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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돈냥이 Oct 05. 2021

겁이 많아서



비공식적으로 대인공포증


본래 낯가림이 심해서 낯선 사람과 이야기를 잘 못하고 친한 친구와도 오랜만에 만나면 말문을 트기가 어려운 성격이다. 이런 성격은 세상을 살아가는데 여간 불편하고 불리한 것이 아니다. 인맥은 커녕 새로운 친구를 만들 수 없고, 상점에 들어가서 물건을 찾을 때 직원에게 말을 걸 용기를 내야했으며 병원에 가서 접수처에 내 이름을 말할 때조차 심하게 긴장하며 떨어야 했다. 정말 살기 위해 억지로 입을 열고 웃으며 낯가림이 없는 척 연기하며 스스로도 성격이 바뀐 것이라 믿을 만큼 열심히 노력했다. 그 덕분에 낯선 사람 앞에서도 심장이 두근거리지 않고 매장에 들어가서 질문도 할 수 있게 되었으며 말을 걸어오는 낯선 사람이 무안하지 않게 적절하게 대응도 할 수 있게 되었다. 다만 내 안의 나는 여전히 사람이 없는 곳으로 한시바삐 이동하고 싶다는 생각만 하고 있다.


누구나 사람을 대하는 것이 어렵다고 하지만 어쩐지 나와는 난이도가 다르다는 느낌이다. 타인으로 살아본 적이 없어 그들이 얼마나 어려움을 느끼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적극적으로 사람을 만나고 힘들 때면 오히려 사람을 만나 피로를 푸는 부류는 내가 느끼는 정도의 두려움을 느끼지는 않는 것 같다.


전혀 모르는 낯선 사람과의 대면은 말 그대로 나를 소진시키는 경험이다. 길 물어보는 사람에게 대답을 하고 나서 가슴 두근거리는 긴장감은 20대까지 지속되었고 그나마 30대가 되어서는 어느 대기실에서 뜬금없이 시작되는 누군가와의 스몰 토킹을 당황하지 않은 척 이어갈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래도 낯선 사람과의 대화는 피할 수 있으면 피하고 싶은 심정이다.


이런 성격이라 대인공포증을 개선하고 싶다 생각하면서도 치료 프로그램을 알아보지는 못 했다. 치료받으려면 최소 낯선 의사 선생님과 상담을 진행해야 되기 때문이다. 여러 명을 모아놓고 치료한답시고 서로 소개하는 시간을 가지고 말을 걸어보라고 하면 그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오지 않을 자신도 없었다.






안 좋은 일이 벌어질 거라는 상상


카페에서 커피를 가지고 위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서 누구나 커피를 엎지르는 상상을 한다고 한다. 나는 그런 상상을 일상에서 종종 한다.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데 어려움을 겪는 것은 이런 두려운 상상 때문이다. 새로운 일을 시작했을 때 겪을 수 있는 힘든 상황을 미리 상상해서 시작하기도 전에 포기해 버리는 것이다. 경리 사무직으로 들어가면 아직까지 이런 것도 모르고 일했냐며 핀잔을 받을 것 같고, 영어 강사로 일한다 생각하면 나를 무시하고 자기들끼리 떠들고 노는 초등학생들로 가득한 강의실이 떠오른다. 인테리어 설계직은 집에서 잠만 자고 주말도 없는 생활을 다시 할 것 같고, 요양병원에 행정직으로 들어가면 다른 요양보호사들이 하는 일을 나와서 도우라고 종용할 것 같다. 이것저것 가리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말 그대로 지금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다.


안 좋은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상상을 하고 미리 겁을 먹는 것이 단순히 부정적인 성격때문이라면 차라리 다행일 것 같다. 실제로 그런 일은 거의 벌어지지 않으며 언제나 현실은 예상보다 낫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나쁜 일이 벌어질 것을 상상했을 때 겁이 나서 도저히 입사지원 버튼을 누르지 못하는 것을 보니 이제는 이것이 공포증의 영역으로 들어온 것이 아닐까 하는 걱정까지 하게 되었다.


