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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Sep 04. 2024

《고양이는 정말 별나, 특히 루퍼스는..》도리스 레싱

이것은 그러니까 텍스트로 이루어진 고양이 다큐멘터리...

  소설 《고양이는 정말 별나, 특히 루퍼스는......》은 텍스트로 이루어진 고양이 다큐멘터리라고 할 수 있다. 주인공인 내가 등장하지만 나는 일종의 나레이터일 뿐이다. 다큐멘터리의 실질적인 주인공은 어쨌든 고양이다. 내가 만났던 고양이, 나와 헤어진 고양이, 어린 시절의 나와 만난 고양이, 나이든 나와 함께 한 고양이, 죽은 고양이와 새끼 고양이까지, 세상의 많은 고양이가 주인공인 다큐멘터리이다.




  “그러던 어느 날 고양이는 계단 난간을 통해 아래 계단의 어느 한 부분으로 착륙하는 묘기를 부리려 하다가 실패했다. 고양이는 이 묘기를 다시 시도했다.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고양이는 모멸감을 느꼈다. 그래서 그 시도를 아예 하지도 않은 체했다. 즉, 자기는 계단의 모퉁이들을 일일이 돌아서 걸어 내려가는 코스가 더 마음에 든다는 그런 태도를 선택한 것이다.” (p.67)


  독자인 나는 이제 이십이 년 차의 고양이 집사이다. 그래서 소설의 앞 부분에 등장하는 농장의 고양이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죽게 되는 장면들에서 자꾸 책을 덮었다. 겨우 힘을 내어 계속 읽고, 그렇게 주인공이 성장하여 고양이를 키우기 시작할 무렵이 되어서야 내 마음도 안정이 되었다. 그리고 그제야 내가 키우는 두 마리의 고양이, 그 고양이들의 등장과 여러 사건과 잊지 못할 장면들을 오버랩 시킬 수 있었다.


  “... 고양이는 긴장 띤 정지(靜止)의 자세를 풀지 않는다. 몸의 전부 - 털 · 수염 · 귀 · 등 -를 가지고서 보고, 듣고, 느끼고, 냄새 맡고, 그리고 숨을 쉬는 고양이는 공기처럼 가뿐해 보인다. 고양이를 이루고 있는 모든 것은 이때 다 같이 작고 섬세하게 고동치고 있다. 만약 물고기를 물의 움직임의 실체화라고 한다면, 고양이는 손으로 만질 수도 없는 공기의 표본이요 상징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p.80)


  독자인 나의 첫 번째 고양이 용이가 처음 발정을 시작했을 때, 반지하의 방충망을 뜯고 그 틈으로 나갔다가 몰래 들어와서는 시치미를 떼곤 하던 시절을 떠올렸다. 아내와 나는 그때 용이가 새끼를 갖도록 할 것인지 아니면 중성화 수술을 시킬 것인지를 두고 여러 날 토론했고, 주변의 다양한 의견들을 수렴했다. 결국 우리는 고양이 용이가 동네 우두머리 고양이 아래에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발견한 날, 병원을 향했다.


  “... 고양이 새끼들. 고양이 새끼들은 마치 소나기 내리듯 우리에게 온다. 그것들은 마치 우리를 공식방문하는 사절단과도 같다. 그 수가 어찌나 많은지 마지막에 가서는 그들은 마치 ‘고양이’라는 하나의 상징과도 같아진다. 고양이 새끼들은 매년 마치 헐벗은 가지에 잎이 돋아나 푸르고 묵직하게 달렸다가 지는 것과 같이 우리에게 왔다가는 가버린다...” (p.177)


  책에는 회색 고양이와 검정 고양이가 새끼를 낳고 키우는 장면이 수없이 등장한다. 작가 또한 이 고양이들의 수술을 두고 고민한다. 회색 고양이는 결국 두 번인가 세 번인가 새끼를 낳은 다음에 수술을 하지만, 검정 고양이는 그러지 않은 것 같다. 주인공은 새끼들은 모두 보내고 결국 회색 고양이와 검정 고양이만을 옆에 남겨 놓는데, 두 고양이 사이의 데면데면한 관계가 나의 고양이 용이와 들녘이와의 관계를 닮았다.


  “왜 하필 이 고양이냐고, 다른 고양이들은 다 싫고? 이 점잖은 늙은 고양이가 네 마음에 드는 이유가 무언지 내게 말해봐라. 네 평생 동안 넌 우리 집에서만도 별의별 고양이들을 다 만났지. 그리고 그 고양이들은 거의 하나같이 다 잘생기고 훌륭한 고양이들이었어. 그런데도 넌 그들 모두를 다 싫다고 했어. 그런데 이제 와서 넌......” (p.235)


  회색 고양이와 검정 고양이의 이야기가 불쑥 끊기고, 시간을 두고 루시퍼가 등장한다. 그사이 많은 일이 있었겠지만 (나이 든 회색 고양이와 그 회색 고양이가 데리고 오는 노신사와 같은 수컷 회색 고양이에 대한 회상의 장면이 루시퍼 이야기 사이로 끼어든다.) 이제 주인공은 그때 키우고 있던 두 마리 고양이에 더해진 오렌지 색의 아픈 고양이 루시퍼에 대한 이야기로 소설을 마무리 짓는다.


  “고양이들을 알게 되고 일생을 고양이들을 지켜보며 살고난 후 남은 것은 인간의 경우와는 전혀 다른 슬픔의 앙금들이다. 이 앙금들은 고양이들의 무력함에 대한 아픈 연민과 우리 모두가 저지른 것에 대한 죄의식이 함께 뒤섞여서 만들어진 것이다.” (p.240)


  고양이 용이가 아프고 난 다음, 고양이 들녘이는 심성이 착한 고양이가 되었다. 소란은 줄었고 용이를 향하던 용맹함을 지워버렸다. 고양이 용이는 박스에서 꼬깃꼬깃 잠들어 있는 고양이 들녘의 엉덩이를 깨물고는 한다. 그럴 때마다 고양이 들녘은 영문을 모르겠네, 하는 표정으로 잠시 고개를 들었다가 다시 고개를 떨군다. 그것으로 그만이다. 소설 속 회색 고양이와 검정 고양이가 내게도 있고, 그것은 현실에서 진행형이다.



도리스 레싱 Doris Lessing / 제임스 맥멀런 그림 / 설순봉 역 / 고양이는 정말 별나, 특히 루퍼스는...... (Particularly Cats...... and Rufus) / 예문 / 251쪽 / 1998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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