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돈냥이 Sep 20. 2021

무채색 인간이라서



좋아하는 게 없는 삶이란


남들이 한 번쯤은 좋아했던 그 시절의 아이돌들 중 나에게도 좋아하는 멤버 하나씩은 있었다. 사회적 물의를 일으켜 시사란에 연일 기사가 오를 때에도 숱한 반대에 클린 지수까지 깎아먹으며 옹호 댓글을 써대기도 했다. 그럼에도 나는 그 멤버들의 굿즈를 사거나 잡지를 사서 인터뷰를 스크랩하거나 하다못해 생일을 기억하지도 못했다. 다른 팬과 이야기하면 팬심을 의심받을 정도로 관심이 적은 편이었다.


사실 무엇을 좋아해도 내 관심은 딱 거기까지였다. 도울 수 있는 건 돕지만 알고 싶어 하지는 않았다. 좋아하는 대상을 열심히 쫓아다니지도 않고 관심을 기울이는 시간도 적었으며 금전적인 투입도 꺼려했다. 그야말로 소극적인, 말로만 하는 사랑이라고 볼 수 있겠다.


그나마 내 기준에서 열정을 많이 투입한 것은 만화였다. 그리기도 열심히 그렸고 보기도 열심히 봤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내 기준에서였고 만화 좀 좋아한다는 다른 이들에 비하며 그냥 평범한 수준이었다.  만화 봤냐라는 질문에 전혀 대답을 할 수 없었고 아는 작가의 이름도 없었으며 그들처럼 진로를 미술로 정할 수도 없었다.


항상 그렇게 미적지근하게 살아왔다.

무언가 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을 누군가와 공유하며 공감할 정도로 빠져있지는 못했고 혼자 즐기는 것에는 곧 질림이 찾아왔다. 우연히 같은 시기에 같은 취미를 가진 사람을 만나도 도통 공통점을 찾을 수 없을 만큼 내 취미는 항상 빈약한 열정을 양분으로 자라 곧 스러져버릴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사람들과의 만남이 힘겨운 내향인이라서 더더욱 그랬다. 공통점을 찾지 못하더라도 계속 인연을 이어가며 취향을 공고히 할 수도 있었을 텐데, 안타깝지만 인간관계와 취미 모두 그만한 열정을 가지지 못했던 것이다.


퇴근 후 개인 시간이라고 하면 그나마 독서나 미국 드라마를 보는 정도였다. 독서는 주로 자기발서를 읽었기 때문에 자기발서는 책으로 취급하지 않는 분위기에서 나 책 읽는 거 좋아한다라고 말해 그것도 책이냐 라는 소리나 들을게 뻔했다. 그래서 그냥 취미 없는 인간이 되기를 선택했기에 독서가 취미임을 모르는 지인들이 많았다.


미국 드라마는 그나마 보는 영상 중에 취향이 맞는 게 있는 한 번씩 있는 정도였고 영어의 끈을 놓고 싶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것에 가까웠다. 그 취향이 맞는다는 것도 범죄물이나 멜로처럼 어떤 특정 취향이 아니라 그냥 봤는데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범죄물이었다/멜로였다/SF였다.라는 식이었기 때문에 어떤 취향이 있다고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열정적으로 꾸준히 많이 본 것도 아니어서 역시나 타인과의 대화 소재로 올릴 수준은 못 되었다. 괜히 이야깃거리로 올렸다가 소재만 던져놓고 꿀 먹은 벙어리가 된 경험이 한두 번이 아니라 그냥 취미나 여가시간에 대한 이야기는 먼저 꺼내지 않으려고 한다.


