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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마딸 Oct 24. 2020

거짓말 탐지기

칠월 말, 아버지 노인요양시설 이용에 필요한 장애 등급 심사를 받다

우리 어머니 말대로라면, 아버지(시아버지)가 아주 아주 절친한 종열이 아재의 꼬임에 넘어가 처음엔 마지못해 가셨던 노치원(노인 주간 보호시설)에 두어 번 다니시더니 급기야 정식 원생이 되기로 마음을 정하셨다. 오래전 예초기로 풀 베는 작업을 하다 다리를 다쳐 절뚝거리지만 아직 읍내 장에도 가고 매월 정기 모임에도 빠지지 않을 만큼의 여력이 있으니 아버지의 노치원 등원은 별문제가 안 됐다.


아버지는 집에 있을 때면 (밭이나 들에서도 그랬지만) 투박하고 사정없이 말로 쏘아붙이는 할멈의 교양 없는 행동거지가 늘 불만이어서 술이 거나하게 되는 날이면 어김없이 할멈과 다투었다. 아버지의 난청이 심한 까닭도 있긴 했지만. 거기에 비하면 집 앞까지 차가 모시러 오는가 하면 간식이며 점심은 물론 건강 체조에 놀이에 친절한 직원들이 따라다니며 마치 주치의 인양 여기저기 수발을 드는 융숭한 환대는 아버지에게 별세계였다. 막상 가려니 비용 문제로 주춤하고 있었는데 장애 등급이 나오면 무료로 다닐 수 있으니 한번 신청해보라는 친구의 귀띔으로 건강 상태를 심사받아보기로 했다.


오늘 건강보험공단에서 직원이 아버지를 만나러 왔다. 며칠 전부터 노치원의 팀장이라는 직원과, 또 절친 종열이 아재와 여러 번 통화를 하고 어제 노치원에서 또 한 번 교육을 받으신 아버지를 못 미더워하는 어머니까지, 아침 밥자리에서 거듭 대응하는 방법을 확인했고 드디어 아버지는 아랫방에 이불을 펴고 누운 채 만반의 채비를 하고는 직원을 맞으셨다. 평소 내가 아는 아버지의 기억력이나 인지력은 그리 좋지 않기에 그때까지 나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아니 별 문제없이 해낼 거라고 약간 기대도 했다. 마치 본인이 심사받는 양 방 문턱 너머에 바짝 다가앉은 어머니는 금방이라도 아버지를 향해 신호를 보내려고 애를 썼지만 아버지의 눈은 오로지 여직원만을 향했다.


“머리로 산발로 하고 옷도 지금 입은 그거 말고 허름한 거 있다아이요? 그래가 저어 침대에 누우가이고 여엉 다 죽어가는디끼 하고 뭐로 물어보모 우짜다 대답을 하소. 귓구녕이 먹어가 말소리도 득기도 안 한다 카고 옷에다 오좀도 싼다 카소. 마당 내리갈 때는 할멈이 업어내란다 카고… 아이?”

눈치코치 없기로는 거의 구십구 단에 가까운 아버지를 너무 잘 아는 어머니는 밥자리에서 아버지에게 몇 번을 반복해 교육을 하셨다.


노인 상대로 하는 이 일이 그 직원에게는 뭐 그리 어려운 일일까. 머리부터 발끝까지 쓱 한번 훑어보고 질문 몇 가지 던져보면 그 자리에서 바로 등급을 매길 만큼 경험이 많을 직원은 인사 끝나기가 무섭게 아버지 코앞에 바짝 붙어 앉아 볼펜으로 체크를 해가며 질문하기 시작했다. 오늘이 며칠인지를 시작으로 요일 확인, 주민등록번호 외우기, 단어 암기, 따라 하기, 숫자 계산하기, 손발 움직이고 들어 올렸다 내리기, 걸어보고 앉아보기 등...

이런 경우, 어머니였다면 모의 연습도 사전 교육도 필요 없었을 것이다. 어머니라면 순발력도 임기응변에도 아주 뛰어나 아마 한 번에 오우케이였을텐데. 애타는 어머니의 절박함과 달리 질문하는 것마다 별 망설임도 주춤거림도 없이 또박또박 곧잘 대답하시는 아버지는 상냥하고 친절한 여직원의 “아버님! 총기 있으시네요?” 하는 칭찬에 더더욱 힘입어 끝까지 무사히 진실만을 말씀하셨다. 딱 하나, 신호를 주려고 뚫어져라 아버지를 향하는 어머니의 눈과 마주친 순간 날짜를 헷갈려 틀린 것 말고는.


아아! 칭찬은 아버지의 기억을 한순간에 무너뜨렸다. 예정에 없었던 아니, 우리의 의도와 다르게 아버지가 너무 침착하고 차분히 대답하시는 바람에 나는 내 등 뒤에 앉은 어머니가 기가 막혀 쓰러지셨나 해 돌아보았다. 어머니는 움쩍도 하지 않고 잘 버티고 계셨다. 아버지가 다니는 병원에서 의사 소견서를 받아 첨부하는 절차만 밟으면 한 달 뒤 통보한다고 했지만 나는 한 달 뒤에 나올 결과가 짐작이 갔다.

 

여자 친구가 많은 노치원의 꿀맛 같은 시간을 포기한다 하더라도 아버지는 틈틈이 읽는 조선 시대 역사책의 어느 선비의 청렴함을 따라 하고 싶었을까? 올 때처럼 또 친절하게 인사를 하며 나서는 여직원이 대문을 채 나서기도 전에 할멈의 앙살 섞인 말투가 총알같이 날아와 아버지의 꽉 막힌 귓전에 윙윙거린다.

“아이구! 헛솥 장사 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또 이렇게 대꾸하실 게 틀림없다.

“ 내 본심이 그런 기라, 그기 사람 마음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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