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돈냥이 Sep 27. 2021

먼저 연락을 하지 않는 사람이라서


먼저 말을 걸 의무


항상 혼자 있는 나에게 어른들은 먼저 가서 말을 걸어야 친구가 생긴다며 내 등을 떠밀었다. 하지만 그렇게 밀려서 다른 아이들 사이에 끼어도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멀뚱히 서있었고 아이들은 그런 나를 잠시 쳐다보다가 다시 자기들끼리 놀기 시작했다. 어른들이 사라진 자리로 돌아와서 든 생각은 '내가 먼저 말을 걸어서 친구가 생긴다면 그 친구는 자신이 먼저 말을 걸지 않고도 친구를 만든 게 되는데 그게 내가 되면 안 될까'였다.


낯선 사람에게 뭐라고 말을 걸어야 하는지 아무도 알려주는 이 없었지만, 느리게 사회화가 되면서 지금은 버스정류장에서 옆에 앉은 아주머니의 장바구니를 보고 대화거리를 끄집어내는 재주를 갖추게 되었다. 약점이라면 낯선 사람에게 말을 잘 걸긴 하지만 그것을 인연으로 이어가지는 못 한다는 것이다.


혹자는 그런 나를 보고 먼저 연락을 하지 않아서 그렇다고 했다. 그래서 어렸을 때와 똑같은 의문이 들었다.


내가 먼저 연락을 하면 상대방을 연락을 받은 게 되는데, 연락을 받는게 내가 되면 안 되는 걸까?


어렸을 때와 다른 점은 저 물음에 대한 답을 스스로 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나는 누군가가 먼저 연락을 취해서 인연을 이어가고 싶을 만큼 매력 있거나 어떤 이득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었던 것이다.






연락에 대한 두려움


연락쯤은 먼저 할 수 있다. 자존심 싸움이 아니니까 누가 먼저 하든 상관은 없었다. 다만 내 경우에는 어렸을 때와 같은 문제로 고민했던 것이다. 용건이 없이 전화를 했을 때 뭐라고 해야 될지 몰라 먼저 연락을 할 수가 없었. 용건도 없는데 전화를 하면 상대방에게 뭐라고 해야 하는지 한참을 고민하다 포기하곤 했는데, 점점 용건 없는 전화가 마치 해내야 하는 과제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용건 없는 안부전화를 몇 번 받아 보았지만 아주 자연스럽게 대화가 시작되어서 의식적으로 배우려고 하니 이미 시작점이 지나간 뒤이곤 했다. 이런 자연스러운 통화는 어떻게 하는 것인지 인터넷으로 알아보고 대화법에 대한 책을 읽어보기도 했지만, 안부전화를 하는 것에 대한 요령은 배울 수 없었다.


왜 먼저 전화하지 않니?


섭섭함을 담은 핀잔을 들어도 할 말이 없었다. 다행이라 하면 먼저 연락하지 않는  전혀 없지는 않아서 그저 그런 부류라고 여겨지는 게  이다. 상대방이 내가 자신을 싫어한다거나 연락을 꺼린다 오해를 하기 전에 연락을 잘 안 하는 타입이라고 커밍아웃을 하면 그뿐이었다. 특정인에게만 연락을 안 하는 것이 아니라 원래 나라는 사람이 연락을 잘 안 하는 것일 뿐이라는 내 방어막은 사실 나에게만 안도감을 주는 것이었다.


연락을 잘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은 그 자체로 상대방에게 부담이 된다는 것을 꽤 최근에서야 알게 되었다. 인연을 이어 나가려면 서로 오가는 관계가 있어야 하는데 일방적으로 한쪽에서만 연락의 끈을 잡고 있다는 느낌을 주게 되는 것 . 연애를 할 때에도 짝사랑은 힘이 드는데 사람 대 사람으로 이어가는 인연에 한쪽만 노력한다고 해서 이어가기는 어려운 것이었다. 저 연락을 주는 사람도 사실은 인연을 이어가기 위해 노력을 하는 것이었고, 락 잘 안하는 사람이라는 커밍아웃은 그 노력의 부담에 상대방에게 당당하게 떠넘기고 나만 편하자고 하는 이기적인 선언이었다.


게다가 낯가림이 심해 많은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은 욕심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가끔 새로운 친구를 사귀고 싶을 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 있는 내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SNS를 통해 새로운 만남은 쉽게 만들 수 있었지만 그 후의 인연을 지속시키기가 너무 어려웠다. 내가 먼저 연락하지 않는데 먼저 연락을 주면서 인연을 이어가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작은 용기와 좋은 


안부 전화라는 일상적인 일을 해내게 된 것은 아주 작은 용기에서 시작되었다.


