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지지리도 못하는 것들

자기소개 5

by 어거스트


(전편에서 이어짐)


나는 지지리도 못하는 것들이 정말 많다.

우회전 두 번만 하면 동서남북에 대한 감각을 상실하고, 방금 전까지만 해도 90분 스크린 타임 경고가 뜰 때까지 넋 놓고 유튜브 숏폼을 보고 있었으니 자기 통제력도 떨어진다.

완벽주의자이면서 세상없는 게으름뱅이라서 중요한 일을 앞두고 그렇게도 딴짓을 한다.

이번 주말만 해도 다음 주 목요일에 있는 최고경영진 전략 보고를 위해 마지막 발표 자료를 정리하겠다고 다짐했었지만, 토요일인 오늘 아침에 눈 뜨자마자 최인아 님의 신간 "내가 가진 것을 세상이 원하게 하라" ebook을 다운받아서 침대 밖으로 나오지 않은 채로 한 번에 완독 해버렸다. 읽기를 마치고 나니 오후 1시. (일정 관리가 엉망이 된 것과는 별개로 정말 좋은 책. 역시 멋진 선배님이시다.)


이렇게 엉망진창인 나를 어디까지 솔직하게 보여줘야 하나. 직원들을 향한 자기소개 자료를 만들면서 고민이 좀 됐다.

나를 나답게 드러내고 싶으면서도 너무 형편없게 보이고 싶지는 않고. 살짝 멋있어 보이고 싶기는 한데 감당 안 되는 이미지를 쌓았다가 나중에 실망시키고 싶지도 않았다.


고민을 좀 하다가 어차피 금세 들통날 나의 영어 실력부터 공개하되, "저는 한국에서 나고 자라고 배워서 영어가 서툴러요"가 아니라 "나는 한국어 실력이 너무나 출중하다 보니, 아주 다른 언어 시스템인 영어를 사용할 때 버그가 나곤 한다"는 이상한 논리를 세워보기로 했다. 이 생각을 해내고선 약간 뿌듯했다.


내가 헤매는 것들. (제목만 띄웠는데도 다들 좋아한다)

첫 번째, 오후 4시의 언어 버그.

일단 나는 한국어를 기가 막히게 잘한다. 대한민국 평균보다 월등하게 잘한다(고 우겨본다). 영어는 이 정도면 충분하고, 더치 (네덜란드어)는 젬병이다. 문제는 서로 매우 다른 시스템 - 어순, 문법, 철자까지 겹치는 게 하나도 없는 한국어와 영어를 함께 쓰다 보니, 당이 떨어지는 오후 4시만 되면 버그가 일어난다.

여러분들은 앞으로 종종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웅얼거리거나 맞는 영어 단어를 찾지 못해 렉이 걸린 모습을 보게 될 텐데, 그러려니 하면 된다. 다음 날 아침이면 대게 다시 좋아진다.


외국인 상사로써 콤플렉스가 될 법도 한 영어 실력에 대해 이렇게 미리 공개하니 일단 내 속이 편하고, 다들 한바탕 웃어젖히는 것으로 보아 뭐 대략 잘 넘어간 듯하다.


두 번째와 세 번째, 자전거 타기와 수영을 못하는 것은 네덜란드 어디에서나 즉시 OMG (오 마이 갓)을 불러일으킨다. 이번에도 예외가 아니다. 한국에서는 흠도 아닌데 여기에선 약간 바보처럼 보이는 듯하다. 네덜란드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만 해도 친절한 동료들이 너도 나도 달려들어 나에게 자전거 타는 법을 알려주려 했지만 너무나 하찮게 픽픽 쓰러지는 날 보고 다 포기했다.


네덜란드에서는 갓난아기 때부터 엄마 아빠의 자전거 앞 바구니나 뒤 자전거 시트에 앉아 균형 잡는 법을 배우고, 초등학교 다닐 정도의 나이가 되면 두 손을 주머니에 넣고서도 자전거를 탄다. 주머니에 손 넣고 앞바퀴 들고 뒷바퀴로만 타는 사람도 봤다. 정말이다.

수영은 또 어떤가. 초등학교 의무 교육 중 하나가 생존 수영이라서, 얘네들은 푹 젖은 청바지를 입고도 자유자재로 수영하는 법을 배운다. 요즘처럼 날씨가 좋은 여름이면 강이든 호수든 운하가 되었든 사람들이 훌렁훌렁 자유롭게 물로 뛰어드는 곳이 이곳 네덜란드다.


우리나라 관점에서 보자면 아시아에서 십 년 넘게 살면서 젓가락질을 못 배운 것이랑 비슷하려나?

나는 수십대가 동시에 질주하는 암스테르담 자전거 도로에 어버버한 나를 끼워 넣을 배짱이 없고 (욕을 얼마나 먹으려고), 자전거 옆으로 아슬아슬하게 지나가는 자동차들도 너무 무섭다. 이곳 대부분의 자전거는 나에게 너무 크고 무겁고 높고 (여성 평균신장 170 cm, 남성 183cm의 세계 최장신 국가다!), 자전거에 핸드 브레이크도 없다. 풋 브레이크 방식인데 나 같은 초보자에게는 그냥 무용지물.


수영은 한국에서 노력을 안 해본 것은 아니지만, 내 양쪽 귀가 물 안으로 잠기는 그 순간의 공포를 극복하지 못해서 포기했다. 이후로 내 발이 바닥에 닿지 않는 곳이라면 호텔의 목욕탕이라도 절대 들어가지 않는 철칙을 잘 지키면서 현실에 타협하며 살아가는 중이다.


이곳에서 가장 보편적인 세 가지 - 영어, 자전거, 수영을 제대로 할 줄 모른다고 하니 놀라기도 하고 재미있어하기도 하는 눈치다.

이 정도의 어리버리함이면 사람 냄새나는 보스로 마음 가깝게 받아들여주려나. 그랬으면 좋겠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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