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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돈냥이 Sep 29. 2021

집순이라서


집에서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내냐면


가장 오랫동안 집 밖을 나서지 않은 최장 기록은 한 달이다. 대학생 때 방학이었는데, 사람들에게 지쳐서 연락도 끊고 은둔하고 있었다. 그 생활이 참 만족스러워서 방학 두 달 내내 나가지 않을 수도 있었으나 가족들의 성화에 바깥바람을 쐬러 나가면서 기록은 중지되었다. 딱히 얼마나 오래 밖을 나가지 않을 수 있나 시험해 보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고 나하고 싶은 대로 생활하다 보니 그냥 그렇게 집에만 있었던 것이다.


집에서 대체 뭐해요?


집에 있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많이 듣는 질문일데, 오히려 저 질문을 하는 사람은 대체 집에서 무얼 하길래 다른 사람이 집에 뭘 하는지 금해하는지 알고싶다. 집에서는 정말 많은 것을 할 수 있다. 밖에서 못 하는 알몸으로 춤추기도 가능한 공간이니까 말이다.


그렇다고 특별한 무언가를 하는 건 아니다. 저 밖으로 나가지 않은 한 달 동안 내가 한 것은 자고 일어나 TV 보고 책 보고 낮잠 자고 밥 먹고 다시 잠드는 보통의 일상뿐이었다. 자취를 하면서 나의 집순이 성향은 더욱 강해졌다. 밖으로 좀 나가라거나 왜 이렇게 뒹굴거리냐고 성화 내는 가족들이 없는 나 혼자 있는 공간에서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편안함과 행복감을 느꼈다.


무엇을 해서 느끼는 행복감이 아니라 나 혼자 내 공간에 있는 것 자체에서 느껴지는 순수한 행복이었다. 가끔 집에서 뭐하냐는 질문에 벽지 무늬 본다고 답하기도 하는데 상대방은 웃지만 이 대답이 아주 농담이 아니라는 걸 알면 웃지 못할 것이다. 정말 반듯이 누워서 천장을 멍하게 보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편안함을 느끼며 가만히 있는 시간을 가진다. 벽지 무늬를 개미처럼 따라가 보는 것도 진짜 하기는 한다.


물론 일상 외에 무언가를 하기도 한다. 딱히 취미는 없지만 드라마를 보거나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거나 필요한 소가구를 조립한다거나 공부를 하기도 하고, 처음 해보는 요리에 도전해 보기도 한다. 어떤 취향이 있어서 여유 시간에는 이것을 해요 라고 딱 꼬집어 말할 무언가가 없어서 이것저것 생각나는 대로 해보는 편이다.


집에서 무언가를 하면서 시간이 얼마나 잘 가는지, 집에 있는 것을 갑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절대 알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시간에 대한 상대성 이론을 아주 잘 설명할 수 있는 표본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밖에서 보내는 시간이 참 느리게 , 내가 집에서 뭘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지 궁금해하는 이들만큼이나 나도 집 밖에서 주로 시간을 보내며 집에 있는 것을 답답해하는 사람들이 밖에서 무엇을 하는지 궁금하다. 얘기를 들어보면 항상 맛집과 술집과 노래방 등 어딘가에 들어가서 노는 게 대부분이다.






간접 경험의 가치


이력서를 쓸 때 스펙이 부족하면 자기소개서에 자신의 경험을 직무와 연결 지어 이야기에 녹여내라고 한다. 직접적으로 언급은 되어 있지 않지만 경험으로 비추어보아 그 경험은 반드시 직접 경험이어야 한다. 집 밖으로 나가 사람들과 어울리며 적당한 갈등이 존재하고 땀과 눈물이 어우러져 힘들었지만 마지막에는 다 같이 웃음 지으며 아직도 인연을 이어가고 있는 타인과의 진짜 경험 말이다. 안전하고 안락한 집 안에서 세상의 전문가들이 만들어놓은 결과물을 통해 얻은 간접 경험은 외부활동을 통한 직접 경험을 내면화시키는 도구 정도로만 사용해야 한다.


여기서 집순이는 위기를 맞게 된다. 책과 영화와 다큐멘터리를 통해 다양한 분야의 지식을 습득하고 전문가가 편집한 그들이 보고 들은 화면들로 장기간의 활동을 단시간에 간접 체험한 나의 경험은 활동이라는 면에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다. 그것은 나의 내면을 키워주는 도구일 뿐, 나의 경험이 되지 못하며 나를 성장시켰다는 증거가 되어 주질 못 했다.


