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향인이라는 단어는 진민영 작가의 내향인입니다 라는 책을 통해서 처음 접했다. 단어에 대한 설명을 보기도 전에 이미 그 단어는 내 마음에 쏙 들어왔다. 마음이 안으로 향한다는 느낌을 주는 내향인은 성격이 어두침침한 속에만 있다는 느낌을 주는 내성적보다 더 부드럽고 편안하게 느껴졌다. 낯가림이 심하고 사람과의 관계가 너무나도 서툴러 사회적 인간인 척하는 것도힘겨운 내성적 인간으로 살아오는 것에 지칠 대로 지친 나에게 작은 여유를 허락해주는 단어였다.
내성적이라는 단어가 세상을 피해 안으로만 숨어드는 나약한 인간이라는 편견을 심어주면서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될, 극복해야 할 장애로 규정지었다면 내향인은 그저 외향인과는 반대되는 단어로 세상에 외향인이라는 한 가지 종류의 사람만 있을 수 없잖아라며 내향인도 당연히 존재할 수 있는 대상으로 받아들여지는 듯한 기분이 든다. 내성적이라 단어는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도 편견을 부여하지만 내향인 스스로를 옥죄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세상으로부터 내성적이라는 이유로 부당한 대우를 받았기 때문도 있지만 안으로 향하는 기질로 인해 자기 자신에게도 같은 잣대를 들이대며 이렇게 살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기도 쉽다.
내향인이라는 단어가 보편화되면서 그나마 이런 대우가 조금은, 아주 조금은 줄어들고 있음이 느껴진다. 내성적인 성격의 장점을 아무리 토로해봤자 "그래도..."라는 말이 나오는 것을 막을 수 없었지만, 내향인이라고 하니 "그렇구나"로 이어지며 받아들일 공간을 조금 마련해주는 것이다. 내향인 스스로도 자기 자신을 받아들이기가 좀 더 편안해짐을 느낄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그 사실 자체만으로 불편함을 느끼고 누군가에게 말을 걸어야 한다는 압박감이 덜 느껴진다. 나는 내향인이라서 외부에 사람이 많으면 더 안으로 들어가고 싶고, 나와 대화하는 것이 더 좋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쉽다. 내성적과 내향인, 단어의 힘이라는 게 이렇게나 엄청나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어디 가서 내성적인 성격이라고 소개하기는 꺼려지지만 내향인이라고는 당당하게 얘기할 수 있다. 내성적이라고 하면 "얘기에 잘 끼지 못할 거야"라는 통보의 느낌이랄까... 하지만 내향인이라고 하면 "그러니까 얘기에 잘 끼지 못하더라도 이해해줘, 나도 노력 중이야"라며 어필을 하는 느낌이다. 상대방도 그렇게 느끼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이해의 범위에 들어갔다는 것은 알 수 있다.
그리고 생각보다 내향인이 정말 많기 때문에 커밍아웃(?)이 쉽기도 하다. 내성적인 성격이라고 고백하는 사람은 별로 없지만 내향인을 고백하면 자신도 그렇다는 사람이 월등히 많다. 이 또한 내성적인 단어가 그동안 가져왔던 부정적인 이미지였기 때문일 것이다.
낯가림이 심하다거나 내성적이라고 하면 자기도 그렇지만 노력해서 이겨냈다는 둥, 그렇게 살면 안 된다는 둥 나를 부정하는 이야기를 먼저 들어야 하지만 내향인이라고 하면 자신도 내향인이라며 살려고 노력하다 보니까 내향인 인 줄 사람들이 잘 모르더라는 공감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내성적이라는 단어에 죄가 있는 것도 아니고, 언젠가 시간이 지나면 내향인이라는 단어도 어떤 편견을 뒤집어쓰고 말 꺼내기 어려운 부정적인 단어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일단 지금은 내향인이라는 단어가 좋다.
