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름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친구가 "하루종일 집에서 쉬었어." 같은 말을 하면 묘한 동질감과 안도감을 느꼈다. 집에 있으면 좀이 쑤셔서 언제나 튕겨 나가는 명희*는 "오늘도 하루죙일 누워있었냐?" 물으면 나는 "장판과 하나 되었습니다." 명희는 "그게 네 카르마인가 봐." 했다. 폭행, 폭언처럼 누가 봐도 나빠서 고쳐야 하는 것쯤 돼야 카르마인 줄 알았다. 난 카르마가 없거나 있어도 미비한 수준인 줄 알았으나, 스스로를 단단히 오해하고 있었다. 나의 카르마는 게으름이었다.
게으름에 대한 자격지심을 두 손 가득 들고 손님처럼 부지런함이 찾아왔을 때 무리하게 부지런했다. 최고치의 부지런함과 최고치의 게으름이 함께했다. 게으름은 수용성인지 샤워하고 나면 어느 정도 정신이 난다. 집 안 창문을 모두 열고, 등을 모두 켜고 청소한다. 이때 하는 청소는 본래의 목정인 청결보다 고해성사에 가깝다. 설거지하고, 바닥 쓸고, 걸레질한다. 널브러진 옷은 대충 서랍에 넣는다. 그리고 출소하듯 집 밖을 나선다. 나가서 아이스크림이라도 사 온다. 나를 망치러 온 게으름도 있었지만 구원해준 습관들도 있었다.
목적이 없을 때 갈팡질팡하다가 포기하는 모습이 게으름으로 표현된다. 목적이 정해지면 그에 맞는 일들을 한다. 중요하지 않은 목적이라도 정해지면 근면하게 한다. 회사에 다닐 때 목적은 정할 때보다 정해지는 때가 많았다. 해야 하는 일이 있어도 상사의 요청을 받으면 나는 바쁜 마음으로 요란하게 상사가 요청한 일을 먼저 처리했다. '쉬는 날 오전에 카페 가서 책 읽자.' 같은 내가 정한 목적은 힘이 약했다. 목적의 달성 여부는 자발성보다 강제성과 관련이 있다. 목적 달성이 강제성으로 해결된다면 답은 간단하다. 회사를 다니면 된다. 애석하게도 나는 회사를 다니고 싶지 않았다. (누구나 회사가 싫지만 싫은 이유에 대해서는 다른 에피소드에서 잘근잘근 말해보겠다.)
*명희의 종교는 무교에 가까운 천주교다. 유튜브 <법륜스님의 즉문즉설>을 자주 보는데 불심보다 팬심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