을 무시하지 않고 이겨내려 하지 않아서, 감정이 구는 대로 다 받아줘서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결국 무시 따위로 이겨내야만 끝이 나는 건가?



   어쩌면 잠시 잠깐  괜찮아진  착각하게 만들었던 날은 마치 스테로이드처럼 치료 과정  잠시 잠깐 숨을 쉬게  주는 ,  나아질  있도록 기회를 주는 날인 걸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아픔을 숨긴 틈을  조금씩 치료해 내면서 서서히 좋은 날의 강도를 줄여 나가더라도 너무 많이 아프지 않을  있는 날이 안전하게 찾아오기를, 기회를 주고 지지해주는 걸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아픔이 괜찮아진  알았는데 계속 아프고  아픈  아니라, 걷잡을  없이 깊어지고 길어지고 끝이 없어 보이는  아니라, 괜찮은 날은 단지 아픈  찾아온 깜짝  같은 순간인 거다. 아픔은 생각보다 빨리 치유되는 건 닌 것 같다.  그러니까 결국 감정의 간사함이 우리를 살게 하는 걸지도 모른다. 스테로이드가 나를 아직까지 살게   것처럼



    죽을병(감정)은 아니지만 사람을 죽일 수도 있는 병(감정)이 제 멋대로 행패를 부리더라도 그래서 죽을 거 같더라도, 죽으란 법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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