퇴사를 앞두고 듣고 싶었던 강의를 국비 지원으로 수강하게 되었다. 거리두기 덕분으로 옆자리 사람과 떨어져 앉는 것이 자연스러웠고 친하게 지내야 한다는 부담감이 없어서 안심이 되었다. 한데 대각선 앞자리에 앉은 분이 왠지 눈길을 끌었다. 보온병과 필기도구를 가지런히 책상 위에 정렬해 놓는 것이 이런 수업을 자주 들어본 포스가 느껴졌다. 친해지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부부로 보이는 사람들이 들어왔다. 빈자리는 내 옆과 그분 옆뿐이었는데 내 자리를 양보하면서 그분 옆으로 자리를 옮길 수 있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친해질 수 있을까 고민하며 나도 모르게 그분을 힐끗힐끗 쳐다보았다.


집에 와서 생각하니 엄청 부끄럽고 그분이 이상하게 생각했을 것 같아 창피했다. 한편으로는 어차피 이상하게 생각될 거 내일 아무 말이나 던져보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이상한 사람으로 보인 거, 뜬금없는 헛소리를 한다 한들 더 이상하게 보이지는 않을 것이라는 괴이한 생각이었다.


다음날, 뭐라고 말을 걸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보다 나이가 많아 언니라고 불렀고, 쉬는 시간마다 대화를 하고 간식을 같이 먹고 연락처를 교환했다.


강의가 끝난 후에도 서로 연락하자며 카톡을 주고받았는데 역시나 용건이 없으면 연락하기가 어려웠다. 이대로 인연이 끊길까 조바심 내면서도 어찌해야 할 줄을 몰랐는데 어느 날 그 분이 먼저 안부 전화를 주었다. 아무런 용건 없이 요즘 뭐하냐는 질문으로 시작했다. 그리고는 그동안 숱하게 들어왔던 그 말을 했다.


먼저 연락도 하고 좀 그래


나보다 나이가 많지만 그래도 언니라는 단어의 힘인지, 안부전화에 대한 나의 부담감을 털어놓았다. 그랬더니 그분의 대답은 "일단 걸면 대화가 시작돼"였다.


그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용건 없는 전화를 받았을 때 상대방이 뭐라고 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대화는 이어졌었다. 애초에 단순 안부전화는 친한 사람들로부터 왔었고 대화 내용은 만나서 나누는 수다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만나면 딱히 주제가 없어도 대화가 끊이지 않는 것처럼 통화도 역시 그랬던 것이다.


며칠 후, 용기를 내서 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미리 준비하지도 않았다. 그저 심호흡 한번 하고 통화 버튼을 누를 용기만 냈을 뿐이었다. 그리고 이렇다 할 내용 없이 십여 분간 수다를 떨었다. 만나서 대화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 한 번이 나에게는 거대한 벽을 허무는 것과 같았다. 용건이 없는 연락이라는 것이 이렇게나 쉽고 간단하다는 것을 경험하고 나니 신기했고, 이렇게나 별거 아닌 것을 못하고 놓쳐버린 그동안의 인연들이 아깝게 느껴졌다. 늦게라도 배울 수 있어 다행이었다.


이 날 이후로 먼저 연락을 하는 것뿐만 아니라 통화 자체에 대한 부담이 줄어들어서 전화를 받는 것도 좀 쉽게 느껴졌다. 가끔, 그래서는 안되지만 친한 사람이라도 전화가 부담스럽게 느껴질 때는 통화가 어려운 척 카톡을 하기도 했었는데 그게 많이 좋아졌다. 알 수 없는 상대방과의 통화는 여전히 무섭고 긴장되지만 가까운 사람들을 좀 더 잘 챙길 수 있는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내가 매력적이지 않아 먼저 연락을 주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것은 여전히 슬픈 일이기는 하다. 내가 먼저 말을 걸거나 연락을 하지 않으면 다음은 없다는 것이 참 기운 빠지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자기 연민에 빠져있기 보다는 이런 경우처럼 내가 나서서 만들고 이어갈 수 있는 인연이나마 잘 챙기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에 놓쳐버린 수많은 인연들을 생각해보면 앞으로는 내가 얼마나 노력하느냐에 따라 인연을 만들 수 있게 되었으니 그 자체로 희망적이라 생각하려고 한다.







이전 10화 집순이라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