회사에서 업무를 맡을 때에도 비슷하다. 영업, 제조, 경영 외에 사무실에 일어나는 일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업무들을 담당했다. 비품관리, 장부작성, 연구비 관리, 재고관리, 발주, 출고, 수출입 서류 처리, 인사관리, 각종 영업관리 데이터 작성 외 윗선에서 요구 시마다 만드는 지표 데이터들과 회사소개서 등 PPT 파일, ISO 인증 준비 등등 경영지원 겸 영업관리 겸 총무 겸 경리 겸 사무보조의 역할을 하면서도 정작 이렇다 할 커리어는 쌓지 못한 채 그저 단순 사무직으로 살아야 했다. 그렇다고 딱히 하고 싶은 업무가 있는 것도 아니라서 어떤 준비를 해야 오래 일할 수 있을지 아직도 모르는 상황이다.






정의되지 않아 나도 남도 불편하다


취향이 없다는 것은 인상을 남길 수 없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제주도 여행이라면 그 친구가 아주 빠삭하지, 그래픽이라면 그 사람이 정말 잘해, 그 친구가 발은 정말 넓어, 걔는 휴일에 영화관에서 살다시피 하더라 등등 연예인이 아니더라도 그 사람을 특정하는 이미지 하나쯤은 다들 있지만 나는 그런 게 전혀 없다.


대화를 하면 참 곤란하다. 같은 걸 좋아하나 싶어 반가운 마음에 이것저것 물어보면 안 해봤다거나 안 본 것은 왜 그렇게 많아서 사람을 무안하게 만드는지, 혼자 있는 시간은 많은 것 같은데 그 시간에 대해 뚜렷하게 드러나는 게 없어 뭘 하는지 알 수가 없는지, 답답하고 대하기 힘든 타입이라는 인상을 주고 있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어느 쪽이 먼저 말을 걸든 대화거리를 찾기가 어렵고, 다른 이의 대화에 끼기도 어렵다. 요즘 인기 있는 드라마나 영화, 유행 트렌드, 떠오르는 신인 배우나 가수, 명품 가방이나 액세서리, 화장품, 새로 나온 신형 차, 관심 있게 보고 있는 인테리어 소품이나 주방용품 등등등 그 어떤 대화를 나누고 있는 무리이건 내가 낄 수 있는 자리는 없다.


그렇다고 외모에 신경을 쓰는가 하면 그것 또 아니다.


머리는 2년 한번 잘랐다. 그저 감고 말리며 빗질만 하고 드라이를 하거나 펌을 하는 일도 잘 없었다. 무겁다고 느껴질 때면 어깨 밑으로 내려오는 길이로 잘랐다. 길이가 짧으면 단정하게 모양새를 잡아야 했지만 어깨 아래로 자르면 머리 끝이 단정하건 말건 신경이 쓰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쩌다가 자르는 시기를 놓쳤을 때는 기증하기 위해 영양에만 신경을 좀 더 썼을 뿐이다.

멋을 내지 않는 그저 긴 머리에 블라우스나 셔츠와 청바지, 그리고 브랜드 없는 만 원짜리 에코백, 그게 내 외모의 전부였다.


주로 입고 다니는 패션 스타일이 있거나 유행을 따르거나 특정 브랜드의 옷을 즐겨 입는 것도 아니었다.


브랜드에 관심이 없다 보니 누군가가 가져온 명품도 못 알아보는 게 당연했고, 그것이 대화의 대상이 되면 그 대화에 끼지 못하는 것도 당연했다.


완전히 친해지지 않는 이상, 나라는 사람에 대해 어디서부터 어떻게 접근해야 될지 몰라하는 것을 느끼곤 한다. 그나마 자신에 대해 말하기를 좋아하는 상대라면 듣기만 하고 영혼 없는 공감의 리액션을 해주는 것만으로 일단 눈앞의 대화는 해결할 수는 있지만, 그 뒤로 인연을 이어가기가 어렵다. 나에 대해 할 이야기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나에 대해 어떤 정형화된 인상을 남길 부분이 한 군데도 없다면, 다른 사람에게 소개하기 곤란하기 이전에 기억에 남는 거 자체가 어렵다. 분명 그 순간에는 즐거운 시간을 보냈지만 일방적으로 자신의 이야기만 했으니 나에 대한 정보는 없고, 기억에 남는 것은 경청을 잘하는 사람 정도일 것이다.

