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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7시간전

칼 오베 크나우스고르 《모든 것을 위한 시간》

'앞면과 뒷면이 존재하지' 않는 나(작가)의 한 시절...

  소설의 앞 부분에 아래와 같은 문단이 등장한다. 나(작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자신이 지내던 도시를 떠나 북부의 외딴 곳에 위치한 (주민 수가 250명 정도인) 마을의 학교에 단기 계약 교사로 일하기 위하여 이동하는 중이다. 시골 마을에 도착하기에 앞서 방문하게 된 소도시 핀스네스를 묘사하고 있는 것이 바로 아래의 문장들이다. (나는 핀스네스를 구글 지도에서 검색하였다. 노르웨이의 저기 위쪽 꼭대기에 위치하고 있었다.)


  “몇 시간 후 작은 빵집에서 커피 한 잔을 마시며 버스가 오기를 기다리던 나는, 서둘러 지은 듯한 밋밋한 콘크리트 건물들이 양쪽에 늘어선 중심 도로와 저 멀리 보이는 황량한 산봉우리만 본다면 핀스네스는 알라스카나 캐나다의 한 작은 마을과 다름이 없다고 생각했다. 시내 중심이라 이름 붙일 수 있는 곳도 없었다. 마을은 너무나 작아서 마을 전체를 시내라 해도 좋을 것 같았다. 도시의 분위기는 내가 자랐던 도시의 익숙한 분위기와는 너무나 달랐다. 규모가 작기 때문일 수도 있었지만, 도시를 아름답고 보기 좋게 꾸미기 위해 신경 쓴 듯한 느낌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도시들은 앞면과 뒷면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핀스네스에는 앞면과 뒷면이 존재하지 않았다.” (P.16)


  나(작가)는 그 핀스네스를 ‘앞면과 뒷면이 존재하지’ 않는 도시로 바라보고 있다. 휘황찬란한 앞면과 후미진 뒷면이 공존하는 도시와 대비시키는 묘사였는데 절묘하다. 게다가 이는 작가의 소설이 갖는 (오토 픽션이 내재하고 있는) 특징이기도 하다. 보이는 대로 보고 읽히는 대로 읽으면 되는 것이다. 소설 속 나(작가)의 (열여덟 살이라는) 나이 또한 앞과 뒤를 갖기에 턱없이 부족하다는 점에서 이 도시의 특징을 공유한다.


  “문득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의 반 이상을 버스 안에서 보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르막길과 내리막길, 이곳저곳, 나날이 계속되는 비슷한 일상. 버스, 버스, 버스. 우리는 버스에 관해서만큼은 전문가였다. 무의미한 자전거 타기와 끝없는 걷기와 마찬가지로. 물론 우리 존재의 회전축을 중심으로 어디에서 파티가 열리는지 알아차리는 것도 우리의 전문 분야라고 할 수 있었다...” (p.276)


  성인이라고 부르기엔 뭔가 부족한 시기의 나(작가)는 덜컥 몇 살 차이가 나지도 않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에 복무하게 되었다. 낯선 곳이고 폐쇄된 공간에서 (아직 작가로 등장하기 이전인) 나는 아이를 가르치면서, 몇몇 소녀들은 (그래선 안 되는 줄 알면서) 이성의 시선으로 바라보기도 하고, 술을 마시고, 동료 교사들과 학생들의 방문을 받아들이고, 그리고 낮과 밤을 바꿔 가면서 단편 소설을 쓴다. 


  “나는 그해 봄엔 하루도 쉬지 않고 계속 술을 마셨다. 아침이면 루스 버스 안이거나 낯선 아이의 집 소파 또는 공원의 벤치 위에서 잠을 깨기 일쑤였고, 정신을 차린 후엔 다시 술을 마셨다. 하루를 맥주로 시작하고 술에 취해 오전 시간을 보내는 일을 계속하다 보니, 이것이 바로 내가 원하는 삶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술을 마시고, 저기서 술을 마시고, 잠이 오면 장소를 가리지 않고 잠을 자고, 눈을 뜨면 배를 채우고, 다시 술을 마셨다. 황홀하기까지 했다. 나는 술에 취한 기분을 사랑했다. 술에 취하면 내 본모습을 되찾는 것 같았고,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는 용기를 낼 수도 있었다.

한계와 제약은 없었다...” (p.493)


  별다른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작가는 이 소설에서도 멀지 않은 과거를 자주 소환한다. 졸업 학년일 때 술을 마시는 시기(이 나라의 고등학교에는 그런 전통이 있단다)를 묘사한 위와 같은 장면에서 나(독자)는 화들짝 놀라고 말았는데, 그것이 나의 대학 신입생 시절에 대한 묘사라고 해도 전혀 틀린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야말로 ‘한계와 제약’이란 것을 찾아보기 힘들었던 그 시절을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나이가 들면서 나는 밤에 홀로 앉아 있는 것을 좋아했다. 정적과 조화를 이룬 어둠은 너무나 매혹적이었고, 그것은 세상이 내게 해주는 거대한 약속처럼 느껴졌다. 가을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계절이었다. 비 내리는 어둠 속에서 강가를 거닐 때의 기분은 어디에도 비할 수 없다.

이곳의 어둠은 달랐다. 모든 것은 이 어둠 속에서 생명을 잃어버렸다. 움직이지 않는 어둠. 그것은 내가 깨어 있을 때나 잠을 잘 때나 변하지 않았다.” (pp.630~631)


  여하튼 이로써 칼 오베 크나우스고르를 또 한 권 읽었다. 아껴가며 읽자고 생각하고 그렇게 했는데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포기하였다. 그럴 가치가 있어, 라는 생각과 그럴 가치가 있나, 라는 의문이 동시에 들어 갈등한 결과였다. 성욕 충만 십대 남성이 주인공이기에 갖게 되는 여성에 대한 성적 대상화의 문제를 다른 이들은 어찌 보았는지 궁금하기도 하다. 그럼에도 이 작가를 읽기를 멈출 것 같지는 않다. 



칼 오베 크나우스고르 Karl Ove Knausgård / 손화수 역 / 모든 것을 위한 시간: 나의 투쟁5 (MIN KAMP 4) / 한길사 / 751쪽 / 2022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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