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경수 Oct 27. 2020

거문오름에서 노닐기

어욱, 어웍, 어워기 그리고 새

거문오름에서 해설사 활동을 할 때 가끔 이런 질문을 받을 때가 있다.

“거문오름은 일 년 중 어느 계절이 가장 좋아요?”


조금은 난감하다.

계절마다 오름의 모습은 제각각 다른 모습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꽃 피는 봄날?

천연 에어컨 역할을 하는 풍혈이 발동하는 여름?

애기 단풍이 은은하게 물드는 가을?

눈 터널을 이루는 겨울?

어느 경치 하나 마다할까?


고민하다 나는 이런 반문을 개발했다.     

“엄마가 좋아요? 아빠가 좋아요?”

“그러네요!”

대부분 킬킬 웃는다.

어떤 분은 이런 반응도 보이셨다.

“우문현답이군요”

그럴 리가.

아마 머리 허연 나에 대한 동정심이겠지. 

    

지금 거문오름에서의 볼거리는 단연 억새이다.

1코스나 2코스를 마치고 탐방안내소로 가는 길에 억새길이 있다.

해설사 님들은 모두 이 길을 택하여 가시도록 안내를 한다.

이 곳은 원래 사유지였다고 한다.

그런데 세계자연유산으로 동록되면서 핵심지역인 분화구의 생태를 지키기 위해 제주도에서 매입을 하고 완충지역으로 지정하였다고 한다.

이 지역에는 모든 경작활동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억새밭이 형성되었다.    

 

아마 원래는 ‘새밭(띠밭)’이었던 같다.

군데 군데 새(띠)가 자라고 있다.

‘새밭’을 관리하지 않고 그냥 놔두면 억새가 들어 와 이렇게 다 차지하고 만다.

그래서 ‘새’는 ‘새’이고 억세니까 ‘억새’란 농담이 생기기도 했나 보다.


옛날에는 ‘새(띠)’를 관리하기 위해 ‘새밭’에 풀 뽑기 작업도 해 줬다.

그것을 ‘새왓 검질’이라고 했다.

‘왓’은 밭을 이름이고, ‘검질’은 잡초의 제주어이다.

그러니 ‘띠밭에 잡초 제거’ 이런 뜻이다.


이러다가도 ‘새(띠)’가 잘 자라지 않으면 ‘새(띠)’의 뿌리를 다른 곳에서 캐다가 심기도 했다.

그것은 ‘샛발 묻음’이라고 했다.

그리고 ‘새밭’이 지력이 다 해 ‘새’가 잘 자라지 못하면 다시 개간하는데 이것을 ‘새물찜’이라고 했다.


이처럼 ‘새(띠)’는 중요했다.

제주 전통 초가 지붕을 잇는 재료이기 때문이다.


이뿐만 아니다.

‘새’는 민간신앙과도 연관이 깊은 듯 하다.

산소에 가서 제를 지낼 때, 또는 치성을 드릴 때, ‘새 줄기’를 잘라 밥이나 쌀에 꽂기도 했다.

이것을 ‘새껍-저붐’이라고 한다.(저붐은 젓가락의 제주어이다. 원래는 ㅈ 다음에 아래 어를 써야 하는데 온라인에서는 고어 지원이 안 된다. 이것도 빨리 시정되었으면 좋겠다.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글이라고 자랑만 말고 아름다운 우리 말을 원형대로 쓰게 해 주는 게 맞지 않은가?)

그런데 이것은 제주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네이버에 보면 제사 지낼 때 이런 항목이 있다.    

제사 지낼 때 ‘모사 접시’라는 게 있는데 이것이 바로 이것인가 보구나!

그런데 어쩌다 ‘새’가 아니라 지금은 고사리를 쓰는지 모르겠다.

참으로 흥미있는 일이다.     


그에 비하면 억새는 천덕꾸러기였다.

온통 산과 들을 다 차지하고 으스대지만 정작 별 쓸모가 없다.

봄철 연한 새순을 '미'라고 부른다. '미'는 배고픈 아이들에겐 좋은 간식거리가 되기도 했다. 너무 센 것을 먹으면 변비가 생긴다고도 했다. 이 때의 억새는 가축 사료로도 쓰이긴 했다.