막상 닥치면 걱정하는 일은 그다지 벌어지지 않으며, 당황스러운 일이 발생하더라도 어떻게든 수습을 하거나 잠시 나와서 숨을 돌리며 진정시킬 정도의 경험치는 가지고 있다. 그 말은 닥치면 어쩔 수 없이 견뎌내지만 그전에 선택의 순간에서는 겪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어려움이 없는 일이 어디 있겠냐만은 적어도 내가 이미 경험해서 충분히 예상이 되는 어려움은 최대한 피하고 싶게 솔직한 심정이다.






무서운 일 vs 덜 무서운 일


그렇게 겁이 많으면서 이직할 자리도 구해놓지 않고 다니고 있는 회사는 어떻게 그만두었냐면 그대로 남아 그 상황을 계속 견뎌야 하는 것이 더 공포로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남들 다 쉬는 휴일에도 쉴 수 없고, 일은 늘어나고 챙겨야 할 신입사원만 계속 충원하는 상황에서 체력이 너무 소진되었다. 재충전할 수 있는 시간은 퇴사해야만 가질 수 있었기에 그렇게 했다. 다음 직장을 바로 구하지 못하고 경제적으로 궁핍해질지도 모른다는 공포보다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소진되어가는 상황에 계속 있어야 한다는 것이 더 큰 공포였다.

 

평화롭고 안락한 생활은 무덤에서나 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더 나은 내일이나 이루고 싶은 목표를 향해 가는 것은 너무 꿈같은 이야기이다. 겁이 많은 나에게 세상은 무서운 일 투성이이고 그런 세상 속에서 계속 살아가는 것을 선택했기에, 그나마 덜 두려운 길을 선택하면서 걸어왔다. 그래도 분명 좀 더 설레는 일, 하고 싶은 생각이 드는 일을 선택하는 순간도 있긴 있었다. 처음으로 제대로 된 직장을 구해서 자취를 시작했을 때, 인테리어 설계일을 시작했을 때, 내 명의로 된 첫 아파트를 구입했을 때 등등 짧은 순간이지만 그렇게 설렘을 느끼며 새로운 시작을 한 때도 있었다.


공포감은 설렘보다 더 강렬하게 기억에 남고, 겁이 많은 성격이라 단점이 장점보다 더 크게 다가오는 것 같다. 새로운 생활에 대한 기대보다 내가 책임져야 하고 넘어서야 하는 일들에 대한 정보를 수집해 최대한 미리 대비하고픈 마음이 크다. 신나고 재미있는 삶보다 안정되고 잔잔한 매일을 꿈꾸기에 더 그런 성향이 짙은 것 같다. 내 이런 성향에 불만이 없는 것은 아니고 남들에게 가끔 지적도 받지만 크게 싫지는 않다. 낯가림이 없는 척, 살가운 성격인 척 연기하는 것은 스스로 그렇게 하는 것이 더 살기 편해서였지 낯가리는 내 성격이 싫어서는 아니었다.


겁이 나는 상황을 피하는 것은 좋은 점만 보고 신나서 뛰어들었다가 예상하지 않은 뜨거움에 화들짝 놀라 튀어 오르는 것보다는 나았다. 예상할 수 있는 공포를 미리 생각해보고 그래도 여기보다는 저기가 낫다며 시작해 보면, 예상외로 좋은 점이 있었고 생각만큼 나쁜 상황이 벌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부정적인 성격이라며 핀잔은 받지만 부족한 정보로 최선의 선택을 하고 내 마음을 보호하기 위해서 이 겁이라는 시스템은 나에게 아주 유용하게 작동하고 있다. 시작하기 전에는 몹시 두려움에 떨지만, 시작한 후에는 아무일 없는 평범한 하루에 행복감을 느낄 수 있다.


겁이 어중간하게 있으면 상황에 떠밀려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하겠지만, 겁이 엄청 많으니 떠밀리는 상황에서도 절벽 위가 나은지 밑이 더 나은지 비교하고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새로운 길에 들어서는 나에게 어떻게 그렇게 용기가 있냐며 부럽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싶다. 나는 지금 너무 무서워서 도망치는 중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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