누군가를 통해 한번 편집된 세상을 주로 접하는 것은 그의 관점을 그대로 따라갈 위험성이 있다는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그것은 특정 인물이나 하나의 신념에 대한 콘텐츠들만을 추구했을 때의 이야기지 이것저것 가리지 않는 잡식성 집순이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오히려 상반되는 관점을 가진 다양한 책을 가리지 않고 마구 씹어 먹은 후 인터넷에서 해설이라는 소화제까지 찾아 소화시키면서 소처럼 시간을 들여 되새김질까지 마친 뒤 자신을 구성하는 영양소로 저장해 필요할 때 꺼내 쓰는 능력을 갖추기도 한다.


바다를 건너고 산을 넘는 그런 박진감 넘치는 경험도 중요하지만 정작 사회생활할 때 많이 이용한 것은 여러 이야기와 자료들을 한데 잘 버무려서 더 넣거나 빼서 누군가가 원하는 결과물을 만들어 내는 능력이었다. 이것은 다른 사람들의 경험과 지식을 받아들여 내 생각을 섞어 발효해내는 경험을 통해 체득한 것이었다.


회사 내에서 각자 주장하는 상반된 이야기와 뭐가 중요한지 알 수 없게 마구 쌓아놓은 자료들에서 보고 싶은 내용을 알 수 있게 정리하는 일에 적합한 능력인데 그런 업무를 맡길 꺼면서 왜 어학연수와 국토대장정의 경험치를 더 높게 치는지 알 수가 없다.






재택근무를 거부할 수밖에 없었던


집순이의 성향에 맞는 재택근무나 프리랜서를 꿈꾸기도 했었다. 인테리어 설계 일을 했던 것도 재택근무가 가능하다거나 경력이 쌓이면 프리랜서로 일 할 수 있다는 말을 들어서였다. 각박한 현실에 경험이 쌓이기도 전에 도망칠 수밖에 없었지만 그곳에서 재택근무의 단점을 보았고 그 후로 집에서 일하는 것에 대한 평가절하를 3자의 입장에서 목격할 수 있었다.


재택근무를 하는 직원은 같은 일을 하더라도 더 적게 일했다는 평을 받고, 어떠한 문제라도 그 원인은 재택에 있다고 지목되었다. 오히려 사무실에서 겪는, 수시로 들어오는 잡일이 없어서 더 많은 일을 해냈고, 사무실에서 처리했더라도 발생했을 문제였는데도 앞 뒤가 안 맞는 비난을 고스란히 받아야 했다.


통화도 거의 필요 없고 다른 직원과의 접점도 거의 없어 재택이 가능했던 나는 여러 번 고민을 해보았지만 결국 재택근무를 포기하였다. 집 밖을 나선다는 것 자체가 큰 스케줄인 집순이에게 집 밖을 나서지 않고 경제 활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너무나 큰 장점이지만 같은 일을 하고도 평가절하되는 것은 싫었다. 집 밖으로 나가기 싫은 것은 내 개인의 기분 문제였지만 업무에 대한 평가절하는 월급을 받는 직장인으로의 자존심이자 내가 근로관계에서의 역할을 제대로 해냈다는 책임감과 자부심의 문제였던 것이다.


재택근무가 자연스러운 문화가 정착된 회사라면 이런 문제가 없을 수도 있겠지만, 안타깝게도 내가 다녔던 회사들은 대부분 근무시간을 어떻게 보냈든 야근을 하면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이라 생각하는 곳이어서, 상사에게 일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었다. 결과만 잘 나오면 어디서 근무하든 개의치 않은 회사에 다니면서 재택근무를 했으며 좋겠지만, 보조적 성격의 사무 업무라는 것은 결과를 내는 종류의 일이 아니어서 힘들 거라는 생각이 든다.



한 때는 가정 주부로서의 삶도 고려해 보았었다. 집이 곧 일터라면 재택근무나 다름없기 때문이었는데 그 고려는 정말 짧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 재택근무도 평가절하되기 일쑤이고 외근 업무가 상당히 많았으며 육체노동이 대부분이고 보조적 성격의 사무직보다 더한 멀티 플레이어가 되어야 한다는 것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시간과 고려를 거쳤지만 집순이에게 적합한 직업이라는 것에 대해 아직도 답을 찾지 못한 채 방황하고 있다. 그나마 외근 없는 내근 사무직이 역시 제일 근접하다는 생각이 든다. 사무실을 제2의 집이라고 자가 최면을 걸 수 있다면 그래도 좀 딜만 하지 않을까? 아무튼 휴식이든 일이든 집에서 일어나면 그 가치가 낮아지는 세상에서 집순이로서 살기 참 어렵다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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