내향인은 좋은 공격 지점이 된다
낯가리고 소심한 성격은 어딜 가도 공격을 받기 쉽다. 그저 도움을 주려고 한 말인데 그걸 공격이라고 받아들이냐며 본인들이 외려 섭섭해하는데 외향인들은 그런 말을 듣지 않는다는 점과 타고난 성향에 대한 언급은 무례의 범위에 들어간다는 점을 생각하면 공격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과하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아무리 많은 전문가가 내성적인 성격은 단점이 아니며 충분히 장점이 될 수 있고 그들만이 가지는 강점이 있다고 외쳐도, 세상이 외향인만 선호하고 내향인의 장점과 강점을 보려고 하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다. 내향인들의 바이블이라고 불리는 콰이어트를 읽어보려고 했으나 처음 몇 장만 읽고 덮었던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내가 내성적인 성격의 장점을 깨닫는다고 해서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세상은 눈앞에서 방긋방긋 웃으면서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큰 목소리로 안부를 묻고 낯선 사람에게도 자신의 이야기를 편안하게 하는 사람을 더 선호하는데 말이다. 내가 내성적인 성격이라는 걸 파악하는 순간 세상은 마치 손이 없는 사람은 물건을 쥘 수 없다 판단해버리고 아무것도 주지 않는 것처럼, 나에게 기회를 주거나 의사를 묻지도 않고 "너 이거 안되지?"라며 결론부터 지어버린다. 손이 없는 사람도 한쪽 발로 물건을 잡거나 양 팔로 안을 수도 있다는 것은 그 편견쟁이들에게는 고려사항이 아니고 그런 현실은 있을 수 없다는 듯 애써 보지 않으려고 한다. 심지어 자신이 가지고 있는 편견에서 벗어난 모습을 보게 되면 또 다른 비아냥거리로 삼는 무례를 저지르기도 한다.
"이야~ 그런 것도 할 줄 알아?"
이런 무례에 대한 지적도 내향인의 예민함으로 몰고 가기 쉽다. 사회 분위기 상 그것이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용납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애초에 내향인에 대한 무례를 저지르지 않으면 내향인이 예민하게 반응하고 말고가 없다는 것은 논외이다. 외향인으로 판정이 되고 그가 하는 행동이 약간 예의에서 벗어나더라도 상대방이 내향인이면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되는 양상처럼 취급되어 버린다. 그 어쩔 수 없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내향인이 되려 문제인 것처럼 만들어 버린다.
그래서 이러한 상황이 종종 벌어지고, 자신이 받은 무례함에 대해 입도 벙긋하지 못할 정도로 소심하지 않은 내향인은 자신이 느낀 불쾌함을 감히 드러냈다는 이유로 예민하고 성격이 안 좋다라는 편견까지 뒤집어써야 한다.
심할 경우, 자신에 대한 기본적인 존중을 요구한다고 해서 내향인인 척한다는 또 다른 공격 지점을 생성하기도 한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 내가 느낀 감정을 말하는 것이 큰 용기가 필요한 내향인도 있고 말 못 하는 내향인도 있지만 어쨌거나 사람으로서 의사표시는 충분히 할 수 있는 것인데, 마치 아무 말도 못 하고 끙끙거리며 상대방에 어떤 무례를 저지르더라도 혼자 삭혀야 되는 것이 내향인의 본질인 양 매도하는 것이다.
내향인에 대한 편견이 강한 윗세대와 함께 사회생활을 해야 했던 나는 어렸을 때는 물론 성인이 된 후에도 좋은 공격 지점이 되곤 했다. 일은 잘하지만 직장동료들과 사적인 대화를 안 하는 것, 처음 전화하는 거래처 사람과 술자리 약속을 잡지 않는 것(술을 못 마시는 체질은 아예 고려대상이 아님), 가족과 친구들하고는 웃으면서 통화하면서 직장에서는 왜 그렇게 안 하냐는 등 이게 직장에서 듣는 이야기가 맞나 싶은 일들이 심심찮게 벌어졌다.
어렸던 20대 때야 내성적인 내 성격을 단점으로 받아들였었고 어떻게든 세상에 적응을 하고자 외향적인 성격으로 바꾸어 보고자 열심히 노력했었으나, 세상의 검은 물이 들고 내 자신이 지쳐가면서 일명 흑화된 내향인으로 진화한 뒤에는 그런 말들이 얼마나 편협하고 무례하고 하찮은 언행인지 꼬박꼬박 지적을 하면서 대응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나이가 들면서 자연스럽게 회사 내에서 나에게 함부로 얘기할 수 있는 인간들의 숫자가 줄어든 덕분도 있긴 하지만 말이다.
이왕이면 내 이런 노력들이 내 아랫 세대의 내향인들이 조금이라도 덜 공격을 받을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내향인으로 세상을 살아간다는 건
세상이 원하는 보편적인 기준에서 벗어난 사람으로 그 세상을 살아간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타고난 성향이 그런 것임에도 마치 틀린 것 마냥 그러면 안돼 라는 말과 솔직한 모습으로 살아야 된다는 말을 함께 듣는 삶이란 몇 줄의 글로 형용하기가 어렵다. 모든 상황에서 언제나 나는 틀린 사람이었고 마음을 닫은 사람이었고 세상을 살기 위해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으며 다가가려는 사람을 밀쳐내는 예민한 사람이었다. 세상은 내 눈에 비친 세상이 어떤 모습일지보다는 세상에 보이는 내 모습에만 관심을 보였고 그 규격에 맞는지 재보고 적당히 맞게 구겨 넣으려고 했다.