 요즘 퍼스널 브랜드라고 하면서 누구나 자신만의 색을 내고 브랜드화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는데 정말 이해는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감이 오질 않는다. 나에 대해 어떠한 인상도 남기지 못하는 것에 조금씩 불편함이 쌓여간다.



한편으로는 나도 나와 같이 취향을 알 수 없는 무채색 인간을 만나면 불편하다. 어떻게 다루어야 될지 모를, 설명서가 없는 복잡한 기계를 보는 것 같다. 분명 감정도 있고 생각도 하고 대화도 하고 사람같이 행동하는데 뭔지 모르게 비어있고 어디를 보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어 어렵기만 하다. 그렇다고 자기 자신에 대한 표현이 부족한 것도 아니고 오히려 직설적인 면까지 있는데, 다만 딱 이렇다 할 색이 없을 뿐이다.






아직은 무채색 인간


이쯤 되면 나도 나에 대해 궁금해진다.


좋아하는 게 뭐니? 잘할 수 있는 게 뭐니? 하고 싶은 게 뭐니?


할 일을 끝난 퇴근 후나 주말 오후에 무언가를 해보고자 읽을만한 책도 찾아보고 보고 싶은 영화가 있는지, 흥미로운 미드가 있는지 뒤적이지만, 찾아보는데만 두세 시간이 훌쩍 흘러가버리고 결국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유머글이나 좀 읽으면서 시간을 보내버린다. 어쩌다 관심이 가는 책이나 미드를 발견하면 그야말로 즐거운 휴식시간을 가질 수 있지만, 좀 더 적극적으로 나를 위한 시간을 갖고 싶다는 생각은 자주 한다. 물론 나를 위한 시간에 무엇을 해야 할지는 모르겠다.


자기 자신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없다지만 나에 대해 이만큼에 모르는 사람도 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나에 대해서 모를 수가 있을까 생각하다가 문득 반대되는 생각이 떠올랐다.


나에 대해 모르는 게 아니라 정말 취향 따위라고는 존재하지 않는 그런 인간인 게 아닐까? 어쩜 나는 나에 대해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에 떳떳하게 "딱히 좋아하는 게 없다"라고 자신 있게 얘기할 수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구나. 난 좋아하는 게 없는 인간이구나라고 인정하기는 너무 새삼스럽다. 지금껏 몰랐던 것도 아니니까...

무채색 인간이라 불편하고 가끔은, 아니 좀 자주 서운할 일들이 생기기 때문에 나도 나만의 취향과 캐릭터라는 것을 찾아보고자 계속 여러모로 시작은 해보고 있다. 백수가 된 이후로 성과가 있는 게 없어서 그렇지 도전은 끊임없이 하고 있었다. 여전히 나에 대해 모르겠지만 그래도 계속 책을 읽고 글을 쓰려고 노력하다 보니 지금은 읽고 쓰기 정도는 그럭저럭 할 수 있는 인간이 되었다.


아직 나라는 사람을 몇 단어로 정립할 수 있는 것은 없지만 내가 아는 어떠한 특징들을 하나씩 만들어가는 과정에 있다는 생각이 든다. 무엇을 하든 새롭고 설렘은 없지만 대신에 시작하는데 큰 망설임은 없다는 게 장점이다. 이 나이에 익숙한 곳을 떠나 새로이 시작할 지점을 찾는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닌데, 발 딛고 서있는 정착지가 없는 인간이라 그리 어려운 일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남들이 무채색으로 보고, 있는지조차 모른다면 사회적 동물로서 불편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긴 하다. 그렇다고 그들이 원하는 색을 입자니, 어색함에 땀이라도 흘리면 금세 씻겨 내려가 결국 다 지워져 버릴 것 같다. 억지로 맞지도 않는 색을 입느니 좀 불편해도 무채색인 채로 있는 게 낫다. 늦더라도 나만의 색을 언젠가는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계속 이 색 저 색 발라 보는 게 지금으로서는 최선일 것이다.
















이전 12화 끈기가 없어서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