또는 ‘주젱이(주저리: 띠나 짚으로 둥글게 엮어 가리 꼭지 따위에 덧덮는 물건)’을 만들 때 사용되는 정도였다.

모든 농사가 끝난 초겨울.

아버지는 양지 바른 마당 한 구석에서 ‘노람지(이엉)’와 ‘주젱이’를 엮으셨다.

그럴 때면 해가 하늘에 있는 한 밭구석에 앉아 계시던 어머니도 모처럼 집안에 계셨다.

그 따뜻한 햇살 아래 조근조근 얘기하시는 두 분의 목소리는 나에게 평온의 상징이기도 하셨다.

이제는 아주 먼 기억 속에, 정말 있었는지 없었는지도 가물가물한 한 조각의 기억에 불과하지만.    

 

그런 억새가 언제부터인가 제대로 대접을 받기 시작했다.

이 계절, 전국의 산과 들에는 나부끼는 억새 모습을 보기 위해 행락객들이 북적인다.

참 세상일이란 이렇게 모르는 일이다.     


내가 초등교사로 처음 발령받은 것은 1976년 10월, 성산읍 수산리였다.

그 곳에서는 억새를 ‘어웍’ 또는 ‘어워기’라고 불러 너무 우스웠다.

우리 동네(애월읍 하가)에서는 ‘어욱’이라고 하는데.

이 좁은 제주 땅에서도 한 금은 넘어가면 말이 이렇게 달라진다.

그러다 우연히 ‘국립국어원’의 ‘우리말 샘’이란 곳에서 이외의 것을 발견하였다.  

  

이건 뭐지?

‘어웍’이나 ‘어워기’ 또는 ‘어욱’이 제주어가 아니라 우리 옛말이었구나!


그렇다면 제주인들은 ‘억새’라고 두루뭉술하게 부른 게 아니라 ‘어웍’ 과 ‘새’를 구분하여 불렀구나!

‘어웍, 어워기, 어욱’은 지금의 ‘억새’이고, ‘새’는 ‘띠’를 그렇게 불렀구나!     

나로서는 놀라운 발견이었다.

그렇다면 혹시 ‘띠’를 옛날에는 ‘새’라고 하진 않았을까?

여기에선 내가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온갖 자료를 다 뒤져 봐도 이에 대한 단서는 찾을 수 없었다.

혹 한글로 토를 단 조선시대에 사용했던 천자문에서는 ‘茅’를 ‘무슨 모’라고 되어 있을까?

그러나 그런 책을 당연 구 할 수 없었다.

심지어는 헌책방에 가서 ‘훈몽자회’나 옛 ‘천자문’이 있나 문의했더니, 주인도 그런 책이 있으면 자기가 사고 싶단다.

일전 백사 이항복 선생님이 자기 증손자를 위해 천자문을 친히 쓰시고, 한자 아래 한글로 뜻과 음을 적어 놓으신 책을, 그 종중에서 대학 도서관에 기증했다.

그 책에는 ‘茅’를 ‘무슨 모’라고 했는지 궁금하지만 알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그 도서관에서 영인본이라도 출간하여 세상에 내놓으면 나 같은 사람에게는 무척 도움이 될 것 같은데.

그러다 우연히 한글 워드에서 ‘띠’를 나타내는 한자 ‘茅’를 검색하여 보았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 있었다!     


茅 띠 모; ⾋-총9획; [máo]

띠, 띠를 베다, 새를 베다, 띳집, 띠로 이은 집  

   

위에서 보다시피 여기에 ‘새를 베다’란 말이 있다. 


그러니 ‘새’와 ‘띠’와 같은 말이거나, 아니면 ‘띠’의 옛말이 ‘새’일 것이다.

제주어 속에 이렇게 우리 옛말이 오롯이 들어있고, 이래서 제주어가 제주의 3보 중 하나가 되었구나.


‘새’ 중에 길이가 짧은 것을 ‘각단’이라고 불렀다.

‘각단’은 꼬아서 지붕을 이을 때 사용하는 줄을 만들기 때문에 역시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가을 농사가 끝나고 이웃끼리 품앗이 하면서 ‘줄을 놓고’ ‘집을 이으면’ 한 해 일은 다 끝난다. ‘집을 이으는 것’은 한겨울 휴식에 들어가는 시작이다.

