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돈냥이 Oct 05. 2021

적지 않은 나이여서


언제나 늦은 나이였던


공부를 열심히 하거나 많은 친구들과 열심히 논 것도 아닌 학창 시절을 보내고, 고3이 돼서야 수험 공부를 시작했다. 당연히 진로에 대한 고민은 없었고, 성적과 집안 사정에 맞추어 대학과 전공을 결정했다. 휴학 없이 스트레이트 졸업을 하고 1년간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다 포기를 했더니 나이가 어느새 반오십이었다. 취업준비도 안되어 있는 나를 받아주는 곳은 일반적인 상식으로 운영되는 회사들이 아니었다. 제대로 돈을 벌지도 못하고 제대로 된 직장을 구하지 못 한 채, 궁여지책으로 워킹홀리데이를 떠났다. 남들은 취업해서 신입사원으로 한창 일할 나이에 돈이 없어 어학연수가 아닌, 남들은 재학 중에 다녀온다는 워홀을 떠나는 게 너무 한심하게 느껴졌다. 워홀을 다녀와서 20대 후반에 늦깎이 신입으로 취업했다. 그리고 30대 초반, 또다시 늦은 나이에 인테리어 설계직으로 늦깎이 신입 입사를 했다. 그 뒤로도 몇 번의 퇴사와 이직을 하며 늦은 나이로 신입 월급을 받았고, 친구들이 결혼해서 자리를 잡을 때야 겨우 내 명의의 오래된 아파트를 구입했다. 그리고 마흔을 앞둔 늦은 나이에 또다시 백수가 되었고 아직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고민을 하고 있다.


공부도, 연애도, 취업도 항상 남들보다 늦었고 지금도 남들보다 훨씬 뒤에서 느린 걸음으로 가고 있다. 언제나 나는 늦은 나이였다.






언제나 늦지 않았다고 말해주는 사람들


늦었다고 생각한 워홀에서 나보다 더 나이가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사회생활을 하다가 영어가 필요해서, 휴식이 필요해서, 새로운 도전을 하고 싶어서 등 다양한 이유로 워홀 비자를 받을 수 있는 제한 나이 바로 몇 달 앞두고 한국을 떠난 사람들도 있었다. 구체적인 목표는 없지만 영어를 익히고 어느 정도 돈을 모아가면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지 않겠냐고 하면서 이미 늦었다고 생각한 내 나이를 부러워했다. 자신이 내 나이였다면 더 많이 배우고 더 많이 경험하고 더 많이 놀 거라는 말을 했다. 그 말을 응원으로 새겨서 20대 후반이라는 늦은 나이에 신입으로 열심히 입사 지원을 했고 제대로 된 첫 직장을 가질 수 있었다.


매 순간 나는 늦었었다.

남들은 학창 시절에 겪으며 배운 인간관계를 사회생활에서 터득했고 아직까지도 진로 고민을 한다. 매번 왜 이렇게 나는 남들보다 늦는 걸까라며 한숨을 쉴 때마다 신기하게도 아직 늦지 않았다며 자신이 내 나이라면 좋겠다는 사람들을 만났다. 자리를 못 잡고 다른 곳을 기웃거리는 나에게, 그 나이면 뭐든 도전할 수 있고 새로 시작하기 딱 좋을 나이라고 말했다. 그때 내 나이가 몇 살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 나이를 지나 본 사람들이 그때를 돌아보며 해주는 이야기는 마치 미래의 내가 나에게 보내는 메시지처럼 들렸다. 지금 시작하지 않았던 것을 후회하는 언젠가의 내가 보내는 응원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적지 않은 나이라는 이유로 한숨은 쉴지 언정 주저앉지 않을 수 있었다. 그분들이 할 수 있다며 등 떠밀어주면 기어가든 걷든 조금이라도 나아가려고 했다. 설령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해서 한 말이 아니더라도 나에게 힘을 주기 위해 해준 말이 고마워서라도 움직여야 했다. 그래서 늦더라도 아예 멈춰버리지 않을 수 있었다.

 





늦은 나이라는 것은 결국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만의 것


나이 먹어서 할 수 없는 것은 키즈 모델뿐이라고 한다. 요즘 사진 기술이 좋아서 어른을 아이의 얼굴로 순식간에 바꿀 수 있는 만큼 이조차도 어린이 고유의 영역에 남아있지 않을 수도 있다. 나에게 늦은 나이라며 왜 일찍 시작하지 않았냐는 타박만 한 사람들과 세상은 나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나를 움직이게 한 것은 아직 너무 좋은 나이라고 말해준 사람들과 그런 나에게 기회를 준 세상이었다. 그 응원 덕분에 계속 나아갈 수 있었고, 그래서 내가 쌓아온 경험들을 인정해주고 아직도 새로 시작할 수 있는 도전 정신에 점수를 준 사람들과 세상을 계속 만날 수 있었다.


기존에 내가 살았던, 이 나이면 이걸 해야 하고 그 나이면 이 정도는 해 놨어야 한다고 규정했던 세상에서 나는 언제나 실패자였다. 처음 늦었을 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실패자였고 어떻게든 따라가 보고자 치는 발버둥은 이용해먹기 좋은 먹잇감이었다. 만약, 아직 늦지 않았다며, 한창 좋을 나이라고 말해주는 사람들을 믿지 않고 그냥 해주는 좋은 말이라며 무시했다면, 나는 그 자리에 멈춰서 버렸을 것이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도록 놔두지 않았을 것이고 결국 세상이 떠미는 대로 취업을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그렇게 내가 뭘 하고 싶은지에 대해 고민할 여유도 없이 그 세상에 정해놓은 타임라인대로 따라가야 했을 것이다. 계속 너무 늦었다며 재촉당하면서 말이다.


곧 마흔이지만 아직도 내 나이를 새로운 시작을 하기 좋을 때라고 한다. 자신이 그 나이라면 이런 걸 해보겠다는 조언들이 참 고맙다. 눈을 최대한 낮춰 아무 곳에나 일단 들어가라는 말을 따라갔다면 경제적 여유도 얻지 못하고 지금 누리고 있는 나만의 시간도 갖지 못했을 것이다.


세상이 정해놓은 스케줄을 따르는 것이 꼭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게 충분한 시간을 들여 찾아낸, 내가 원하는 것과 일치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일 것이다. 하지만 그 생각할 시간과 여유를 주지 않고 어린 나이부터 너무나 몰아붙인다. 충분한 시간과 다양한 정보를 바탕으로 무엇을 하면 좋을지 생각할 여유를 허락하지 않는 세상이 안타깝다.


항상 기억하고, 자신과 타인에게 이렇게 이야기해주어야 한다.


당신은 아직 늦지 않았다. 무엇을 해도 좋을 나이다.



이전 06화 골드미스가 아닌 그냥 미혼이라서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