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벙한 신입 백수답게 모든 게 조심스러웠다. 신입시절 나는 자주 부끄러움을 느꼈다. 다들 신발을 신고 있는데 나만 맨발로 다니는 것 같았다. 벌거벗은 정도는 아니지만 맨발을 하고선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는 정도로 꾸준하게 부끄러웠다. 비둘기 모임 동지도 훨훨 날아간 지 오래다. 놀이터에 혼자 남은 어린이가 되었다. 향을 피우면 스멀스멀 하얀 연기가 공간을 채우듯 내 마음에도 묘한 불안이 연기처럼 차올랐다. 나는 무엇이 되지 않아서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상태였지만 어느 날은 이 말에 힘을 얻고 어느 날은 이 말에 힘이 빠지는 게 반복되었다.
그러다 당근마켓을 시작했다. 엉뚱한 전개지만 판매자라는 직업을 얻었다. 버리긴 아깝고 쓸 일 없는 물건들을 당근마켓에 올렸다. 쓰지 않는 물건들은 한 자리씩 차지하고선 자석처럼 다른 물건을 끌어들였다. 점점 자라는 것처럼 보였다. 청소할 때마다 계륵 같은 물건들이 더 눈에 띄었다. 처음에는 '이게 팔리겠어?' 반신반의한 마음으로 물건을 찍어 올렸다. 신기하게도 '때가 되면' 팔린다. 엄마 친구가 준 '멀티 힙업 착압 타이즈' 9개는 늘 베란다 한편에 화분처럼 있었지만 찬바람이 솔솔 불던 초가을에 품절되었다. 동생이 전 여자 친구에게 받은 '돈을 넣을 수 있는 계란 모양 아크릴과 계란 한 판 종이'는 몇몇 구매자가 진짜 계란으로 착각해서 헛걸음했지만 마침내 4,000원에 판매했다. 엄마가 어깨 수술을 하고 썼던 '보조장치'는 병원에서 200,000원에 어이없이 구매한 물건이었는데 2주 쓰고 보자기에 싸여 베란다에 터를 잡았다. 크기도 생각보다 크고, 형태도 불규칙해서 어디에 넣어도 삐져나오는 그런 물건이었다. 15,000원에 판매 완료! 속이 후련했다. 그렇게 총 390,200원의 매출 달성! 어느새 자칭 당근마켓 거상이 되었다. 오르막길에 있는 도서관도 책 반납할 때는 가야지 가야지 하고 가지 않는데, 도서관 앞에서 당근 거래가 잡히면 철저하게 도서관으로 갔다. "당근이세요...?"돈의 힘으로 잠시 부지런해졌다. 당근마켓 덕분에 최초로 비생산적인 사람이라는 자격지심으로부터 멀어졌다.
당근마켓에서 번 돈으로 서점 오키로북스에서 워크숍을 들었다. 오키로북스는 부천에 있는 작은 서점으로 오프라인 글쓰기 모임에 참여한 게 호감의 시작이었다. 주중에 한 번 오후 7시 반에 조용한 부천역에 내려 북적북적한 번화가를 지나 다시 조용한 오키로북스로로 가는 길, 어색한 침묵 속에 연필로 쓰고 지우개로 벅벅 지우며 글 쓰는 시간이 좋았다. 요즘 오키로북스는 '성장을 파는 서점'으로 주로 온라인 워크숍을 진행한다. 마치 자기 계발서가 서점으로 환생한 것 같다. 자기 계발식 긍정적인 메시지가 버거울 때는 소식을 숨기기도 했다. 왜 숨김을 눌렀느냐 하면 누워서 봤기 때문이다. 요지는 메시지가 아니라 나의 자세였다. 자세를 바로 잡고 글쓰기, 경제공부, 독서모임, 러닝클럽, 아이패드로 그림그리기 등 다양한 워크숍을 들었다. 난 대체로 게으르지만 어린이집 선생님 같은 존재가 나를 봐주고 응원해주면 완주했다. 오키로북스는 나에게 눈높이 선생님 같은 존재였다. 창 밖으로 문제집을 던져도 다정한 미소로 다시 문제집을 가져다주는 다정한 선생님. 스스로를 믿을 수 있는 근거가 빈약했던 나는 블록 놀이하듯 워크숍을 들었고 내가 쌓은 블록은 스스로를 믿을 수 있는 작고 귀여운 초석이 되었다.
독서모임에서 [아주 작은 습관의 힘]을 읽었다. 습관을 만들기 전 내가 어떤 하루를 보내는지 써보는 시간을 가졌다. 최대한 자세하게 쓰라고 했다. 느지막이 일어나서 폰만 끈질기게 주무른 하루라고 밖에는 쓸 말이 없는데... 내가 보낸 하루는 이 빠진 지퍼를 올리는 것처럼 아무리 힘을 줘도 올라가지도 내려가지도 못한 상태로 엉킨 정도겠지 뭐. 도망치고 싶었지만 유료 독서모임이라서 도망치지 않고 조용히 써 내려갔다. 느지막이 일어나서, 청소하고, 씻고, 걷고, 모닝페이지 쓰고, 글 쓰고, 폰을 하다 잠드는 하루였다. 모든 일을 시작하고 끝낼 때 폰을 했다. 일어나서 인스타그램 보다가 청소하고 유튜브 보는 식이었다. 당시 스크린 타임은 10시간대를 육박하고 있었다. 각자 보낸 하루를 발표할 때 게으른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그때 독서모임을 진행하는 오 팀장님이 "게으른 게 아니라 목적이 없어서 방황하는 거예요."라고 했다. 아 그렇구나. 방황이 게으름이라는 망토를 쓰고 오는구나. 내가 보낸 하루 일정표에서 없애고 싶은 습관을 표시한다. 그리고 만들고 싶은 습관을 이유식처럼 잘게 잘라서 원하는 시간대에 넣는다. 예를 들어 매일 오전 운동을 하고 싶다면 일어나서 운동복을 갈아입고 집 앞을 나가보는 것부터 시작해본다. 그렇게 이유식 습관표를 만들고 매일 체크한다. 이유식을 습관을 소화하면 일반식 습관으로 조금씩 바꿔간다.
일본 드라마 중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가 있다. 특히 드라마 제목을 좋아했는데 나는 잘 도망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독서모임 덕에 내가 도망친 하루로 돌아갔다. 내가 퉁쳐서 게으름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다양한 이름이 있었다. 방황할 때, 체력이 미비할 때, 도망치고 싶을 때 나는 게으름 망토를 썼다. 이름 모를 게으름에 이름표를 붙이자 불안이 더 커지지 않았다. 그냥 그대로 있다가 작아지기도 했다. 스스로에게 꼽주지 않는 연습을 하던 시기였다. 나를 믿는 연습. 이것도 연습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