흔히 ‘초가집’이란 말을 많이 쓰는데, 이는 ‘초가’나 ‘초집’이라고 해야 한다.

‘초가집’에서 ‘가’와 ‘집’은 같은 뜻이기 때문이다. 제주에서는 초가집이라고 하지 않았다. 그냥 ‘초집’이라고 했다.


초가집은 나타내는 한자어는 두 개다.

‘모옥(茅屋)’과 ‘초가(草家)’가 그것이다.

茅屋에서 茅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새(띠)’를 말하는 것이고 屋은 지붕을 가리키는 것이니, 모옥이란 ‘새(띠)로 지붕은 이은 집’을 뜻이다.

반면 ‘초가’는 ‘풀로 지은 집’이란 뜻이니 꼭 ‘새(띠)’로 지붕을 이은 것이 아니라 ‘새(띠)’나 볏집 등을 이용하여 지붕을 이은 집이 될 것이다.

그러니 제주에서는 ‘茅屋’이고, 육지에서는 ‘草家’가 된다. 굳이 구분하자면 말이다.


옛 글에는 이 둘이 다 쓰이고 있다.     


십 년을 계획하여 초가삼간을 지어내니

나 한 간, 달 한 간, 청풍(淸風) 한 간 맡겨 두고

강산(江山)은 들여놓을 곳 없으니 둘러놓고 보리라

                                 -송순 (宋純)-     


心安茅屋穩 마음이 편안하면 모옥도 평온하고,

性定菜羹香 성품이 안정되면 나물국도 향기롭다.

                                  -채근담-


억새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옆으로 새었다. 글을 쓰는 게 서투르니 맨날 하는 일이 이렇다.

다시 억새로 돌아가자.    

 

흔히 억새는 필 때는 붉은색을 띠다가 다 피면 하얀 색으로 변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 번에 살펴보니 꼭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아래 사진들을 보면 필 때부터 하얀색과 붉은색을 제각각 띠고 있다.  

   

억새를 감상할 때는 역광으로 보는 게 좋다.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거리는 억새가 명품이 된다.

그리고 사진을 찍을 때 자세를 낮추고 파란 가을 하늘을 배경으로 하여 찍으면 파란 하늘과 하얀 억새가 궁합을 잘 이룬다.

사진을 자신 있으신 분들은 역광으로 찍어 봄도 좋을 것이다.   

  


옛 유행가에 ‘짝 사랑’이란 노래가 있다.

그 노래 첫 구절은 이렇다.     


아~ 아~ 으악새 슬피 우니

(이하 생략)     


여기에 나오는 ‘으악새’가 무엇이냐 하는 것에 말이 많다.

어떤 분들은 ‘새 이름’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아무리 한들 ‘으악’하고 우는 새가 정말 있을까?

국립국어원 ‘우리 말 샘’에서 찾아 보니 ‘으악새’에 대한 설명이 있었다.      



출처: 국립국어원 우리말 샘


그러니 윗 노랫말은     

‘아~ 아~ 억새 슬피 우니’ 란 뜻이다.     

실제로 억새가 바람에 파르르 떨리는 모습은 가을의 대표적인 풍경이다.

촬영: 정희준

단풍이 가을의 화려함을 나타낸다면, 억새는 가을의 쓸쓸함을 나타낸다.

과연 가을은 화려한 계절인가? 아니면 쓸쓸한 계절일까?

물론 사람에 따라 생각이 다 다르겠지.     


억새와 새 사이에 또 다른 풀 하나가 끼어서 같이 핀다.

‘수크렁’이다.

이 풀에 얽힌 이야기도 결코 만만치 않다.

바로 ‘결초보은(結草報恩)’의 주인공이다.

이에 대한 이야기는 너무 길기 때문에 여기서는 말하지 않겠다.

흥미 있으신 분은 인터넷에서 찾아보시라.     

이 좋은 계절!

거문오름에 오시는 분들에게 드리는 또 하나의 팁!

그것이 바로 억새밭이다.


작가의 이전글 거문오름에서 노닐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