내가 유일하게 정상일 수 있는 시간은 나 혼자 있는 시간이었고, 사실 그 마저도 나이를 어느 정도 먹어 내가 이런 내 모습을 받아들인 후에야 가능한 것이었다. 그 전에 혼자 있는 시간 대부분은 내성적인 성격으로 태어나 외향인으로 변신하지 못한 나를 책망하며, 외향인이 되기 위한 노력으로 채우고 있었다. 자책은 결국 우울증이 되었고 노력은 폄하되었지만, 결국 그 시간들이 쌓여서 내가 나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지금에 도달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내향인인 내가 사람들과 어울리기보다는 책에 빠져든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귀를 막아도 밀고 들어오는 타인의 소리와 다르게 책은 내가 원하지 않으면 내가 아닌 책을 닫으면 되었다. 나를 책망하지 않고 내 속도에 맞춰 세상을 보여주었다. 세상을 사람을 통해서보다는 책을 통해 배운 경우가 많아 인간관계에는 여전히 서툴지만 적어도 세상에 나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많이 없애 주었다. 그 덕분에 어느 정도 사람 구실은 하면서 살 수 있었다.
인간관계에 서툰 것과는 별개로 친구를 사귀기 어려운 것도 내향인의 특징일 수 밖에 없다. 어쩔 수 없이 만들어진 테두리인 가족과 직장 동료가 아니라 내가 선택하는 친구라면 나와 비슷한 성향과 취향을 가진 사람과 가까워지고 싶은 게 당연하다. 이런 점에서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는 내향인은 비슷한 내향인을 알아보기에 시간이 오래 걸리고 자신만의 공간에 머무르는 걸 좋아하는 특성상 만나기도 쉽지 않은 것이다. 게다가 미묘한 차이를 알아보는 예민함 덕분에 나와 잘 맞는 사람인지를 판단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하기도 한다.
반면 성향과 취향이 잘 맞는다고 생각되는 사람을 만나면 누군가와 함께라도 진심으로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진기한 경험을 하기도 한다. 그 사람을 통해 겉으로는 외향적으로 보일 수 있는 모습이 드러나기도 해서 사회에 한걸음 더 다가가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숨겨져 있던 외향성 봉인이 풀렸다기보다는 그런 모습을 통해 다른 사람들이 좀 더 쉽게 다가설 수 있게 되기 때문일 것이다. 누가 말 걸어주면 대답 잘하는 내향인도 많다. 다만 이 과정에서 그런 단면을 보고 외향인이라고 오해를 하고는 내향인의 모습에 멋대로 실망하고 상처를 주는 사람을 만날 위험도 발생하고 이걸 계기로 마음을 더 닫아버리기도 한다.
하여간 내향인의 삶은 오해와 편견 사이를 오가는 것 같다. 긍정적인 인간관계를 통해 대인공포증을 없앨 수는 있겠지만 혼자 있는 시간의 소중함만큼은 절대 포기할 수 없는 내향인들이 겪는 불편함은 이루 말 할 수 없다. 혼자 있는 시간에 푹 빠져있다가 왜 이렇게 연락이 없냐라는 전화에 당황하기도 하고, 돈을 벌기 위해 혼자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지만 결국 사람들과 그들의 기준에서 어느 정도 섞여야 하는 사실에 좌절하기도 한다. 외향인을 연기하다 지쳐서 혼자만의 시간을 가져보려 하지만 닫힌 문을 열어야 한다며 끊임없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세상을 향한 공포심을 더 키워버리기도 한다.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있고 싶지만 혼자 있고 싶지 않은 시간도 물론 있다. 이런 시간에 대해 "것봐, 역시 나오길 잘했지?"라는 강요에 가까운 오해를 받아도 "그래, 이게 세상이니까"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혼자가 될 시간을 갈망한다.
외향인도 가끔 혼자 있고 싶든 내향인도 가끔 함께 있고 싶다. 외향인이라는 사람도 있으니 내향인이라는 사람도 있다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다.내향인에 외향인의 성격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것은 싫은 점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게 예의이기 때문임을 알아주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