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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윤희 Oct 08. 2021

얼마만큼 아프고 일어나야 할까?

시간

    생활에 큰 지장이 없는 표면적인 상처에는 놀라거나 울지 않는 어른이 되었다. 쓰리다 아물고, 불편하다 아물고, 조만간이면 상처가 났었는지도 모르게 될 거란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일 거다. 그러니 종종 발생하는 작은 상처에는 굳이 걱정이란 감정을 쓰지 않게 되었다. 상처에 대해 애정을 쏟을 마음이 있다면 알맞은 연고를 찾아 바르고 그 조차 귀찮다면 대충 내버려 두는 식이다. 별 일 아니니까. 아니, 적어도 숱한 경험을 통해 무뎌진 어른에게는 별 일이 아닌 거니까.



   뭐든 숱한 경험 끝에 무뎌진다. 감정도 마찬가지 일 거다. 하지만 감정을 피하고 외면하거나 감추기 바쁜 회피형 인간에게는 감정을 정면으로 맞서 본 경험이 없다. 나 또한 회피형이고 감정을 정면으로 마주해보겠다고 마음먹은 지금, 모든 게 생소해 소소한 감정에도 지레 겁을 먹고 불안에 떤다. 이건 어디가 끝일까. 얼마의 통증이 올 것이며 얼마 동안 통증이 올 것인가. 마치 어른에게는 별 것 아닌 상처를 보고 눈물을 보이는 어린아이처럼, 회피하느라 채우지 못한 경험의 부재가, 별 것 아닌 감정에도 요동을 치게 만든다. 더 단단해지는 과정이다 언젠가는 겪어야 할 과정이다 하며, 회피하려는 습관을 외면해 본다.



   때때로 감당이 버거운 표면적인 상처를 마주했을 땐 어떻게 했던가? 그 고통이 무사히 사라지길 바라는 사람이라면 상처 난 곳에 더 깊은 상처가 나도록 구는 사람은 없을 거다. 그래서 대부분은 병원을 찾아가 이런 질문을 쏟아낸다. ‘이거 괜찮아지긴 할까요? 나을 수 있을까요?’ 그리고 걱정과 두려움을 품은 질문에 의사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이렇게 진단을 내린다.


   ‘약 며칠 분 드릴게요.’


   ‘병원에 몇 번 더 오셔야 해요.’


   ‘며칠 정도면 금방 낫습니다.’



   시간은 필요하지만 끝이 있다는 진단을 받고 나서야 안도하고 인내할 용기를 얻는다. 어쨌든 낫잖아.



   감정의 시간에도 통상적인 이론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 감정엔 초콜릿을 며칠간 몇 알을 드세요라든지, 이 감정은 조금 걸리고, 이 감정은 며칠 정도면 금방 낫습니다 하고서 말이다. 경험의 부재로 감정의 면역력 따위를 가지고 있지 않는 나는 사소한 감정까지도 안도하고 인내할 용기가 필요하다. 이 정도면 나아요. 대충 내버려 둬도 어떻게 나아요.



    감정은 들여다볼수록 더 흔들린다. 들여다볼수록 감정의 크기가 얼마만 한 것인지 더 선명해지기만 한다. 좋은 감정이든 나쁜 감정이든 늪 속에 점점 더 깊이 빠져드는 기분이다. 좋아서 더 좋고 신이 났지만, 좋아서 아쉬웠고, 좋아서 더 애처로웠으며, 좋아서, 좋아서 아렸다. 아파서 아팠고, 아파서 혼란했고, 아파서 화가 났고, 아파서 분노했다. 이미 나버린 상처는 어느 정도의 시간과 통증의 과정을 지나야 아물어지듯이, 감정도 어느 정도의 시간과 불편함을 감당하면서 단단해지는 거라 생각했는데, 이게 맞는 걸까? 얼마의 시간 동안 감정 늪에 빠져도 되는 건지, 얼마쯤이면 다시 일어날 마음을 먹어야 하는 때인 건지 안 적이 없다. 마치 보호자 없이 처음 혼자 집을 찾아가는 아이처럼 이 길이 맞는 거 같으면서도 맞는지 불안한 느낌이다. 이 골목에서 꺾어야 하나. 다음 골목인가. 지나치진 않았겠지. 이렇게 계속 늪과 시간을 허용하다가 상처 난 곳에 더 깊은 상처가 나도록 구는 어리석은 짓을 할까 봐 그땐 걷잡을 수 없이 될까 봐 긴장된 발걸음을 내딛는다. 불편한 감정을 스스로에게 착각을 줘서라도 평화를 지키는 연습만 무수히 해 온 나는 ‘시간이 해결해 준다.’의 그 정도를 알 수가 없다.

      


   흔히 세상을 밝게 바꾸려는 강연자들은 이렇게 말했다. ‘땅굴을 파고 깊이 들어가지 마세요. 해치고 나오세요. 얼른 나오세요. 파이팅입니다.’ 나는 그들의 말과 같이 땅굴에 발이 빠질 찰나면 화들짝 얼른 발을 빼내고, 너는 땅굴에 빠진 적이 없다고 착각을 시키고서는 또다시 당당하게 일상을 살았다. 나는 누구보다 빨리 빠져나왔어. 아니, 난 빠지지 않아. 그런데 땅굴 속을 들여다보지 조차 못한 감정들은 사라진 게 아니라 속에서 몇 년 동안 묵히며 곪았다 터지는 과정을 겪어야 했다. 생겨버린 상처가 외면한다고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 빠지지 않았을 리 없으니까.


     

   그렇다면 강연자 선생님들, ‘얼른’의 정도는 언제인가요? 얼마면 빨리 나온 것이고, 얼마면 충분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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